[include(틀:대한민국 역대 해군참모차장)] ---- ||
<-100> '''{{{#FFFFFF 역임한 직위 }}}'''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해군사관학교장)] ---- [include(틀:광복회장)]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66, #000080 20%, #000080 80%, #000066)" '''[[대한민국 해군참모차장|{{{#FFF 대한민국 제11대 해군참모차장}}}]][br]{{{#fff {{{+1 김상길}}}[br]金相吉}}}'''}}}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상길.jpg|width=100%]]}}} || ||<|2> '''{{{#fff 출생}}}''' ||[[1926년]] [[12월 29일]] ||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 || ||<|2> '''{{{#fff 사망}}}''' ||[[2018년]] [[4월 22일]] (향년 91세) || ||[[성남시]] [[강동구]] [[서울대병원]] || || '''{{{#fff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 '''{{{#fff 본관}}}''' ||춘양 김씨 || || '''{{{#fff 가족}}}''' ||배우자 이영선[br]슬하 3남 || || '''{{{#fff 주요}}}'''[br]'''{{{#fff 경력}}}''' ||[[해군작전사령부|한국함대]] 제1전단 전단장[br][[해군사관학교]] 순항기동단대 사령관[br]제16대 [[해군사관학교#s-3|해군사관학교 교장]][br]제11대 [[대한민국 해군참모차장|해군참모차장]][br][[해군작전사령관|한국함대사령관]][br]제9대 [[광복회]] 회장 || || '''{{{#fff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br]화랑무공훈장 수훈||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대한민국 해군참모차장|해군참모차장]]을 역임한 [[해군]] [[제독]]. 제8대 [[광복회]]장 역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2015년 화랑무공훈장 수여. == 생애 == 1926년 12월 29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에서 태어났다.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업학교]] 재학 중인 1942년 5월 동기생 이상호, 서상교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학생결사단체인 태극단을 조직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일본군 입대 반대 등 일제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살포하고, 1943년 4월에 김정진, 이준윤, 이원현, 윤삼용 등의 동지들을 포섭해 조직을 확대하였다. 1943년 5월 비파산 약수터에서 결단식을 가져 투쟁방안에 대해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은 일반조직, 특수조직을 두고 의결기관으로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는데 일반조직은 육성부 아래에 관방국, 체육국, 과학국을 두고 그 밑에 군사부, 항공부 등 10여 개의 부서를 두어 체계화했으며 특수조직은 국민학교 고학년 및 중학교 1,2학년 생을 두어 향후 단원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향후 전국 학교로 조직을 확대해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을 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중국으로 망명해 그 곳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그는 태극단 관방국장으로 태극단의 일반사무 및 활동을 관장하였다. 태극단은 이후 용두산, 비파산 등지에서 학술연구회, 체육회 등을 개최해 동지간 유대의식을 강화하고, 교양 함양 및 체력증강에 힘을 쏟았으며, 군사관계서적 번역 및 폭발물 제조 연구 등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했다. 그러나 동지의 밀고로 태극단 활동이 발각되고 수업 도중 동지들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 끝에 1944년 1월에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단기 5년 장기 7년 형을 선고받고, 인천소년교도소에서 복역 중 [[8.15 광복]]을 맞이해 석방되었다. 해방 후 [[해군사관학교]] 1기로 입교해 해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1949년 8월 10일 미국 군사고문단 단장인 윌리엄 로버트 준장의 전용 보트가 북한에 나포되자 8월 17일, [[함명수]]의 지휘 하에 [[공정식]] 등과 보트 구출을 위한 몽금포 작전에 소해정인 JMS 302 함의 함장으로 참여하였고, 보트는 [[남포시|남포]]에 있어 구출에 실패했지만 북한 함정 4척 격침, 1척 나포, 포로 5명의 전과를 올렸다. 이후 [[6.25 전쟁]]에도 참전하였고, 1955년 해군종합학교 교장을 역임하던 중, 7월 1일 [[해군대학]] 1기생으로 입교해 국방장관상을 받고 졸업했다. 1963년 1월 [[준장]]으로 진급했고, 3월 1일 이상호, 서상교 등 태극단 동지들과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6월 25일 [[해군작전사령부|한국함대]] 제1전단 전단장에 임명되었고, 1964년 해군사관학교 순항기동단대 사령관으로 사관생도의 순항훈련을 지휘하였다. 8월 해군 통제부[* 현재 [[진해기지사령부]] 및 [[해군군수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68년 1월 [[소장(계급)|소장]]으로 진급하였다. 1969년 4월 10일 해군사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고, 1970년 4월 10일 해군참모차장이 되었으나, 1971년 1월 김광옥 소장의 진급 및 해군참모차장 임명으로 [[해군작전사령관|한국함대사령관]]으로 전보하였다. 한국함대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동, 서해안에 전진기지를 세우는 등 무장간첩의 침투 및 전면전에 대비한 기동능력을 확보하는데 힘썼으며 1972년 예편하였다. 예편 후 진양종합건설, 코스모스 산업 등의 기업체 대표를 역임하였고, 1980년 9월 [[김홍일(군인)|김홍일]]의 후임으로 제9대 광복회장에 선출되었다. 1982년 [[안춘생]]과 [[독립기념관]] 추진위원회를 발족해 독립기념관 건립에 기여하였고, 1984년 9월 후임 광복회장인 [[유석현]]에게 넘기고 광복회 고문으로 물러났다. 이후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가 기념사업에 매진하였다. 2015년 몽금포작전이 재조명 됨에 따라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2018년 4월 22일 [[성남시]] [[분당구]] [[서울대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자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6.25 전쟁/군인]] [[분류:건국훈장 독립장]] [[분류:화랑무공훈장]]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대구상원고등학교 출신]] [[분류:해군사관학교 출신]] [[분류:대한민국 해군참모차장]] [[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분류:1926년 출생]] [[분류:2018년 사망]][[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