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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롯데우승엠블럼V2.jpg|height=55]][br]'''KBO 리그 한국시리즈[br]우승반지''' || || '''[[1992년 한국시리즈|{{{#ed1c24 1992}}}]]''' || ---- ||<-5> '''{{{#000000 [[롯데 자이언츠|{{{#000000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8번}}}''' || || 이승훈[br](1988) || {{{+1 →}}} || '''{{{#ffffff 김선일[br](1989~1997)}}}''' || {{{+1 →}}} || [[손인호(야구)|손인호]][br](1998~2000) ||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롯데김선일.png|width=100%]]}}} || ||<-2> '''{{{+2 김선일}}}[br]金善一 | Kim Seon-Yil''' || || '''출생''' ||[[1965년]] [[8월 2일]] ([age(1965-08-02)]세)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학력''' ||[[경남고등학교 야구부|경남고]] - [[동아대학교 야구부|동아대]] || || '''포지션''' ||[[포수]] || || '''투타''' ||[[우투우타]] || || '''프로 입단''' ||[[한국프로야구/1989년/신인 드래프트#s-2|1989년 1차 지명]] ([[롯데 자이언츠|롯데]]) || ||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89~1997)'''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남고등학교 야구부|경남고]] - [[동아대학교 야구부|동아대]](1985학번)를 졸업하고 1989년 1차 3순위 지명으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포지션은 [[포수]]. 1992년 당시 팀의 주전 포수였으며, 롯데에서 10년 가까이 활약한 원클럽 프랜차이즈 선수였다. == 선수 경력 == 아마 시절부터 건실한 수비력으로 인정을 받았고 주전 포수인 [[한문연]]의 뒤를 이어받아 1991년부터 주전을 꿰찼다. 타격은 [[멘도사 라인]]을 오르내리는 수준으로 선수시절 시즌 최고 타율이 0.246에 지나지 않았다. 선구안도 그저 그랬고 한 방이 있는 타자도 아니었다. 1991년부터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1992년부터 1994년까지 강성우와 함께 롯데의 포수 자리를 양분했다. 강성우가 1992년에 데뷔하며 임팩트를 보였고, 김선일보다 훨씬 더 공격력이 강하며 수비력도 크게 뒤지지 않았음에도 주전 자리를 지켰으며,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까지 함께 했다.[* 당시 신인 투수 [[염종석]]을 강하게 조련했고 안정된 [[포수 리드]]로 좋은 성과를 냈다.] 심지어 수비형 포수가 절실하던 삼성이 트레이드를 요청했다는 설이 있었을 정도. 이 때만 해도 수비형 포수로 전도유망했지만 갑작스럽게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데 그 이유는 허리부상. 부상을 당한 이유가 어처구니없게도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 세리머니를 하다가 그라운드에서 넘어지면서 당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 부상이 고질적인 허리통증을 야기했으며 이는 특히 포수 포지션에는 치명적이었다. 결국 이듬해인 1993시즌부터 [[강성우]]와 포수마스크를 나눠 쓰기 시작했다. 95년부터는 주전급으로 도약한 [[임수혁]]에게 백업 포수의 자리도 물려주고 제 3의 포수로 기용되었다. 그러나 풍부한 경험 덕택에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포함되었으며 [[LG 트윈스]]와의 [[KBO 플레이오프/1995년|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는 [[김용수]]에게 9회말에 끝내기 안타를 쳐내며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기도 했다. 이 경기는 수 차례 동점과 역전이 반복된 접전이었는데, 주전 3루수였던 [[공필성]]이 교체된 후 당시 백업 유틸리티 내야수였던 [[조규철]]이 3루 수비를 보고 있다가 9회초 LG 트윈스 내야수 송구홍 타구의 불규칙 바운드로 안면을 강타당하여 병원으로 실려간 상황이었다. 경기 막판이라 교체할 내야수 카드가 전혀 없었던 상황. 심지어 당시 중계방송 해설을 맡은 [[하일성]]조차 돌발사태에 당황해 엔트리에 남은 선수 중 은퇴를 바라보고 있던 왕년의 주전 3루수 [[한영준]]의 투입 가능성 정도를 예상하며 횡설수설하던 찰나, [[김용희]] 감독은 1루수였던 [[마해영]]을 3루수로 돌리고 김선일을 1루수로 교체 투입하는 선택을 했다. 김선일이 타구 처리를 어떻게 할지 관심사가 쏠린 상황이었으나 천만 다행으로 1루방면 타구는 나오지 않고 9회초 수비를 마무리했고, 바로 이어진 9회말 상대투수 [[김용수]]로부터 1아웃 이후 [[김응국]]의 3루타와 [[임수혁]]의 [[고의사구]]에 이어 타석에 들어선 김선일이 끝내기 안타를 뽑아내 7:6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부산 홈그라운드에서 치른 OB와의 [[1995 한국시리즈]] 3차전 2사 2루 끝내기 찬스에서 뜬공으로 물러난것은 아쉬운 부분으로 남았다. 당시 양팀은 잠실의 첫 두 경기에서 1승씩을 주고받은 상황이었고, 여기서 김선일이 끝내기 결승타를 쳤다면 롯데는 한층 유리한 입장이 될 수 있었다.[* 앞선 2차전이 OB의 끝내기 밀어내기 승이었기 때문에, 한국시리즈 최초의 2경기 연속 끝내기가 이때 나올수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이 말 그대로 마지막 불꽃이 되고 말았다. 이듬해인 96년은 1군에서 단 두 경기에 대수비로 출장한 것이 다였다. 허리부상의 치료와 재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별 차도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다음해인 97년 또한 1군 엔트리에 포함되지못했다. 결국 97년 6월 26일 시즌이 한창인 시점에서 스스로 퇴단을 선택하고 임의탈퇴 형태로 방출된 뒤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 평가 == [[1992년 한국시리즈|1992년 롯데의 마지막 우승]]의 숨은 주역으로 평가 받는 선수다. 포구가 뛰어난 데다가 투수 리드도 좋았고 타자와의 심리전에도 능해서 당시 타 구단 타자들이 가장 지능적인 플레이를 하는 포수로 김선일을 지목했을 정도이다. 또한 강견은 아니었지만 주자들의 움직임을 읽는 눈이 뛰어나서 도루 저지도 괜찮았고 주자를 묶는 능력도 탁월했다. 즉 수비력만 보면 당시 리그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는 것. 통산 성적은 8시즌 타율 0.204, 홈런 2개 84타점으로 눈에 띄는 성적은 아니지만, 국내 프로야구에서 포수난에 시달린 적이 없는 몇 없는 구단이라고 할 수 있는 [[롯데 자이언츠]]의 주전 포수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임은 확실하다. == 여담 == * [[염종석]]이 [[스톡킹]]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꽤나 욕쟁이였다고 한다. 한 번은 사인 내는 걸 거절하자 심판에게 타임을 부르고 차마 방송에서 말할 수 없는 욕을 내지르고는 다시 돌아갔다고. == 관련 문서 == * [[야구 관련 인물(KBO)]]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김선일, version=193)]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1965년 출생]][[분류:1989년 데뷔]][[분류:1997년 은퇴]][[분류:경남고등학교 출신]][[분류:동아대학교 출신]][[분류:포수]][[분류:우투우타]][[분류:롯데 자이언츠/은퇴, 이적]][[분류:원클럽맨/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