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신라의 귀족]][[분류:신라의 종교인]][[분류:김해 김씨]] 金巖 [목차] == 개요 == [[신라]] 하대의 [[귀족]], [[외교관]], [[역술인]].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의 [[서자|서손]]이다. 고조부는 김유신, 증조부는 [[김삼광]], 할아버지는 김윤중이다. [[김장청]]과는 형제 혹은 친척이다. 같은 집안의 김융이 [[혜공왕]]대에 반란을 일으켜 가야계 김씨([[김해 김씨]]) 가문이 신라 하대에 많이 떨어졌지만 김암은 크게 연좌되진 않았는지 계속 관직을 지냈고, 김암의 이름과 명성이 8세기 당시 [[당나라]]와 [[일본]]까지 알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부록에 실려있으며, 일본 기록인 [[속일본기]]에도 등장한다. == 생애 == 어릴 때부터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했으며 방술(方術, [[도교]]적 수행법)을 익히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젊을 때 [[이찬]]에 올랐다고 되어있다. 이찬은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둘째 등급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김유신행록]]의 과장 혹은 노년에 이찬이 된 것을 젊을 적으로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일단 신라 사회에서 아무리 금수저라도 어릴 때는 좀 아래 관등부터 시작해 노년기에 이찬을 다는 것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그는 [[서자|서손]] 출신인데다 그가 역임한 관직들이 대부분 [[6두품]]에 해당하는 관직이기 때문. 아무튼 젊을 적에는 [[당나라]]에 숙위학생 신분으로 [[유학]]을 갔다왔다. 이 시절 스승에게 [[음양사|음양가]]의 술법을 배웠다고 한다. 한 가지를 들으면 세 가지를 깨달아 스승의 가르침을 응용해 <둔갑입성지법(遁甲立成之法)>을 지었다. 단순한 도술만이 아니라 [[천문학]], [[지리학]], [[역법]] 등도 배워왔다. [[혜공왕]] 재위기간인 766년~779년 사이에 신라로 귀국해 [[천문학]]을 관장하는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다. 이후 [[양주]], [[강주]], [[한주]]의 [[태수]]나 [[패강진]]의 두상(頭上) 등 지방관을 역임하고 다시 수도에서 집사시랑(執事侍郞)직을 맡았다. 가는 곳마다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고 특이하게 농사짓는 계절 외 남는 시간에 한가할 때 [[육진병법]](六陣兵法)을 지방 백성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패강진]]에서 근무하던 시절 중국 쪽에서 [[메뚜기떼]]가 발생하자 김암이 산꼭대기에서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하자 메뚜기떼가 물러갔다고 한다. 779년 김암이 외교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는데, 일본 왕은 김암이 현명하다고 해서 억지로 붙잡아 두려고 했는데 마침 당나라 지인 고학림(高鶴林)이 당나라의 사신으로 일본에 와 있어 서로 만나 기뻐하자 중국에도 알려진 인물을 붙잡아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