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대한제국의 인물]][[분류:일제강점기의 인물]][[분류:1835년 출생]][[분류:1922년 사망]][[분류:광주시 출신 인물]][[분류:청풍 김씨]][[분류:외교관]][[분류:온건개화파]][[분류:김홍집 내각]][[분류:대한제국 중추원 의장]][[분류:조선귀족 자작]][[분류:대종교 신자]]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 || '''{{{#ffde09 역임한 지위}}}'''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외부대신)] ---- || '''{{{+1 [[일제강점기|{{{#fff 일제강점기}}}]] [[조선귀족|{{{#fff 조선귀족}}}]]}}}''' || || {{{#!wiki style="margin: -0px -10px" {{{#fede58 {{{#!wiki style="margin: -6px -1px" {{{#555555,#aaaaaa || '''[[자작(작위)|{{{#191919,#e5e5e5 자작}}}]]'''[br]--김윤식-- || || {{{-1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 ---- [include(틀:조선총독부 중추원)] ---- }}} || ---- ||<-2> '''[[대한제국 중추원|{{{#ffde09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br]{{{+1 김윤식}}}[br]金允植|Kim Yun-sik'''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20-406545.jpg|width=100%]] [[1897년]] [[제주도]]에서 촬영 }}} || || '''이름''' ||김윤식 (金允植)|| ||<|2> '''출생''' ||[[1835년]] ([[헌종(조선)|헌종]] 1) [[10월 29일]][br]([[시헌력|음력]] [[http://db.history.go.kr/id/sa_013_0010_0020_0060|10월 3일]])|| ||[[경기도]] [[광주시/역사|광주부]][br](現 경기도 광주시)|| ||<|2> '''사망''' ||[[1922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2012200209203001|1월 21일]] (향년 86세)|| ||[[경성부]] 자택[br](現 서울시 종로구 봉익동 자택)|| || '''묘소'''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삼패리 평구마을[br](현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 '''저서''' ||《운양집》, 《임갑령고》[br]《천진담초》, 《[[음청사]]》[br]《[[속음청사]]》||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청풍 김씨]] (淸風) || || '''증조부모''' ||증조부 : 김기건 || || '''조부모''' ||조부 : 김용선 || || '''부모''' ||부 : 김익태(金益泰)[*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한 조선의 관리.][br]모 : 전주 이씨 || || '''배우자''' ||윤씨 || || '''활동''' ||[[1874년]] ~ [[1922년]] || || '''신장''' ||9척(187cm)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3&totalCount=3&prevPage=0&prevLimit=&itemId=prd&types=o&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prd_002_0030_0160&position=0|동학농민혁명자료총서]]에서 [[동학 농민 혁명]] 당시 김윤식의 키가 9척(九尺)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척 단위인 30.3cm로 계산하면 273cm가 나오지만 김윤식의 키를 표현하는 9척은 당시 조선 후기 시대의 척 단위인 30.3cm가 아닌 조선시대에 쓰였던 척 단위 중 하나인 주척(20.8cm)을 사용하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주척인 20.8cm을 쓸 경우 187cm 정도 현실적인 수치가 나온다. 주척으로 계산한 키도 저 당시의 남성 평균 키가 161cm였음을 감안하면 당시에는 엄청난 장신이다. 그러나 아래 단체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다른 문신들과 키가 거의 비슷하고, 187cm로 보이지도 않는다.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 || '''학력''' ||한학 수학 ,,([[1874년]], 증광시 병과),, || || '''직업''' ||학자, 시인, 정치가 || || '''종교''' ||[[유교]]([[성리학]]) → [[대종교]] || || '''자''' ||순경 (洵卿) || || '''호''' ||운양 (雲養) || || '''작위''' ||--조선 귀족 자작--[*박탈] || || '''경력''' ||외부대신[br][[대한제국 중추원]] 의장[br]--조선귀족 자작--[*박탈][br]초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mYunSik.jpg|width=100%]]}}} || || '''김윤식 초상화'''[* 조선인의 모습을 많이 그린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Llizabeth Keith, 1897-1956),,가 지은 "Old Korea 1920-1940"이라는 책에 수록된 초상화로 [[1919년]] [[3.1 운동]] 직후 엘리자베스 키스가 한국을 여행하던 중 미국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주선으로 김윤식과 만나 김윤식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하도 울적하여서 새파란 하늘 높이 올라갔다네[br]굽어보니 공자님 가르침의 이 나라에 조석연기 나는 굴뚝 몇몇이런가[br]돌아가려도 한땐들 마음 편히 쉴 곳 없어[br]아아, 고래고래 울부짖으며 풀어헤친 머리로 훌쩍 내려왔다네[* 欲乘飛艇上靑天[br]俯視齊州幾點烟[br]回棹終無休泊處[br]狂吟披髮下翩然]" >---- >운양 김윤식 [[조선]] 말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 본관은 [[청풍 김씨|청풍]]. 대표적인 친청파이자 온건개화파[* [[한국사]]를 배울 때도 개화 사상의 대두 때 [[개화파]] 및 분파된 이후 온건개화파에 항상 이름이 나온다.]로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으로서 [[갑오개혁]]을 추진하기도 했다. [[러일전쟁]] 직후부터 친청/친러 개화파들이 그러했듯이 소극적인 [[친일]] 성향을 보이게 되며 [[경술국치]] 이후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 1919년 [[3.1 운동]] 때 [[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제출해 작위를 박탈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3.1 운동은 국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김윤식 등의 사례처럼 친일 행적을 보이던 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김윤식 외에도 이용직이 독립청원서를 제출해 작위가 박탈당한채 수감되었고 [[이종건(1843)|이종건]]이 작위를 반납하려다 거부당했으며 [[을사오적]] 중 1명인 [[권중현]]과 [[정미칠적]] 중 1명인 [[이재곤(1859)|이재곤]]이 작위 반납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도 거부당했다.] == 생애 == === 생애 초기 === 1835년 [[http://db.history.go.kr/id/sa_013_0010_0020_0060|음력 10월 3일]], [[경기도]] [[광주시|광주부]]에서 이조판서와 좌찬성 등을 역임한 김익태와 부인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효종(조선)|효종]] 때 [[영의정]]을 지냈고 [[대동법]]을 추진한 관료인 [[김육]]의 9세손이다. 8세가 되던 해에 부모님을 잃고 숙부인 청은군 익정의 집이 있는 양근에서 생활했다. 1850년 그는 유신환(1801~1859)의 문하에 들어가 [[남정철]], [[민태호(조선)|민태호]], 박홍수[* 훗날 [[을사오적]]으로 세간의 비판을 받는 [[박제순]] 전 총리의 부친이다.] 등과 학문을 배웠다. 그가 30세가 되던 해에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대과에서는 합격하지 못해 10여 년 동안 학문에만 전념했다. 1859년 유신환이 사망하자 연암 [[박지원(실학자)|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시조로 꼽히는 [[박규수]]의 문하로 들어가 개화 사상을 배웠으며 1874년 40세의 나이로 증광시 병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 관직 생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91a64adebc12245f44c5f521b436626f.jpg|width=100%]]}}} || || [[고종(대한제국)|고종]]과 관료들의 모습 ,,(1890년),,[br]가운데가 고종, 왼쪽부터 이정로, 심상한, 김윤식, [[김성근(1835)|김성근]],[br]이용원, 김병익, [[민종묵]], 서정순, 이주영, 김영전 || 1880년대 당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실질적으로 친정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고종은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 세력을 신임했고 여흥 민씨 세력은 그를 등용했다. 1876년 [[황해도]]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순천시|순천]]부사를 지냈으며 1881년 [[영선사]]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양무운동]]으로 개화되던 청나라의 모습을 보고 돌아왔는데 이는 이후 김윤식의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톈진시|천진]]에 파견되어 있었는데 조선의 민씨 세력들로부터 반란이 일어났으니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급보를 받은 김윤식은 [[이홍장]]과 [[위안스카이]]를 찾아 도움을 요청했다.[* 때문에 김윤식이 [[갑신정변]]에 청나라를 끌여들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지만 김윤식의 요청 때문에 청나라가 개입한 것인지, 다른 역학적 요인 때문에 개입한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는 청나라 군대와 함께 귀국한 뒤 임오군란 진압에 개입하며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시키게 했다. 이후에는 [[강화도|강화]]유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동도서기론적인 정책들을 추진했고 [[통리기무아문]]의 여러 요직을 역임했으며 1884년 [[러시아]]와의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게 되며 실패하자 이는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김윤식은 박영효의 아버지 박원양을 장사지낸 혐의와 [[흥선대원군]]을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귀국시키려던 [[위안스카이]]와 동조했다는 혐의로 실각해 1886년 광주유수로 좌천되었다가 [[충청남도]] 면천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김홍집]] 내각에 외부대신으로 합류하기 전까지 8년 동안 유배 생활을 지냈다. === 김홍집 내각 === 1894년 온건개화파 김홍집을 중심으로 [[갑오개혁]]이 실시되며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으로서 조선의 외교 정책을 담당했고 개화에 힘썼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이 청나라에게서 [[요동]](랴오둥) 반도를 할양받게 되자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3국이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이 [[다롄시|다롄]]을 러시아에 양도하도록 압박했고 결국 일본은 다롄을 양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조선에서는 [[박정양]], [[이완용]] 등을 중심으로 한 친미/친러 성향의 내각이 수립하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정국을 반전시킨 후 김홍집, [[조희연(1856)|조희연]], [[정병하]] 등을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해 그는 외부대신으로서 내각에 다시 합류했다. 다시 수립된 친일 내각은 [[단발령]], [[종두법]] 등 [[을미개혁]]을 시행했고 [[태양력]]을 채용하는 등의 [[개혁]] 정책을 펼쳤지만 단발을 강요하는 등의 정책은 백성들의 반발이 매우 심했고 특히 을미사변으로 반일 감정이 극심해져 있던 상황에 김홍집 내각 자체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내각이었기에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1896년에는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 참여하고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해산되며 실패로 끝이 났으며 [[최익현]]을 비롯한 위정척사파들의 공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고종은 을미사변 직후 [[경복궁]]을 일본군과 친일 내각이 장악한 것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1895년 임최수, [[청안군(1851)|청안군]], [[이범진]] 등의 정동파 관료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등의 도움을 받아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으나 친위대장 [[이진호(1867)|이진호]]가 군부대신 서리 [[어윤중]]에게 밀고해 실패로 끝이 났다. 그러나 3개월 후 다시 이범진, [[이윤용(1855)|이윤용]], [[이완용]] 등을 비롯한 정동파 관료들의 철저한 준비 끝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데 성공해 김홍집 내각은 붕괴하게 되었다. 김홍집 내각의 을미개혁 역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인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친일 내각이 무너지며 을미개혁 역시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 실각 및 유배 생활 === 당시 외부대신이었던 김윤식을 포함해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유길준]], 군부대신 조희연, 탁지부대신 어윤중, 법부대신 [[장박]](장석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등이 면직되고 역적으로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 체포된 김홍집과 정병하는 순검들에게 살해당했고 고향으로 도피했던 어윤중도 원한이 있던 향반 무리에 의해 살해당했다. 새롭게 출범한 [[김병시]] 내각은 반일 성향의 내각으로 김윤식을 을미사변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묵인한 죄로 강하게 탄핵했고 결국 1897년 [[제주도]]로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다. 1898년 12월 대표적인 위정척사파인 최익현은 김윤식, 유길준, 서재필 등을 사형할 것을 주장했는데 김윤식은 제주도에서 [[신안군|지도]]로 옮겨가며 11년 동안 유배 생활을 보냈다. 그나마 [[일진회]]가 김윤식 사면 운동에 앞장섰지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가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고령을 이유로 석방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73세였다. === 말년 === >[[경술국치|불가불가(不可不可)]] >---- >김윤식,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조약]][* 경술국치 때의 이 대답은 상당히 애매한 대답이었는데 '不可 不可'로 해석하면 '절대로 안 되며 절대로 안 된다'는 대답이지만 '不可不 可'로 해석하면 '딱히 도리가 없으므로 해야 함'이 되어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당시 그의 입장을 찬성으로 볼 수도 있고 반대로 볼 수도 있다.] 1908년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을 역임했고 1910년 어전 회의에서 한일 병합에 대한 안건에 '不可不可'라고 대답하였으며[* 김윤식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이 반응을 해석하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 김윤식을 친일파로 인식하는 입장에서는 '不可不 可(딱히 도리가 없으므로 해야 함)'라고 해석하여 김윤식이 병합에 찬성했다고 보는 반면 민족주의자로 보는 입장에서는 '不可 不可(절대 절대로 안 됨)'로 해석하여 한일 병합에 반대했다고 보고 있다.] [[경술국치]] 직후 [[자작(작위)|자작]] 작위와 5만원의 위로금을 받았다. 1910년 10월 1일부터 1912년 8월 9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고 1916년 [[박제순]]에 이어 경학원 대제학을 지냈다.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1919년 독립 청원서를 제출해 [[3.1 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박탈당했다. 당시 김윤식은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총독에게 확실히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서 계책을 세웠는데 [[케이크]] 상자에 서류를 넣고 손자를 통해서 총독에게 선물이라며 보냈다. [[이용직]]과 함께 독립 청원서인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작성해 보냈다가 1919년 7월 17일 모든 작위를 박탈당하고 2개월간 투옥된 후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령[* 당시 85세로 21세기 현대에서도 85세면 나름 고령자 취급을 받는데 평균 수명이 현대보다 훨씬 낮았던 19세기 태생 인물로서는 엄청 장수한 셈.]을 이유로 [[집행유예]] 석방되었다. 이후에는 경학원 대제학에서 면직되고 [[조선귀족]] 자작 작위도 박탈당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m_Yun-sik.jpg|width=100%]]}}} || || '''조선귀족 자작 시절 모습'''[* 출처: "이미지로 보는 한일병합사(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 || === 사망 === 1922년 1월 21일, [[서울특별시|경성부]] [[종로구]] [[봉익동]] 자택에서 향년 86세로 조용히 사망했다. 김윤식은 “내 장의를 간소하게 거행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사회장]]을 결정했다. 1922년 1월 24일 이를 위해 [[박영효]]와 [[이용직]]을 장례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추대했으며 사회장위원회를 구성하고 업무를 나눠 진행하지만 1922년 1월 27일부터 김윤식 사회장을 반대하는 주장이 터져 나왔고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회혁명당]]과 [[조선공산당]] 등의 [[공산주의]] 세력이 김윤식의 사회장 반대를 주장했다. 조선 사회에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자 조선귀족 자작이었던 김윤식의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하는 것은 과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1922년 1월 30일과 1922년 2월 1일 등 2차례에 걸쳐 반대를 위한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제1차 강연회의 주제는 김윤식의 사회장 반대였고 제2차 강연회 주제는 사회장을 주도한 자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사회장을 반대한 사람들은 사회장을 주도한 자 모두를 민중의 적으로 규정하고 계급 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결국 사회장위원회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김윤식의 사회장을 취소하게 되는데 박영효의 설명에 따르면 사회장을 강행해 반대 운동이 더 격렬해지면 고인에 대한 도리가 아닐뿐더러 분쟁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윤식의 장례식은 그가 사망한지 2주만인 1922년 2월 4일 1,000여 명의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02597768.2.jpg|width=100%]]}}} || == 여담 == * 김윤식은 현재는 물론 당시에도 논쟁적인 인물이었다. 경술 국치 당시 의견과 독립청원서를 근거로 민족주의자로 보고 김윤식의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치르자는 세력과 김윤식이 조선총독부 내에서 귀족 작위를 받은 점과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한 점을 들어 반대하는 세력 간의 논란이 생겼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대일본장서 사건 또한 김윤식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강조하는 지점이 다르다. 친일파로 보는 입장에서는 대일본장서를 '일본 [[천황]]에게 독립을 청원한 문서'[* 실제로 그의 청원서의 문장들을 두고 너무 저자세이다, 굴종적이다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한문으로 작성된 문장을 영어로 번역되었고 이 영어로 번역된 청원서를 다시 중역하면서 생긴 오역에서 생긴 오해이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키스의 평가에서는 상당히 세련되면서 진중하게 조선 독립을 요구한 청원서라고 극찬한바 있다. 또한 청원서를 말 그대로 일제에 조선 독립을 청원 했다는 점에서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근왕파이자 조선의 마지막 내각 관료로써 신하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청원 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보는 반면 민족주의자로 보는 관점에서는 '일본 [[의회]]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한 문서'로 보고 있다. 비록 조선총독부 부의장이었고 조선귀족 자작이었지만 1919년 [[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고 [[3.1 운동]]에 동조한 점이 인정되어 [[친일인명사전]]에 실리지 않았고 각종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 명단에 실리지 않았다. * 월남 [[이상재]] 선생은 김윤식을 두고 이랬다 저랬다 한다면서 까기도 했지만, 그래도 좀 좋게 보았는지 그 이상으로 까지 않았다고 한다. *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사용한 [[조선 엔]] 지폐의 도안인 [[수노인]]의 모델이라는 설이 있다. 일단 외모가 닮았다. * 저서로는 <음청사>와 <속음청사>가 있다. 문집인 <운양집>은 2014년 번역이 되어 출판되기도 하였다. == 같이 보기 == [include(틀:김홍집 내각)] ---- [include(틀:아관파천)] ---- [include(틀:조선귀족)] ---- [include(틀:온건개화파)] ##분류 관련 김홍집 내각 관계자들은 아관파천 직후 반란자로 낙인찍혔으나 순종 즉위 직후 사면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