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옥천군 출신 인물]] ||<-2> {{{#!wiki style="margin: -6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김응선}}}[br] 金應先'''}}} || ||<-2> [[파일:빈 세로 이미지.svg|width=100%]] || ||<|2> '''출생''' ||[[1883년]]||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 ||<|2> '''사망''' ||미상||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 일본군 [[김응선]]과는 동명이인이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김응성은 1883년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에서 태어났다. 김응성은 1907년 일제에 의하여 군대가 강제해산이 되자 일본의 내정간섭에 적극적으로 반발하고자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전라도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한 [[문태수]] 의병장의 진으로 들어가 활약했다. 하지만 의병운동이 약화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정의단에 입단하고 조국광복운동에 헌신하였다. 정의단에서는 보다 본격적이고 효과적인 전략을 강구하던 중 국내진입을 통해 일제의 치안질서를 교란하고자 일제 관서 폭파를 계획하였고 지령을 받은 그는 국내로 잠입하게 되었다. 그는 [[창의단]]의 단원인 [[계의산]]을 만나 [[전좌한]]과 함께 거사를 공모한 뒤 단원 다수를 규합하고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조선총독부, 경성 부청의 각 신청사, 조선신궁 등 일본관저를 폭파하려고 했다. 그는 서천 수리조합에서 폭약을 구해 폭탄 6개를 제조,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1926년 1월 31일을 거사일로 잡았으나, 일경에 계획이 드러나 숙소인 청진동 진일여관에서 단원인 전좌한, [[김운용]],[[정명옥]], [[송암우]], [[정원득]], [[정석조]], [[김봉준]], [[남정]]과 함께 체포되어 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을 기리며 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