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6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김의한}}}[br]金毅漢'''}}}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의한.png|width=100%]]}}} || || '''이명''' ||김재한(金載漢)·김의환(金毅煥) || || '''본관''' ||[[신 안동 김씨]][* 문충공 [[김상용|상용]]파 27세 한(漢) 항렬.] || ||<|2> '''출생''' ||[[1900년]] [[1월 8일]] || ||[[한성부]] 서서 인달방 사직동계 무덕동[br](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종로구)|사직동]]) || ||<|2> '''사망''' ||[[1964년]] [[10월 9일]] || ||[[북한]] || || '''본관''' ||[[안동 김씨]] || || '''가족''' ||아버지 [[김가진]], 어머니 [[임(성씨)|부안 임씨]][br]배우자 정정화[br]아들 김자동 || ||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정정화는 그의 부인이다. == 생애 == === 일제강점기 === 1900년 1월 8일 한성부 서서 인달방 사직동계 무덕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서 아버지 [[김가진]]과 어머니 [[임(성씨)|부안 임씨]](扶安 林氏)[* 임기상(林琦相)의 딸이다.] 사이의 5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부안 임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며, 첫째 부인 [[남양 홍씨]](1845 ~ 1870. 3. 30) 홍재철(洪在喆)의 딸은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요절했다.] 1919년 조선 내에서 비밀결사 대동단(大同團)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동지 전협이 대동단의 본부를 [[상하이]]로 이전할 계획으로 그해 10월 10일 대동단 총재인 [[김가진]]을 먼저 [[중화민국]] [[상하이시]]로 망명하도록 권했다. 이때 아버지와 함께 조선을 떠나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 뒤 1928년 6월 상하이에 있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의 상하이지부 조직에 참가하여 재정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 5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절강성]] [[항저우시|항주시]](杭州市)로 이전할 때, [[김구]] 등과 함께 [[강소성]] [[자싱|가흥현]](嘉興縣)으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임시정부]] 활동에 참가하였고, 선전위원회의 선전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4년 1월에는 김구·[[안공근]]·[[이동녕]] 등과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낙양군관학교]] 분교 내의 한인반과 [[의열단]] 계열의 군관학교에도 관여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3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서처(秘書處) 비서 및 선전위원회 선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주로 [[충칭]]방송국을 통하여 국내에 있는 한인들에게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5월 [[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1935년)|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의 세 개 당이 통합하여 신당인 [[한국독립당(1940년)|한국독립당]]을 창립할 때, 감찰위원회 위원[* 당시 감찰위원장은 [[이동녕]], 감찰위원회 위원은 김의한 외에 [[이시영(정치인)|이시영]]·[[고운기]] [[http://db.history.go.kr/id/hdsr_007_0030_0040_0030|등이었다]].]과 상무위원 겸 조직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이 충칭으로 이전한 후 [[중화민국 국민정부]]로부터 [[한국광복군]] 활동에 대한 공식적인 동의를 얻게 되자 광복군 총사령부 주계(主計)에 [[지달수]]·나태섭·[[민영구]]·전태산과 함께 [[http://db.history.go.kr/id/hdsr_007_0030_0030_0020|선임되었으며]], 1943년 8월에는 한국광복군 조직훈련과장에 취임했고, 1945년 6월에는 정훈처(政訓處) 선전과장으로 광복군 활동에 참가하였다. 1941년 12월 2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부원에 선임되어 활동하는 한편, 외교연구위원회 위원[* 당시 외교연구위원회 회장은 [[조소앙]], 부회장은 [[신익희]], 위원은 김의한 외에 박건웅, [[이상정(독립운동가)|이상정]], 이정호 [[http://db.history.go.kr/id/hdsr_011_0090_0040|등이었다]].]에도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2월 25일 [[송병조]]가 별세하자 개최된 긴급국무회의에서 송병조의 치상위원(治喪委員) 중 한 명으로 [[http://db.history.go.kr/id/su_013_1942_02_25_0880|선임되었다]]. === 광복 후 === [[8.15 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1946년 4월 [[한국독립당]]이 국민당, 신한민족당과 함께 3당 통합을 할 때 집행위원에 [[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4_18_0020|선임되었으며]], 그해 8월 중앙상무위원에 [[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08_24_0170|선출되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947년 6월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 문제로 한국독립당이 다시 세 당으로 분리될 때, 한국독립당에 잔류하여 상무위원을 [[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22_0050|역임했다]]. 같은 해 12월 [[UN]]위원단 입국 뒤에 실시된 남북 전국총선거 참가에 관한 문제로 인해 한국독립당 대표로 [[존 리드 하지]] 중장에게 파견되어 현 사태에 대한 성명을 [[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15_0150|요청했다]]. 1948년 3월 한국독립당에서 남북요인회담 추진위원회를 설치할 때, 조소앙·조완구·[[엄항섭]]·[[조경한]]·백홍균(白泓均)과 함께 추진위원에 [[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02_0160|선임되었고]], 그해 4월 김구·조소앙·엄항섭·조완구·[[조일문]](趙一文)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22_0030|참석했다]]. 1949년 6월에는 한국독립당 독립운동사료 조사위원장에 [[http://db.history.go.kr/id/dh_012_1949_06_16_0110|선임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납북]]되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가 결성되었을 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10월 9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사후 [[재북인사릉]]에 안장되었으며 조국통일상을 수상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안동 김씨(후)]][[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1900년 출생]][[분류:196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납북자]][[분류:재북인사릉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