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422년 출생]][[분류:1478년 사망]][[분류:안동 김씨(선)]][[분류:조선의 공신]][[분류:조선 좌리공신]][[분류:조선의 문관]][[분류:좌의정]][[분류:우의정]][[분류:병조판서]][[분류:형조판서]][[분류:공조판서]][[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본명이 김질인 가야의 8대 왕, rd1=질지왕)] [include(틀:역대 조선 정승(태조-연산군))] ---- || '''{{{#f0ad73 김질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좌익공신)] ---- [include(틀:조선 좌리공신)] ---- }}} || ---- ||<-2> '''[[정승|{{{#f0ad73 조선 정승}}}]][br]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문정공(文靖公)[br]{{{+1 김질}}}[br]金礩''' || || '''출생''' ||[[1422년]]([[세종(조선)|세종]] 4)|| || '''사망''' ||[[1478년]] [[4월 6일]][* [[율리우스력]] [[3월 28일]].] (향년 55 ~ 56세)[* [[연 나이]] 56세.][br](음력 [[성종(조선)|성종]] 9년 2월 24일)[* [[세는나이]] 57세.]|| || '''[[봉호|{{{#f0ad73 봉호}}}]]'''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 '''[[시호|{{{#f0ad73 시호}}}]]''' ||문정(文靖)|| || '''[[본관|{{{#f0ad73 본관}}}]]''' ||[[구 안동 김씨]]|| || '''[[자(이름)|{{{#f0ad73 자}}}]]''' ||가안(可安)|| || '''[[아호|{{{#f0ad73 호}}}]]''' ||쌍곡(雙谷)|| || '''부모''' ||부친 - 김종숙(金宗淑, {{{-3 ? ~ 1470}}})[br]모친 - 이양직(李良直)의 딸|| || '''부인''' ||[[동래 정씨]]({{{-3 ? ~ 1458}}}) - [[정창손]]의 장녀|| || '''자녀''' ||장남 - 김의동(金義童)[br]차남 - 김예동(金禮童)[br]3남 - 김지동(金智童)[br]4남 - 김성동(金誠童, {{{-3 1452 ~ 1495}}})[br]5남 - 김이동(金利童)||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초기의 문신. 개국공신 [[김사형]]의 증손으로 [[단종(조선)|단종]] 복위를 위한 [[사육신]]의 정변 계획을 [[세조(조선)|세조]]에게 고해 바친 것으로 유명하다. == 생애 == 1450년(문종 1) 추장 [[과거 제도#문과|문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고 [[성삼문]], [[신숙주]]와 함께 [[문종(조선)|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5년(세조 1) 성균관사예로 임명되었는데, 이 때 성삼문의 제안으로 [[사육신|단종 복위 거사]]에 동참하게 되었으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 목숨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장인 [[정창손]]의 집으로 찾아가 거사를 밀고하였고 결국에는 세조에게 사육신의 계획을 고하게 된다.[* 단 정창손은 [[계유정난]]에 가담한 인물인 만큼, 이 음모를 고변해야 할 입장이기는 했지만, 자기 사위가 저 혼자 살려고 자기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비겁함에 기가 막혀 '이 더러운 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사육신 사건 이후에는 세조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군기감판사로 임명되었으며, 좌익공신, 상락군, 평안도관찰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지냈다. 세조가 승하한 이후에는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원상이 되어 어린 [[예종(조선)|예종]]과 [[성종(조선)|성종]]을 보좌했으며, [[경국대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후손으로 [[김자점]], [[김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