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김태련}}}[br]金泰鍊'''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태련(낙화유수).jpg|width=100%]]}}} || || '''별명''' ||[[낙화유수]] || || '''출생''' ||[[1929년]] [[11월 7일]] || ||<|2> '''사망''' ||[[2006년]] [[11월 2일]] (향년 76세) ||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을지로6가]] [[국립중앙의료원]] || || '''신체''' ||175cm, 100kg[* [[https://www.ilyosisa.co.kr/news/article.html?no=5576|출처]] 당뇨병에 걸린 뒤에는 몸무게가 사망 당시 60kg까지 줄었다.]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학력''' ||[[경동고등학교|경동중학교]] {{{-2 (졸업)}}}[br][[서울대학교 상과대학]] {{{-2 (경제학 / 2년 중퇴)}}}[* 52학번] || || '''직업''' ||조직폭력배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시절 [[이정재(조직폭력배)|이정재]]가 이끌던 동대문파 소속의 [[조직폭력배]]. 별명은 [[낙화유수]]. == 생애 ==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경동고등학교|경동중학교]][* 현 경동고등학교. 당시에는 경동중학교로써, 중/고등학교를 통합한 6년제였다.]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52학번으로 입학[* 당시 서울대는 부산에 임시캠퍼스를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전시라 대학사정이 열악해 강의가 천막에서 이뤄지기도 하였다. 때문에 이 사정을 덜기 위해 대학에 도움을 준 자녀를 입학시키도 하는 등 혼란한 시기였다.]했다. 낙화유수라는 별명도 이 때 생긴 것이라고 한다.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올라가 동대문파에 입단하여 행동대장으로 활동하였고, [[유지광]]의 휘하에 있으면서 자유당 정권의 비호 하에 여러 정치폭력 사건에 참가하였다. 대표적으로 [[고대생 습격 사건]]이 있으며, 이 때 주요 용의자로 활동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다 [[4.19 혁명]]으로 동대문파가 몰락하고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주최 하에 [[혁명재판]]이 열리자, 이정재를 포함한 동대문파가 검거되었고 김태련 역시 붙잡혀서 재판을 받았으나 곧 석방되었다. 이 때를 두고 김태련이 증언하기를, 대학 시절 그와 친했던 당시 혁명재판부 양준모 판사가 재판장에 선 그를 보고 "김태련, 아니 자네가 외교관이 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서 있느냐"며 기가 막혀 했다고 한다.[* 대학생은 물론이고 고등학생만 돼도 인정받던 시기에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다.] 이렇게 대학 동기들이 그의 석방을 위해 여러모로 힘을 써주어서 큰 처벌 없이 곧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혁명정부에서 관선 전라북도 군산시장과 전국구 국회의원 자리를 제안했는데[* 당시 [[박정희]] 소장이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제안한걸로 추정된다.] 본인이 거절했다고 주장했다. 석방 이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물론 본인이 주장하기로는 당시 [[민주공화당]] [[김종필]] 의장과 개인적인 친분을 이루기도 했고, 외무부 장관에게 비밀업무를 의뢰받아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여 국회오물 투척사건을 일으킨 김두한을 두들겨 패주었다는 등 여러가지 주장을 하였으나, 역시 [[진실은 저 너머에]]..], [[유지광]]의 장례식에 참가했다는 사실이 신문기사에 남아있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 [[https://www.youtube.com/watch?v=oLLAFjJVdQY|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50년대 자신의 활동상에 대해 여러 증언을 하였다. 고대생 습격사건을 회상하면서 우연한 충돌이었다고 자신을 변호하였고, 당시에는 자신이 했던 일이 옳은 것인 줄 알았다고 전했다. 말년까지도 이정재의 은혜를 강조하는 발언을 해오며 동대문파를 옹호했다. 정의사회실천모임 등 우익단체의 고문으로 재임하였고, 개인적으로도 경호회사를 운영하는 등 죽기 직전까지 여러 사회활동을 하다가 2006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원로 [[조폭]]의 사망이라 일본 [[야쿠자]]와 [[삼합회]]에서도 비밀리에 조문을 보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야인시대에서 오상사를 연기했던, [[라재웅]]이 실제로 만난적이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OG9El-PZpMU&ab_channel=%EC%B6%94%EC%96%B5%ED%8B%B0%EB%B9%84|#]] 또한 [[정팔(야인시대)|정팔]] 역을 맡았던 [[정형기]] 배우와도 만난 적이 있는데, [[https://youtu.be/4MBPuhY8ZFs?feature=shared&t=294|초면인 정형기가 예의를 갖추기 위해 '낙화유수 선생님'이라고 부르자 '건달 족보에 삼촌은 없다. 형이면 형이고 아우면 아우지'라고 답했고,]] 그 즉시 정형기는 호칭을 형님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 대중매체에서 == === 드라마 [[야인시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낙화유수(야인시대))] === 소설 [[무풍지대]] === 장호근의 소설 무풍지대에선 동대문에 들어가기 전 부산에서 활동했던 주먹패이자 건중친목회 부산지부 소속 조직중 하나인 신진파의 휘하 조직 소속으로 나왔는데, 같은 조직 소속인 김택근과 박기남등이 권총 살인사건으로 종신형이나 5년/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사실상 조직이 해체수순을 밟게 되자, 마침 다른 건으로 수배중이던 와중에 당시 부산에서 유명했던 절도범을 저먼스플렉스로 잡으면서 경찰에 자수 겸 신고를 했고 약간의 징역형을 살다 모범수로 조기석방되어 나온 뒤 서울로 올라온 직후 별동대에 들어간걸로 나온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낙화유수, version=59)] [[분류:대한민국의 인물]][[분류:1929년 출생]][[분류:2006년 사망]][[분류:뇌출혈로 죽은 인물]][[분류:경동중학교 출신]][[분류:경동고등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