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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fd88f '''{{{+1 나나 무스쿠리}}}'''[br]Nana Mouskouri}}}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s.smh.com.au/vd-nana-620x349.jpg|width=100%]]}}} || || '''예명''' ||나나 무스쿠리[br]Νάνα Μούσχουρη|| || '''본명''' ||이오안나 무스후리[br]Ιωάννα Μούσχουρη|| ||<|2> '''출생''' ||[[1934년]] [[10월 13일]] ([age(1934-10-13)]세)|| ||[[그리스 제2공화국]] [[크레타]] 하니아||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그리스)]|| || '''가족''' ||아버지 콘스탄틴 무스쿠리[br]어머니 앨리스 무스쿠리[br]언니 에우게니아 무스쿠리[br]배우자 요르고스 페실라스^^(1961년 결혼~1975년 이혼)^^[br]배우자 안드레 샤펠^^(2003.1.13. 결혼~현재)^^[br]아들 니콜라스 페실라스^^(1968.2.13. 출생)^^[br]딸 헬레네 페실라스^^(1970.7.6. 출생)^^ || || '''데뷔''' ||[[1958년]] || || '''포지션''' ||[[보컬]] || || '''장르''' ||[[팝 음악|팝]], [[재즈]], [[샹송]], [[렘베티카]] || || '''종교''' ||[[그리스 정교회]] || [목차] [clearfix] == 개요 == [[그리스]]의 가수. 전 세계에서 아테네의 흰 장미, 천상의 목소리 등의 수식어와 함께 극찬을 받았다. [[재즈]], [[샹송]], [[종교음악]] 등 넓은 스펙트럼을 가졌다. 본명은 이오안나 무스후리(Ιωάννα Μούσχουρη). 주로 나나 무스후리(Νάνα Μούσχουρη)라고 부른다. kh 음가를 갖는 χ로 인해 '무스후리' 쪽이 한국인에겐 그리스 원음과 비슷하게 들린다. 다만 이 소리는 규범상 ㅋ로 적게 돼있다. 부르즈 칼리파도 같다. == 생애 == [[1934년]], 그리스 [[크레타]]에서 태어났으며 3살 때 가족과 함께 [[아테네]]로 이주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고[* 무스쿠리의 언니도 음악에 재능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는 언니가 더 나았다고 한다.] [[프랭크 시나트라]], [[에디트 피아프]] 등 당대 유명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16살 때 아테네의 음악학교에 입학해 오페라 성악을 전공했으나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극장의 영사기사로 일했던 무스쿠리의 아버지는 반(反)나치 [[레지스탕스]] 활동까지 한 독립운동가였지만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데다가 도박까지 즐겼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어머니가 집안 생계를 책임졌다.] [[재즈]]에 흥미를 가졌던 무스쿠리는 생계를 위해 재즈 클럽에서 노래를 하면서 대중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던 와중 작곡가 마노스 하지다키스(Μάνος Χατζιδάκις)의 눈에 띄게 되어 1958년 [[렘베티카]]를 부르며 음악계에 데뷔했다. == 활동 == 1959년 그리스 음악제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곧 '지중해 음악제'에서도 대상을 받으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나나 무스쿠리의 명성은 1960년대부터 그리스를 넘어 유럽 여러 나라들과 미국까지 널리 퍼졌다. 1962년 [[퀸시 존스]]의 추천으로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음반을 냈고, 1964년에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가지며 수많은 팬들이 생겼다. 1960년대 후반, 그리스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후, 20년 가까이 해외에서 거주했는데, 60년대 후반 발표한 음반들이 영국과 독일 등지에서 히트를 쳐 1971년에는 당해 최고의 가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20년간 그리스를 떠나 있었으나 1984년 그리스로 귀국한 후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신민주주의당|신민주당]] 소속으로 [[유럽의회]] 의원직을 재임하기도 했다. 1958년에 데뷔한 후 2008년 은퇴를 선언하기 전까지 50년간 4억장에 가까운 음반을 판매한 기록을 세웠다. 다만 2011년부터는 예전까지는 아니더라도 투어를 재개한 상태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도 참가했는데 1963년 대회에 뜬금없이 [[룩셈부르크]] 대표로 나왔다. ~~같은 그리스인인 비키 레안드로스도 1968년에 똑같은 나라로 출전한다~~ 한국에서도 7080세대를 중심으로 잘 알려진 가수이기 때문에 한국인 팬들도 많으며, [[패티김]], [[송창식]] 등이 무스쿠리의 노래를 번안해 부르기도 했다. 한 때 12~13세 연하의 한국인 남성과 연인 관계였다는 소문이 있으나,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확인된 사실은 없다. [[1988년]] 88 MBC 서울국제가요제 공연을 위해 내한, [[2005년]]에도 내한 공연을 가졌고 [[2008년]] 은퇴를 선언한 후 은퇴 투어 공연중에도 한국을 방문해 고별 공연을 가졌다.[* 2008년 공연 때는 공연장 측의 미숙한 진행으로 평이 좋지 않았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때 피해를 입은 어민들을 위해 공연 수익 1만 달러를 기부했다. 은퇴 선언 후 성사된 내한 공연 당시 측근의 설명에 따르면, 나나 무스쿠리가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자신의 노래가 인기를 끈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는, 노래에 반영된 정서가 한국민의 그것과 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는 답변을 하였다. 2010년에는 [[그리스 경제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조국을 위해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04/2010030400634.html|연금을 반납]]하기로 결정했다. == 대표곡 == * 하얀 손수건(Me T'Aspro Mou Mantili) *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 되풀이 하여(Over And Over) *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 * 내게 말했어요(Μίλησε μου) * Only Love * Love story * Why Worry == 기타 == * 검은색 [[뿔테안경]]과 단발 생머리는 나나 무스쿠리의 상징이다. 나이 80을 넘긴 지금에 와서는 무색한 말이지만 과거에는 대단한 [[동안]]이기도 했다. * 의외지만 한국 드라마와도 나름 인연이 깊다. [[SBS]]의 [[형제의 강]]과 [[야인시대]]의 시라소니 린치사건과, 복수전 끝부분에 [[https://www.youtube.com/watch?v=Hxi_dcaGPvYo|Gloria Eterna]][* [[조지 프레드릭 헨델|헨델]]의 'Sarabande'에 가사를 붙인 곡.]가 OST로 쓰인 적이 있고, 드라마 [[하늘이시여]]에도 'Lascia Ch'io Pianga(울게 하소서)'[*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대표적인 [[아리아]]]가 OST로 쓰였다. * [[2005년]] 그랜저 광고에서는 'Try to Remember'가 배경음악으로 활용되었다. [[분류:1934년 출생]][[분류:1958년 데뷔]][[분류:2008년 은퇴]][[분류:그리스의 여가수]][[분류:그리스의 여성 방송인]][[분류:그리스의 정치인]][[분류:음악가 출신 정치인]][[분류:하니아 출신 인물]][[분류: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참가자]][[분류:그리스의 정교회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