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나병규}}}'''[br]'''羅炳圭[*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29&evntId=0034974737&evntdowngbn=Y&indpnId=000000692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1920년 12월 23일 판결문]]에는 羅炳'''{{{+1 奎}}}'''로 기재되어 있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나병규.jpg|width=100%]]}}} || || '''본관''' ||[[나(성씨)|나주 나씨]](羅州) || ||<|2> '''출생''' ||[[1852년]] [[1월 9일]] || ||[[평안도]] 성천도호부 숭인방 흥인리[* 평안도 성천도호부 회곶방 흥인리 → 19세기 초 평안도 성천도호부 숭인방 흥인리 → 1896년 평안남도 성천군 숭인면 흥인리 → 1952년 평안남도 회창군 숭인리][br](현 [[평안남도]] [[회창군]] 숭인리)[* [[나(성씨)|나주 나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나용환]]도 이 마을 출신이다.] || ||<|2> '''사망''' ||[[1924년]] [[7월 31일]] || ||[[경기도]] [[경성부]][br](현 [[서울특별시]]) || || '''직업''' ||[[한의사]], 독립운동가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소설가 [[나도향]]은 나병규의 장손자이다. == 생애 == 나병규는 1852년 1월 9일 평안도 성천도호부 숭인방 흥인리(현 평안남도 회창군 숭인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년기에 고향을 떠나 방황하다 한의술을 익혀 [[경기도]] [[경성부]] 용산면 청파1계(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 정착하였으며, 1902년에는 광제원의 사무위원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9_09A_13A_00090_2006_194_XML|임명되었다]]. [[경술국치]] 후인 1914년 2월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등록번호 45호의 의생(醫生)면허를 [[http://db.history.go.kr/id/gb_1914_03_26_a04940_0130|취득하고]] 경성부 어성정(현 [[중구(서울)|중구]] [[남대문로5가]]) 3번지에 한의원을 차렸다. 한편, 1909년 7월 기호흥학회에 참여하면서 청파청년학교(靑坡靑蓮學校)기금에 30환을 기부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곤 했던[[http://db.history.go.kr/id/ma_005_0120_0270|#]] 그는 경성부 상동교회(尙洞敎會)에 출석하던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 지원 단체였던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단원 [[조종대]]와 친분을 맺게 되었는데, 조종대의 모친을 한의술로 치료해준 인연으로 조종대와 [[의형제]]를 맺기도 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https://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5&nNewsNumb=20150818080&nidx=20594|#]] 그리하여 나병규도 그의 독립운동에 동참하게 되어 자신의 한의원을 대한독립애국단의 연락 거점으로 제공하고 조종대에게 물자,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0년 1월 대한독립애국단 강원도단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곧 나병규도 체포되었다. 그해 10월 30일 [[http://db.history.go.kr/id/su_005_1920_10_30_0760|예심이 종결되었으며]]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증회,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공갈취재 등의 혐의로 벌금형 100원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29&evntId=0034974737&evntdowngbn=Y&indpnId=000000692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는데]], 만일 기한 내에 100원을 완납치 않으면 50일간 노역장에 유치되는 조건이 붙었다.[[http://db.history.go.kr/id/su_005_1920_12_99_0590|#]] 이후 1922년 7월 25일 조종대가 죽자 조종대의 두 딸 조숙경·조현경을 보살폈으며 경성부에서 계속 한의원을 운영하다 1924년 7월 31일에 별세했다.[* 1924년 7월 31일 사망으로 의생면허증이 8월에 반납된 사실이 보인다.[[http://db.history.go.kr/id/gb_1924_09_05_a36200_0280|#]]] 대한민국 정부는 나병규에게 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의사]][[분류:나주 나씨]][[분류:성천군 출신 인물]][[분류:1852년 출생]][[분류:192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