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건국훈장 대통령장)] [include(틀:의열단)]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나석주}}}[br]羅錫疇 | Na Seok-ju'''}}}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나석주 실제 모습.jpg|width=100%]]}}} || ||<|2> '''출생''' ||[[1892년]] [[2월 4일]] ||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남지리[* [[http://w3devlabs.net/korea/archives/19024|#]]][br](現 [[황해남도]] [[재령군]] 남지리) || ||<|2> '''사망''' ||[[1926년]] [[12월 28일]] (향년 34세) ||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 '''묘소''' ||[[황해남도]] [[재령군]]||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제국)]^^(1892~1910)^^[br][[파일:일본 제국 국기.svg|width=25]] [[일제강점기 조선]]^^(1910~1926)^^ || || '''본관''' ||[[나(성씨)|나주 나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1382|#]]] || || '''부모''' ||[[아버지]] 나병헌|| || '''학력''' ||[[신흥무관학교]] {{{-2 (졸업)}}}[br]한단학원 {{{-2 (졸업)}}} || || '''의거'''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폭탄 투척|| ||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RnXS7nNvc-o)]}}}||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 > 나석주 의사의 유언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 1926년 [[일본]]의 [[경제]] 착취 기업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사옥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경찰에게 10발 가량의 총상을 입자 가슴에 총을 쏴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체포되어 [[미와 와사부로|미와]]의 심문을 받다가 [[조선총독부]] 병원 수술대에서 치료를 거부하고 [[순국]]했다. == 생애 ==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남지리에서 나병헌(羅秉憲)[* 1909년 서북학회(西北學會) 재령군지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http://db.history.go.kr/id/ma_004_0170_0390|#]]]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125년간 나석주의 [[가문]]이 소유한 [[토지]]였는데 기름진 땅이라 농작물이 무럭무럭 자랐으며 나석주 역시 어릴 적부터 집안의 [[농사]]를 돕고 살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세워지면서 나석주의 집안은 땅을 일제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일제의 지독한 수탈에 한 가족이 1년을 먹기도 힘들 정도로 사정이 나빠지자 격분한 나석주는 재령군사무소로 따지러 갔지만 일제는 콧방귀를 끼며 땅을 강제로 빼앗아 [[일본인]]에게 양도했다. 이 사건으로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농부를 때려 치운 뒤 명신학교를 수학하고 북[[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에서 항일 공작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때 군자금을 마련하여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황해도 [[평산군]]에서 주재소 일본 경찰과 면장을 사살하고 북쪽 지방 일대를 돌아다니며 요인 [[암살]]과 군자금을 모으고 다녀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에 일제는 나석주를 잡기 위해 [[군대]] 병력을 증강시켰는데 이런 움직임을 감지한 나석주는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비 담당으로 일하였다. 이후 국내에 돌아와 의거할 기회만 노리던 나석주는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창숙]]의 요청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임무를 부여받고 [[중국인]] '리중거'로 위장하여 입국하게 된다.[* 연이은 [[의열단]]의 의거로 항구에 경비가 삼엄하여 6개월간 입국 타이밍을 보았다고 한다.] [[파일:1927.1.13 동아 號外 (1).jpg|width=500]] 한동안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중국인 거주지에서 중국인 행세를 하며[* 6년 이상 중국에 체류하게 되면서 제대로 된 임무를 못 해보고 [[중국어]]만 늘었다고 자조 섞인 한탄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했다.] 기회를 엿보던 나석주는 거사일인 1926년 12월 28일 [[권총]]을 신문지로 감싼채 겨드랑이에 끼고 폭탄을 지닌 채로 [[명동]]으로 향했고 [[을지로]] 일대를 휘저은 거사를 일으켰다. 먼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 현재 [[하나은행]] 을지로2가 본점 자리.] 로비에 들려 중국인 행세를 하며 경비 태세를 탐문했다. 이후 맞은편에 있는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이전 이름은 농공은행(農工銀行)으로 1918년 농공은행 지점이 통합하여 식산은행이 되었다. 주요 업무는 일본인들의 사업자금, 일본인들의 식민지 정착을 위한 농토 구입자금공급 등이였으며 특히 20년대 [[산미증식계획]]에서 각종 수리자금이나 총독부대행 수탈책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에 들러 연말이라 사람이 바글바글[* 1926년 12월 25일 [[다이쇼 덴노]]가 [[사망]]하여 임시 [[공휴일]]이 지정되었던 것도 한몫했다.]한 틈을 타 정신없이 은행 업무를 보던 [[은행원]]들 뒤로 폭탄을 투척했다. 하지만 폭탄은 불발되었고[* [[합법]]적으로 [[무기]]를 소지할 수 없는 [[신분]]상 폭탄 반입은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는데, 당연히 폭탄들이 제대로 관리가 될 리 만무했고 때문에 폭탄이 습기를 먹는 등 고장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놀란 직원들과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키자 거리의 사람들이 조선식산은행 앞으로 몰렸다. 하지만 나석주는 태연하게 "아. 쓰미마셍."하고 조선식산은행 밖으로 자리를 떴고 후에 은행 직원이 폭탄임을 깨닫고 [[종로]] [[경찰서]]에 신고했다. 거리의 사람들이 조선식산은행으로 몰리자 상대적으로 경비가 한산해진 건너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가서 신문지로 숨겼던 권총으로 1층 수위실의 일본 [[기자]]부터 사살했다. 직후 2층 사무실을 돌아다니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들을 권총으로 사살했는데 먼저 총소리를 듣고 계단을 올라오는 직원 1명을 사살했고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로 가서 오모리 차장과 아야다 과장을 사살했으며 옆 기술과로 들어가 권총을 마구 [[난사]]하고 폭탄 1개를 던진 다음 아래층 현관에 있던 일본인 2명에게 권총을 쐈다. 살육전을 벌이다보니 시간이 생각보다 지체되었고 [[탈출]]할 때가 됐다고 느낀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나와 거리를 내달렸지만 출동한 일본 경찰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석주는 먼저 만난 [[경기도]] 경찰 경부 [[다하타 유이지]]를 사살하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인들을 사살하며 도주했다.[* 당시 총을 3발을 발사했다.] 그러다 체력이 다했다고 느꼈는지 [[전봇대]]에 기대어 가슴에 총을 쏴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당시 22발이 남았었다고 한다.] 고등계 형사로 악명이 높았던 미와의 심문을 받던 중 자신이 나석주임을 밝히고 순국했다. 사망 후 나석주의 유해는 가족들이 [[서울]]로 와서 인수해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의 묘지에 매장했다. == 기타 == * 진남포(현재 [[남포시]])에서 살고 있던 나석주의 아들 나응섭이 [[만주]]로 망명을 시도했지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진남포로 끌려갔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으나 [[북한]]에서 나응섭에 대해 언급이 없던 것으로 보면 [[광복]] 이전에 사망한 듯하다. *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 건물이 있었던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을지로]] [[하나금융지주]] 본사 사옥(옛 [[외환은행]] 본점) 앞에 나 의사의 동상이 있는데 '의사'가 아니라 '열사'로 되어 있다. 열사는 비무장,[* 3.1 운동의 [[유관순]]이 대표적.] 의사는 무력으로 항거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석주는 '의사'라고 하여야 맞다. 향후 시정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 대중매체에서 == * 1969년 개봉한 [[영화]]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배우 [[이대엽]]이 연기했다. * 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드라마)|김구]]>에서는 배우 [[임호]]가 연기했다. [youtube(lEMMuUcfs_M)] * 2002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손종범]][* 손종범은 나석주와 [[외모]]로도 닮은 [[싱크로율]]을 보여주었다. 2006년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박창주의 6촌 동생 역으로 박창주와 더불어 악질 [[친일파]] 연기를 했다.]이 연기했다. 제3화에서는 유태권과 함께 등장해 [[경찰]]들에게 쫓기던 어린 [[김두한(야인시대)|김두한]]을 구해주고 인연을 맺는다. 이후 [[역사]]대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폭탄]]과 [[권총]]으로 [[일본인]]들을 처단하고 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치명상을 입어[* 몇 발을 맞았는데도 초인적인 맷집으로 총격전을 벌인다.] 신원 확인을 위해 [[임동호(야인시대)|임동호]]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총상이 심각해 신원 확인이 되기 전에 [[서거]]하는 모습이 나온다.[* [[미와 경부]]가 나석주를 몇번이고 닥달하며 불라고 했지만, 나석주는 끝까지 말하지 않고 사망한다. 이에 미와는 크게 분노한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으로 [[작가]]인 [[이환경]]이 김두한에게 항일 포장을 씌우기 위함과 동시에 시대적인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아무 관련없는 두 사람을 엮은 것이며 유태권도 가상의 인물이다. 극 중에서 보여주는 [[사격]]술은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볼 수 있는데 [[상하이 조(야인시대)|상하이 조]]와 대등할 정도이다.[* 아마 실제 역사에서 같은 [[의열단]] 소속이었던 [[김상옥]] 의사의 사격술 및 실제 거사를 부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상옥 의사는 나석주의 의거 3년 전인 1923년 종로파출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의거를 일으켰고, 심지어 폭탄이 제대로 터지면서 아수라장으로 만든 후 놀라운 사격술과 은신으로 10일을 버티다가 최후의 항거에서는 일본 경찰들에게 총 10발의 총알을 맞고도 초인적인 힘으로 3시간 반을 더 버텼다고 전해진다.] 1 : 다수의 총격전에서 엄폐물의 뒤에서 잠깐 고개를 든 경찰을 여러 명 쏴 죽여버리는 초인급 사격 실력을 발휘하는데 몇 발 피격이 되고도 계속해서 총격전을 이어 나간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재령군 출신 인물]][[분류:1892년 출생]][[분류:신흥무관학교 출신]][[분류:1926년 사망]][[분류:나주 나씨]][[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분류:의열단/단원]][[분류:대한민국의 자살한 인물]][[분류:총기에 죽은 인물]][[분류:야인시대/등장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