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파키스탄 총리]] [[분류:라호르 출신 인물]][[분류:1949년 출생]] [include(틀:역대 파키스탄 총리)] ||<-2> '''{{{#fff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제12대, 14대, 20 총리}}}[br]{{{#fff {{{+1 미안 무함마드 나와즈 샤리프}}}[br]میاں محمد شہباز شریف | Mian Muhammad Nawaz Sharif}}}'''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549133d52fcf2.jpg|width=100%]]}}} || ||<|2> '''출생''' ||[[1949년]] [[12월 25일]] ([age(1949-12-25)]세) || ||[[파키스탄 자치령]] [[라호르]][br](現 [[파키스탄]] [[펀자브(파키스탄)|펀자브주]] [[라호르]])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파키스탄)] || ||<|2> '''재임기간''' ||제12대, 14대, 20 총리|| ||[[1990년]] [[11월 6일]] ~ [[1993년]] [[7월 18일]][br][[1997년]] [[2월 17일]] ~ [[1999년]] [[10월 12일]][br][[2013년]] [[6월 5일]] ~ [[2017년]] [[7월 28일]] || || '''링크''' ||[include(틀:트위터 로고, 링크=nawazsharifmns, 크기=22)]|[[https://www.instagram.com/mian_nawazsharif/?hl=en/|[[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width=22]]]]||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배우자''' ||쿨숨 나와즈 (1971년 결혼~2018년 사별) || || '''자녀''' ||4명 || ##|| '''친인척''' || || || '''학력''' ||펀자브 대학교 || || '''종교''' ||[[이슬람교]] || || '''신체''' ||173cm || || '''소속 정당''' ||[[파키스탄 무슬림 동맹]] ||}}}}}}}}}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키스탄]]의 정치인, 기업가. 12대, 14대, 20대 총리를 맡았다. 파키스탄 역사상 최장기 재임 총리이며, [[셰바즈 샤리프]] 전 총리의 형이다. == 생애 및 정치활동 == [[1949년]] [[12월 25일]]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3형제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무함마드 샤리프[* 1919년 11월 18일 ~ 2004년 10월 19일]가 성공한 철강 사업가라 부유하게 자랐으며[* 실제로 샤리프 가문은 성공한 사업가 가문으로 매우 유명하다] [[라호르]]에 있는 펀자브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70년대 파키스탄 총리였던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 [[이슬람 사회주의]]자였다. 이 사람 딸인 [[베나지르 부토]] 역시 훗날 파키스탄 총리를 지냈는데 [[2007년]]에 암살당했다.]의 국유화 정책으로 인해 가족들이 가지고 있던 철강 사업체를 정부에 뺏기면서 큰 손실을 봤다고 한다. 샤리프는 26살이던 [[1976년]] 처음 정계에 입문했는데 처음에는 빼앗긴 가족들의 사업체를 되찾는 것이 목표였다고 한다. 같은 해 [[파키스탄 무슬림 동맹]] 정당에 가입했으며, 이 후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펀자브(파키스탄)|펀자브 주]] 재무장관, 국방장관 등을 역임했다. 또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군인 출신으로 1977년 쿠데타를 일으켜 부토 총리를 쫓아내고 총리가 아닌 대통령으로서 권력을 휘둘렀다. 부토 전 총리는 [[1979년]]에 사형시켜버렸다. [[1988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를 설득해 사업채를 되찾는 것도 성공한다. 주 재무장관 시절 펀자브 주를 파키스탄에서 가장 부유한 주로 만들었으나 그와 동시에 빈부격차도 심해졌다. [[1985년]] 펀자브 주 총리로 임명되었으며, 군부와 계속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인기에 힘입어 '펀자브의 사자'라는 별명도 생겼다. [[1988년]] 8월 지아울하크 대통령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샤리프는 국회의원 대신 펀자브 주 총리에 다시 도전했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 후 [[1990년]] 10월 총선에서는 [[베나지르 부토]] 총리를 꺾고 40살의 나이에 파키스탄 총리가 된다. 총리가 된 그는 각종 민영화와 함께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쳤지만 사회는 보수화하고 이슬람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샤리프는 군부, 보수파의 지지를 통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그 외에도 외교적으로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비난하고 걸프전 당시 다국적군에 [[파키스탄군]]을 파병하기도 하였으며, [[사우디]]에 군을 파견해 사우디 주요 인사들을 경호하기도 했다.[* [[사담 후세인]]은 친미성향이었던 사우디를 매우 싫어해 걸프전 당시에도 사우디에 [[스커드 미사일]]을 날리기도 했다. 이라크와 파키스탄 관계는 [[2003년]]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전쟁]]으로 몰락하면서 개선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민영화와 자유화를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는데 [[1993년]]까지 [[파키스탄 국제항공]]을 포함해 115개 회사가 민영화되었으며 수력발전소 건설 프로젝트, 택시 6000대 도입 등 각종 대규모 사업을 밀어붙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핵무기 개발 프로그램]]도 계속 진행했고 그 때문에 [[1990년]] 12월 [[미국]]은 파키스탄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더욱 강화했다. 이 조치로 인해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던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중국]]의 도움을 받아 원전 건설을 완료했다. 하지만 [[1993년]] 샤리프가 지아울하크 대통령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굴람 이샤크 칸(Ghulam Ishaq Khan)대통령과 사이가 나빠지자 칸 대통령은 58-2b라 불리는 권한을 이용하여 의회를 해산하고 샤리프를 총리에서 끌어내렸다. 샤리프는 즉시 대법원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샤리프의 편을 들어줬지만 군부가 샤리프에게 사임을 압박했고 결국 샤리프는 [[1993년]] [[7월 18일]] 총리에서 물러나며 자신의 첫 번째 임기를 마감한다. 이 후 총선에서 야당인 [[파키스탄 인민당|인민당]]이 승리하며 [[베나지르 부토]]가 다시 총리가 된다. 작성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