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북방유목민족 == [include(틀:몽골의 역사/중세)] "나이만" 또는 "내망"(Найман, Naiman)은 중세 시대 몽골 서부에 살던 [[튀르크]]계 유목민족이었다. [[카마그 몽골]]의 테무진 칸에게 패배하고 흡수되었다. 일부는 [[타양 칸]]의 아들 [[쿠츨루크]]를 따라 [[서요]]로 도망가기도 했다. 타양 칸(Таян хан, 太陽汗, 1134년 ~ 1204년)은 나이만족의 마지막 칸이었는데 12세기 후반, 아버지인 이난차 빌게 칸이 세상을 뜨자 그 뒤를 이어 제4대 칸으로 즉위했다. 형을 죽였기 때문에, 이에 분노한 이복동생 부이룩이 [[알타이 산맥]]을 거점으로 서쪽에서 스스로 칸을 칭했으므로 나이만은 동•서로 나뉘어졌다. [[1203년]] [[케레이트]]의 [[토그릴 칸|토오릴 칸]](옹 칸)과 [[카마그 몽골]]의 테무진 칸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토오릴 칸과 힘을 합쳐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에게 대항하자는 방침을 세웠지만, 토오릴 칸이 '''제지르 운두르산 전투'''에서 테무진에게 참패하면서 몽골 고원의 유일무이한 패권을 놓고 테무진과 맞서게 되었다. [[1204년]] 타양 칸은 [[메르키트]]부와 [[오이라트]]부, 그리고 망명자인 자다란부의 [[자무카]] 등과 연합을 맺고 테무진과 싸웠으나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동나이만부는 괴멸당했다. 타양 칸은 마침 상처가 도져 병사하게 되었고, 그의 아내는 테무진의 아내가 되었다. 하지만 아들인 [[쿠츨루크]]가 도망치는데 성공해서 서나이만의 칸인 숙부 부이룩 칸에게 의탁했으나 다시 몽골에게 패배했다. 이에 [[서요]](카라 키타이)로 또 다시 도망쳐 나이만의 잔당을 결집하려고 시도했다. 쿠츨루크는 서요의 황제였던 [[야율직로고]]의 부마가 될 정도로 크게 환영받았고, 쿠츨루크 본인도 나이만의 종교인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할 만큼 복종하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을 배신하고 그를 폐위시킨 뒤 스스로 서요의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1218년]] 그의 폭정에 시달리던 거란족과 탄압받던 이슬람교도들에다가[* 쿠츨루크는 이슬람교를 싫어했다.] 쿠츨루크의 개종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기독교도 나이만인들이 그를 배신하면서 몽골은 거의 싸우지 않고 서요를 손에 넣음과 동시에 쿠츨루크의 세력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서요의 멸망 이후 모든 세력을 잃은 쿠츨루크는 곧장 남부의 파미르 고원 쪽으로 도망갔으나 [[바다흐샨]] 주에서 몽골의 원정군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오늘날 [[내몽골 자치구]] [[퉁랴오시]]에 나이만기가 행정구역으로 남아있다. == [[한백무림서]] 중 [[천잠비룡포]]의 등장인물 == 북몽골에서 [[타가]]군에 파견된 젊은 장수로 뛰어난 창술을 자랑하며 삼흉에 맞먹는 능력을 가진 기병장수. [[마건위]]와 타가의 거래에 의해 버려진 [[소마군]]을 짐승사냥하듯이 잔인하게 전멸시켰으며 [[단운룡]]을 압도하고 [[대산]]의 팔까지 잘라버렸다. 단운룡은 그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효마]]를 끌어들이는데... 단독부대로 정찰활동을 하다가 단운룡 일당에게 걸려 독과 함정에 의해 부대가 전멸하고 대산의 목숨건 도전 등에 걸려 결국 그도 살해당하고 만다. 소마군을 전멸시킨 일 때문에 단운룡에게 여러가지를 남긴 인물. 이때문에 단운룡은 마건위, [[마사충]], [[허유(한백무림서)|허유]] 등에게 위험인물로 찍히게 되고, 암살위협까지 받게 된다. 결국 [[오기륭(한백무림서)|오기륭]] 덕택에 중원으로 납치당하지만... 겉으로는 양민학살 수준의 모습만 보여주다가 단운룡 알행에게 레이드당했기 때문에 무시하기 쉬운데, 작가답변으로는 무당마검 중반부에 나오는 나라카라보다 더 무위가 높았다고 ~한다. 다만 이시르에게는 영......[* 창대를 분질러 단창으로 쓰는 장면에서 "단창은 이시르놈이 잘썼지"라고 언급한다. 어투로 보아 이시르보다 후배는 아니다.] [[분류:몽골의 역사]][[분류:튀르크]][[분류:동음이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