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일본의 야구 선수]] ||<-2>
{{{#!wiki style="margin: -5px -10px" [[|width=100%]]}}} || ||<-2> '''{{{+2 나카자토 아쓰시}}}[br]中里 篤史''' || ||<|2> '''출생''' ||[[1982년]] [[9월 12일]] ([age(1982-09-12)]세) || ||[[파일:일본 국기.svg|width=25]] [[일본]] [[사이타마 현]] [[아사카]] 시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 || '''학력''' ||카스가베 쿄에이 중고등학원 || || '''신체''' ||185cm / 85kg || || '''포지션''' ||[[투수]] || || '''투타''' ||[[우투좌타]] || || '''프로입단''' ||2000년 드래프트 1위 ([[주니치 드래곤즈]]) || || '''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즈]] (2001~2009) [br]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0~2011)||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 국적의 전직 프로[[야구]]선수. 주니치 드래곤즈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었다. == 선수 경력 == 초등학교 2학년 때 야구를 시작, 중학교 때부터 투수로 전향했다. 중학교 때부터 130㎞대의 강속구를 던졌고, 고등학교때는 140km을 던지는 유망주로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다. 3학년때 [[고시엔]] 지역예선에서 5이닝 15k로 모든 아웃을 삼진으로 잡아내며 콜드게임으로 비공식 [[퍼펙트]]를 기록, 엄청난 주목을 받게 된다. 해당 대회에서 탈[[삼진]]을 30개를 넘게 잡아내며 고교 수준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고, 결승에서 져서 정작 고시엔은 나가지 못했지만 당해 드래프트 최대어 중 하나로 평가받아 [[주니치 드래곤즈]]에 1라운드 지명, 계약금 840만엔에 연봉 3천만엔, 옵션 1억엔이라는 특급 대우로 입단하게 되었다. 입단 첫해, [[2군]] 올스타전에 등판했고 최고구속 150km의 직구로 올스타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고, 2군에서 7승을 거두며 1군에 콜업되었다. 1군에서는 2경기 2선발 9이닝밖에 던지지 못했지만 고졸 선수가 데뷔 첫 해에 1군 물맛을 본 것만으로도 상당하다는 평가를 들었고, 이 때 데뷔 첫 안타도 쳐냈다. 그러나 다음 해 불행이 시작되는데, [[스프링캠프]]에서 숙소 계단에서 넘어져 버렸는데, 넘어지면서 난간을 잡다가 어깨가 탈구되어 버리는 부상을 입고 만다. 이후로 부상 재활 도중 또 다시 부상을 당하며 4년간을 사이버 투수로 지내게 된다. 2005년 4년만에 1군으로 돌아와 10월 1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6회초에 복귀 등판을 가졌는데, 이 경기에서는 최고 148km/h를 기록, 1이닝 2k 무실점으로 무사히 막아냈고 타선이 터지며 데뷔 5년만에 눈물의 첫 승을 거두게 된다. 이후로는 중간계투로 던졌는데 2006년 13경기 3.60으로 나름 계투진에 힘을 보태며 활약했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일본시리즈]]에서 [[신죠 츠요시]]의 마지막 타석에서 울먹이며 타석에 들어선 신죠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것이 바로 나카자토였다. 그러나 2007년, 훈련 중 [[밸런스볼]]에서 떨어지며 왼팔꿈치 골절을 당했고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2008년은 다시 부상을 딛고 시범경기에서 7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데뷔 첫 개막 로스터에 진입했으나 막상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며 패전처리로만 13이닝 던지고, 09년도 거의 2군에서 보낸 후 전력외 통고를 받고 방출되었다.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웨이버 클레임을 걸어 교진으로 이적했으나, 교진에서도 1군 2이닝 던지고 다시 방출되었다. 이후로는 현역을 은퇴, 교진 구단의 스코어러로 취직했다. == 플레이 스타일 == 직구 원툴이었던 선수. 프로 입단 후 최속 152km의 직구를 던졌는데, 속도 자체는 적당히 빠른 정도였지만 그 구위가 엄청난 수준이었다. 데뷔 첫 경기 때 [[마쓰이 히데키]]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싶다고 소감을 말했는데, 미국 가기 직전의 전성기 한창인 괴물 마쓰이 히데키를 진짜 삼진으로 잡아냈다. 마쓰이 역시 이게 신인의 공이 맞냐며 극찬을 했고, [[다카하시 요시노부]] 역시 자기가 상대한 직구 중 뛰어난 직구는 2위가 [[구로다 히로키]], 1위는 바로 나카자토의 직구였다고 그의 직구를 칭찬했다. 그 외에도 야구계 관계자들의 칭찬이 끊이지 않았으며, 구단 코칭스탭들과 선수들 모두 입을 모아서 미래의 에이스감이라고 칭찬을 했을 정도로 그의 직구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부상과 재활로 성장해야 할 시기에 다른 변화구를 제대로 익히지 못했고, 직구는 강력하지만 그 직구 하나뿐인 상태로 성장이 멈추게 되었고 끊임없는 부상 때문에 결국 선수생활 자체를 접어야 했다. 그러나 1군에서 고작 34경기 뛴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야마모토 마사]], [[마쓰이 히데키]], [[다카하시 요시노부]], [[호시노 센이치]]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선수, 명감독들이 입을 모아 칭찬을 할 정도로 그의 직구는 뛰어났고, 후대의 선수들인 [[이시카와 아유무]], 모리 히로토 등도 나카자토의 직구를 본받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기에 지금도 일본야구 선수와 팬들 사이에서는 아까운 재능, 비극의 천재로서 종종 언급되고 있다. 부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반면교사 같은 선수. 이 선수의 부상은 많이 던져서도 아니고 그냥 자기가 부주의한 탓에 계단 내려가다, 스트레칭 하다가 넘어져서 다친 부상이 거의 대부분이다. == 여담 == 복귀전에서 첫 승을 따낼 때, '팬 여러분, 4년간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인터뷰가 감동적인 인터뷰로 회자되고 있다. 또한 은퇴 후 인터뷰에서는 요즘은 [[젓가락]]으로 [[라멘]]을 먹을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고 인터뷰를 할 정도였으니 그의 어깨 부상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