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고려의 공주, rd1=낙랑공주(고려))] [목차] == 개요 ==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유력 가문이다. == 역사 == 왕씨 성을 가진 낙랑군 인물 또는 유민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들 모두가 일가 출신인지는 알 수 없다. 가계가 분명히 확인되는 계통으로는 [[전한]]~[[후한]] 시기의 염한현(䛁余縣) 출신 왕씨들과 [[낙랑군 교치]]로 교군(僑郡)이 된 이후 [[오호십육국시대]]~[[남북조시대]] 북조의 귀족 가문인 수성현(遂城縣) 출신 왕씨가 있다. === 시조 === 남북조시대 수성현 출신 왕씨들의 묘지명에 따르면 낙랑의 왕씨는 [[상나라|은]](殷)에서 비롯됐으며 [[조선후]]에 봉해진 [[기자(중국)|기자]]의 후손이라고 한다. >殷有三人, 周訪九疇, 只族王家 藉冑鮮侯. >은에 세 사람[* 세 현인이라고 불리는 기자와 [[미자계|미자]], [[비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이 있어 [[주나라|주]]에서는 구주(九疇)를 물었는데, 이 씨족이 왕가로 조선후에 올랐다. (〈[[왕정(북위)|왕정]]묘지명〉) >其先出自有殷, 周武王剋商, 封箕子於朝鮮, 子孫因而氏焉. >선조는 은에서 나왔는데, [[주무왕]]이 [[상나라|상]]을 바로잡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자손은 이에 따라 성씨로 하게 됐다. (〈왕기묘지명〉) 한편 염한현 출신 왕씨의 시조는 기원전 2세기 중국 출신이다. 《[[후한서]]》 〈왕경 열전〉에 따르면 왕씨는 본래 낭야군 불기현[* 현 중국 [[산둥성]] [[칭다오시]]에 위치해 있었다.] 출신인 왕중(王仲)에서 비롯됐다. 왕중은 제북왕이 반란을 일으키자 화를 피해 해동의 낙랑산으로 달아났고, 비로소 낙랑(염한현)에 왕씨들이 가문을 이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북왕의 반란이란 제북왕 유흥거가 [[한문제]] 시기인 기원전 177년 일으킨 반란을 가리키는 것일테니 시기적으로 [[위만조선]]이 건국된 뒤에 이주해온 셈이다. === 1~3세기 === 왕중의 8대손 [[왕굉(낙랑군)|왕굉]](王閎)은 군삼로를 지냈는데, [[경시제]]가 몰락한 뒤 태수를 살해하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한 토인(土人) [[왕조(낙랑군)|왕조]](王調)를 배신하는 공을 세운다. 왕조를 가리키는 토인이라는 용어는 수성현 왕씨와 같은 [[고조선]]계 낙랑군 현지인을 뜻할 수도 있고, 염한현 왕씨같이 낙랑군에 정착해 토착화된 [[한족]]을 뜻할 수도 있다. 왕굉의 아들 왕경은 [[광무제]], [[명제(후한)|명제]]를 섬기며 수리 시설을 손봤으며, 그 뒤 1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도 왕씨와 관련된 매장문화재가 한반도 북부에서 다수 발견된다. === 4~6세기 === 313년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낙랑군이 정복되었다. 낙랑 사람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해 모용선비족의 [[모용외]]에게 귀부하고, 낙랑군은 요서로 옮겨졌다. 낙랑군의 왕씨들도 이 때 유민이 돼 요서로 이주했다. 6세기 [[북위]]에서 활동한 낙랑군 수성현 출신 왕씨들은 대부분이 이 시기 [[전연]] 사람인 의동삼사 무읍공(武邑公) 왕파(王波)의 후손이었다. 왕파의 손자는 산기상시 평서장군 급사황문시랑 진양후 왕예반(王禮班)이었고, 그 아들 고부급사중 하내태수/병주자사 박평남(慱平男) 왕정국(王定國)부터 [[북위]]에서 벼슬을 지냈다. 왕정국의 증손자 환주치중 왕정과 그 동생 처사 왕기는 북위 말 사람이었다. [[왕도민]](王道岷)의 3녀로 원원평(元元平)에게 시집간 왕씨부인과 그 동생 한씨[* 왕도민은 창려군 극성현 사람 [[한기린]]의 딸 한씨와 결혼했으니 어머니 성을 따른 것이다.] 역시 왕정, 왕기 형제와 마찬가지로 왕파의 6세손이었다. 왕씨부인이 결혼한 원원평은 경목제 [[탁발황]]의 손자였고, 그 동생 한씨는 [[문성제]]의 증손자 원빈지(元斌之)와 결혼했으니 북위의 원씨(탁발씨) 황족과 깊은 관계를 맺은 귀족 가문임을 알 수 있다. 왕정 등과의 관계는 알 수 없지만 역시 낙랑군 수성현 출신으로 북위 말의 인물인 왕서(王舒)는 연나라 황족 출신으로 보이는 모용씨 부인과 결혼했다. 문성제의 황후 문명태후 풍씨는 그 출신을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낙랑 왕씨 어머니를 두고 있었다. 낙랑 왕씨는 [[서위]]를 세우는 우문씨와도 연을 맺었다. 우문굉의 처이자 서위의 추존 황제 [[우문태]]의 모친으로 명덕황후에 추존된 낙랑 왕씨 역시 왕파의 6세손이었다. 《[[주서]]》 〈왕맹 열전〉[* 《[[주서]]》 권20, 열전 제12.]에 따르면 왕씨의 조부는 북위의 황문시랑으로 병주자사 낙랑공에 추증된 왕진(王珍)이었고, 부친 왕비(王羆)[* 비슷한 시기에 한대 하남윤을 지낸 왕준의 후손으로 경조군 출신인 [[왕비(북위)|동명이인]]이 있다.]는 복파장군을 역임했다. 왕씨의 오빠 [[왕맹(북위)|왕맹]](王盟)은 538년 조청작(趙青雀)의 반란 때 공을 세워 낙랑공에 진봉되고 사성받는데, 척/탁(拓, 《주서》)·척왕/탁왕(拓王, 《원화성찬》[* [[당나라|당]] 원화 7년(812년)의 저서로 임보가 저술했다.], 《해동역사》[* [[조선]] 말의 저서로 실학자 한치윤과 한진서가 저술했다.])·발(拔, 《북사》) 등 기록마다 다르다. ||0||<-7>파 || ||1|| ||2||<-2>예반(반) || ||3||<-2>정국 || ||4||<-2>당성 ||<-3>진 || ||5||<-2>광조 ||<-3>비 ||<-2>[[왕도민|도민]] || ||6||[[왕정(북위)|정]] ||기 ||男[*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왕맹 열전〉에 왕맹의 조카 왕현(王顯)을 소개할 때 '형의 아들'이라고만 했다.] ||[[왕맹(북위)|맹]] ||女 ||女 ||女(한씨) || [[분류:낙랑 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