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남조역사책))] [include(틀:남사)] [목차] == 개요 == 駱牙 (527년 ~ 583년) 자는 기문(旗門). 오흥군(吳興郡) 임안현(臨安縣) 출신. [[남사]]에서는 낙문아(駱文牙)로 나온다. == 생애 == 낙아의 조부 낙비도(駱秘道)는 [[양(남조)|양나라]]에서 안성왕(安成王)의 전조참군(田曹參軍)을 지냈고, 부친인 낙유(駱裕)는 파양사왕(鄱陽嗣王)의 중병참군사(中兵參軍事)를 지냈다. 낙아의 집안 사람 중에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 12살의 나이였던 낙아의 관상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아이는 용모가 비상하니 틀림없이 장차 먼 곳에서 부름을 받을 것이다. 549년, [[후경]]의 반란으로 양나라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진천이 임안으로 피난했는데, 이때 낙아의 어머니 능씨(陵氏)가 진천의 풍채를 보고는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손님의 예로 매우 두텁게 대하였다. 진천이 오흥태수(吳興太守)로 부임할 때 낙아는 진천의 장수가 되었으며, 두감(杜龕), 장표(張彪) 등을 토벌할 때 종군하고 매양 선봉이 되어 적진을 함락했고 전공을 세워서 직합장군(直閤將軍)이 되었다. 557년, 모친상으로 인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진천이 회계(會稽)에 진수하자, 낙아는 산음현령(山陰縣令)으로 기용되었다. 559년, 안동부(安東府) 중병참군에 제수되고 야성(冶城)에 진수했다가 뒤에 진천을 따라 남환(南皖)에서 왕림의 침공을 방어했다. 같은 해, 무제 진패선이 붕어하고 진천이 즉위하니 이가 제2대 황제인 [[문제(남진)|세조 문황제]]였다. 문제가 즉위한 뒤 낙아는 가절(假節), 위로장군(威虜將軍),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常侍)로 제수되고 상안현후(常安縣侯)에 봉해져서 식읍 500호를 받았다. 이윽고 낙아는 임안현령이 되었고 월주자사(越州刺史)로 옮겼으며, 나머지 관직은 예전과 같이 받았다. 낙아는 557년 어머니가 죽은 뒤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장례를 지내지 못했다가 559년에 와서야 장례를 다시 지냈다. 문제는 낙아의 어머니를 상안국태부인(常安國太夫人)으로 추증하고 공(恭)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낙아를 정위장군(貞威將軍), 진릉태수(晉陵太守)로 전임시켰다. 562년, 주적의 반란을 평정한 공적에 따라 관군장군(冠軍將軍), 임천내사(臨川內史)로 전임되었다. 571년, 안원장군(安遠將軍), 형양내사(衡陽內史)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계양태수(桂陽太守)로 전출되었다. 576년, 조정으로 돌아와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되고 궁궐의 당직을 맡았다. 578년, 풍주자사(豐州刺史)로 제수되고 다른 벼슬은 종전과 같이 받았다. 낙아는 584년에 죽어서 안원장군(安遠將軍), 광주자사(廣州刺史)로 추증되었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527년 출생]][[분류:584년 사망]][[분류:항저우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