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오서)] 駱統 (193년 ~ 228년)[* 나중에 [[능통]]의 생몰년도 오류를 짐작할 때 사용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중요하다.] [목차] == 개요 ==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오나라의 문관으로 자는 공서(公緒). 삼국지 오서에 자신의 열전이 따로 있는 인물이다. 양주 회계군 오상현 사람. == [[삼국지(정사)|정사 삼국지]] == === [[손권]]에게 임관 전 === 부친 [[낙준]]은 진국의 상까지 승진하지만 197년, [[원술]]에게 [[유총(진민왕)|유총]]과 함께 암살당하게 된다. 낙통의 나이 4살 때 일이었다. [[200년]] 어머니는 개가해 [[화흠]]의 첩이 되었다. 낙통은 재가하게 된 어머니를 떠나 부친의 식객과 함께 회계로 가게 되었는데,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수레에 탔을 때 수레를 모는 자가 어머니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고 하니[* 뒤돌아보고 한 번 더 인사하라는 것이다.] 낙통은,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더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돌아보지 않을 뿐이오. 라며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적모를 매우 극진히 섬겼다고 하는데, 적모(嫡母/適母)라는 표현을 통해 낙통의 어머니는 낙준의 첩으로 낙통은 아버지의 식객, 적모와 함께 회계로 왔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기황이 들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자 낙통은 자신이 먹는 음식을 줄였고 그때 사랑스러우면서 성품이 인자하지만 과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있던 그의 누이가 어째서 슬퍼하냐고 묻자, >사대부들은 지게미조차 먹을 수 없는데, 나는 어찌하여 혼자만 배부르려고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라고 하자 누이는 어째서 자신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느냐면서 자신의 식량을 낙통에게 준 뒤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어머니 또한 자신의 것을 주위에 나눠주었으며, 이 일로 낙통은 명성을 얻게 된다. === [[손권]]에게 임관 후 === 212년에 낙통은 손권이 시범적으로 오정의 상으로 임명했는데, 이때 1만 호가 넘는 백성들이 모두 그의 통치에 찬탄하자 손권은 그를 공조, 기도위로 임명하면서 [[손보#s-1]](孫輔)의 딸을 시집보냈다. 어떤 것을 보고 들으면 한밤 중이라도 아침까지 기다리지 않았으며, 손권에게 그 시대 정치의 이로움을 살피도록하며 언제나 인재를 중요시할 것을 권했다. 특히 그는 구제척인 방법까지 언급하는데 연회를 열 때 상을 내릴 때는 한 사람 한 사람 구별해서 의견을 진언하도록 하고 추운지 따뜻한지 같은 사소한 것까지 질문하며 친밀감을 얻으라고 하니 손권은 그의 말을 받아들인다. 지방으로 나가 건충중랑장으로 임명되어 무리 3천 명을 통솔했는데, 217년에 [[능통]]이 죽자 그의 병사까지 거느렸다.[* 능통이 237년에 죽었다는 말이 있는데, 237년 이면 낙통은 이미 죽어 있다.] 당시 역병이 돌아 민호가 감소하는데도 노역이 빈번하자 낙통이 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이 일에 폐단에 대해 말하자 손권이 감동해 그의 의견을 특히 중요시했다. 222년에 [[이릉대전]]에서는 [[육손]]을 따라 촉나라 군대를 격파해 편장군으로 승진했으며, 모든 사람들이 [[유비]]의 추격을 주장할 때 육손, [[주연(삼국지)|주연]]과 함께 조비의 남하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그의 말대로 조비가 남하해서]] 벌어진 삼로 전투에서는 유수에서 [[조인]]이 중주를 습격하기 위해 보낸 [[상조(조위)|상조]](常雕), [[왕쌍]], 제갈건을 엄규와 함께 물리치면서 상조를 죽이고 왕쌍을 사로잡아 신양정후 유수독으로 임명된다. 그는 정치에 이로운 의견을 많이 제출했는데,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너무 많아서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기록을 했을 정도였다. 낙통은 특히 소집하는 행위가 사악함을 조장하고 습속을 파괴시켜 반역할 마음을 낳게 했으므로 시급히 이런 사람에 대한 안배를 멈춰야 한다고 해 손권과 반복해서 논쟁해 결국에는 그의 방법을 시행했다. 224년에 [[장온(손오)|장온]]이 [[글염]]의 사건으로 갇히자 평소 사이가 험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변호하지만 손권은 끝내 낙통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228년에 [[오나라의 요절징크스|36세의 나이로 요절하니]] [[촉한|동맹국]]에서도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 [[삼국지연의]] == 엑스트라로 딱 1회 등장한다.[* 단, 인문본 기준 이름으로나마 2개 회에 등장한다.] [[적벽대전]]에 앞서 [[제갈량]]이 [[패드립]]을 주무기로 오나라 문관들을 바르고 있을 때 한 번 발렸다가 다시 기운을 찾은 [[장소(삼국지)|장소]]와 함께 제갈량에게 공격을 가하려고 하나 [[황개#s-1]]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등장 끝. == 평가 == 낙통에 대한 평가로는 '대의가 분명하고 언사가 간절하며 이치는 지극했지만 손권이 듣는 것을 닫아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고 전했다. == 미디어 믹스 ==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833.jpg|width=400]] || || 삼국지 12, 13, 14 ||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의 설전 장면에 등장하기 때문인지 [[삼국지 시리즈]]에 등장한다. 전형적인 문관적 능력치였으나, 정사도 조금 반영하기 시작한 삼국지 9부터는 통솔력도 어느 정도 높게 나온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6/무력 64/지력 72/정치력 77. 제사, 투함, 정란, 조영, 파괴, 덫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5/무력 57/지력 70/정치력 75/매력 68에 특기는 농업, 기술, 유인, 항변, 반박 5개. 통솔 75면 후기장수치곤 괜찮지만, 무력이고 지력이고 어중간하며 오나라 소속인지라 전투에서 굴리기엔 조금 미묘한 측면이 있다. 농업, 기술 특기가 있어서 내정으론 무난하게 부릴 수 있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6/무력 58/지력 75/정치력 77/매력 77. 특기는 없는 거나 진배없는 전법인 강습이 특기이긴 하지만 능력치가 전체적으로 균형잡혀 있고 병종 적성도 A가 꽤 있는 편이라 나쁘지 않다. 초기 시나리오나 영웅집결에서는 회계에서 재야로 나오게 되는데 하제 등과 같이 왕랑의 희망이 된다. [[삼국지 12]]의 일러스트는 두 손을 맞댄 상태에서 제갈량과 설전을 하려 하고 있다. 전법은 화계. 하필 오나라에 주유, 육손이 있는지라 묻힌다. 지력도 화계를 지닌 장수치고는 좀 미묘한 편이라 정 쓰겠다면 백성들의 진정으로 80 정도는 찍어 주는 게 좋다. 기본 통솔력은 70대 후반으로 괜찮은 편이라 지력만 좀 높여 주면 그냥저냥 쓸 수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6/무력 58/지력 75/정치력 77. 전법은 뜬금없이 공격강화인데, 12처럼 화계였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울 따름. 특기는 농업 2, 수영 1을 가지고 있고 전수특기는 농업이며 병종 적성은 창병 B/기병 C/궁병 A다. 왕랑군이나 엄백호군이라면 전장에서 굴려야 한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6, 무력 57, 지력 73, 정치 76, 매력 74로 전작에 비해 무력과 정치력이 각각 1, 지력이 2 하락했다. 개성은 수전, 진흥, 개수, 주의는 예교, 정책은 성벽확장 Lv 3, 진형은 안행, 정란, 전법은 제사, 고무, 정란, 강습, 친애무장은 [[장온(손오)|장온]], 혐오무장은 [[원술]]이다. [[분류:손오의 인물]][[분류:193년 출생]][[분류:228년 사망]][[분류:진화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