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남병구}}}'''[br]'''南柄九'''}}}}}} || || '''이명''' ||남일동(南一東), 남훈(南薰) || || '''자''' ||기옥(奇玉) || || '''본관''' ||[[영양 남씨]][* 송정공파(松亭公派)-영덕 칠성(七星) 문중 16대손 병(柄) 항렬. 영양 남씨 24세.] || ||<|2> '''출생''' ||[[1888년]] [[3월 4일]] || ||[[경상도]] 영해도호부 묘곡면 칠성동[br](현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영양 남씨]] 집성촌이다.] || ||<|2> '''사망''' ||[[1933년]] [[7월]] || ||[[만주국]] [[펑톈성]]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남병구는 1888년 3월 4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묘곡면 칠성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에서 이매당(二梅堂) 남신명(南愼明)의 6대손인 아버지 남조혁(南朝赫)과 어머니 [[안동 권씨]] 권석진(權錫進)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이주했고, 1924년 중국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新賓)만주족자치현 왕칭먼(旺淸門)조선족진.]에서 [[대한통의부]] 군사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26년에는 반석현(盤石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吉林)시 판스(盤石)시.]에 근거를 둔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에서 김응섭(金應燮), [[이광민]], 김원식(金元植), 박동초(朴東初), 김상덕(金相德)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봉천성]] 해룡현(海龍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메이허커우(梅河口)시.]에 거주하며 활동하다가, 1927년 5월 14일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철령(鐵嶺)[*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톄링(鐵嶺)시.]영사관으로 압송되었으며, 같은 해 8월 2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808&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7586&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1993년 간행된 《남씨대동보(南氏大同譜)》 2권 825쪽에 의하면, 1933년 7월에 별세했으며, 남병구와 그의 부인 [[정(성씨)|야성 정씨]](野城鄭氏) 정종한(鄭宗漢)의 딸은 [[간도|서간도]]에 함께 매장되어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남병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영덕군 출신 인물]][[분류:영양 남씨]][[분류:1888년 출생]][[분류:193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