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남상도}}}'''[br]'''南相道'''}}}}}}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남상도.jpg|width=100%]]}}} || || '''창씨명''' ||기모토 아이미치(宜本相道)[br]기모토 타이지(宜本泰治) || || '''본관''' ||[[의령 남씨]] || ||<|2> '''출생''' ||[[1918년]] [[6월 17일]] || ||[[충청남도]] [[아산시|아산군]] [[탕정면]] 권곡리[br](現 [[충청남도]] [[아산시]] [[권곡동]])[* [[http://db.history.go.kr/id/ia_1766_1385|1941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충청남도 아산군 탕정면 권곡리가 출생지 및 주소지로 기재되어 있다.] || || '''사망''' ||[[1950년]] [[7월]][*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62년 7월 10일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500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18년 6월 17일 충청남도 아산군 탕정면 권곡리(현 아산시 권곡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상남도]] [[창녕군]] 남곡면 남지리(現 [[창녕군]] [[남지읍]] 남지리) 901번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1931년 [[진주고등학교|진주고등보통학교]]와 [[대구사범학교]]를 다닐 때부터 조국 독립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1939년 잠시 동안 창녕군 [[성산면(창녕)|성산면]]에 있던 성산심상소학교에서 [[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1&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5%8D%97%E7%9B%B8%E9%81%93&brokerPagingInfo=SnUpYrZZuHIxMzHLMdPQRSi0k0mUUpCDsHuCGHyKLMNd0f0h&selectedTypes=&selectedSu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5%8D%97%E7%9B%B8%E9%81%93&searchKeywordConjunction=AND|훈도로 근무했다]]. 그 뒤 1940년 초 [[이관술]]의 권유로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독립운동자금 10원을 현금으로 제공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주오대학]] [[법학부]]에 다니던 중 1940년 4월 [[도쿄]]에서 재일 유학생을 상대로 사회주의 사상과 민족독립운동 정신을 교육한 것이 발각되어 그 해 10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후 국내에 이송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1년 11월 5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공소가 기각되었고, 이어 상고까지 했지만 1942년 1월 26일 고등법원에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84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7710&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상고가 기각되면서]]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여 1년간 옥고를 치렀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남상도.png|width=100%]]}}} || || 1941년 11월 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1943년 1월 26일 출옥한 후에는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수감 중에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며 사상 전환을 하여 출옥할 수 있었다. 1949년 12월 18일 당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결성된 창녕군 [[국민보도연맹]]에 가입,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6.25 전쟁]] 발발 직후 실종되었다가 1950년 7월경 별세했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21년 4월 2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의령 남씨]][[분류:아산시 출신 인물]][[분류:1918년 출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실종된 인물]][[분류:몰년 미상]][[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진주고등학교 출신]][[분류:경북대학교 출신/전신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