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노국환}}}'''[br]'''盧國煥'''}}}}}} || || '''자''' ||근우(槿宇) || || '''본관''' ||[[노(성씨)|풍천 노씨]](豊川 盧氏)[* 문효공파(文孝公派) 26세 환(煥) 항렬.] || ||<|2> '''출생''' ||[[1923년]] [[10월 28일]]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운암리[* [[노(성씨)|풍천 노씨]] 집성촌이다.] || || '''사망''' ||[[1987년]] [[5월 14일]] || || '''학력''' ||[[중앙고등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 {{{-2 (졸업 / 33회)}}}[br][[보성전문학교]] {{{-2 (졸업)}}}[br][[고려대학교]] {{{-2 ([[경제학]] / [[학사]])}}} || || '''상훈''' ||대통령표창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노일환]]의 둘째 남동생이다. [[노형욱(1962)|노형욱]] [[국토교통부장관]]은 그의 5촌 조카이다. == 생애 == 1923년 10월 28일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운암리에서 아버지 노병권(盧秉權, 1897. 5. 12 ~ 1961. 8. 18)과 어머니 [[여산 송씨]] 송구의(宋九儀, 1895. 5. 17 ~ 1963. 10. 1)[* 송재기(宋在夔)의 딸이다.] 사이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1937년 3월 [[중앙고등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 입학 시험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7032600239202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7-03-26&officeId=00023&pageNo=2&printNo=5696&publishType=00020|합격했다]]. 그는 [[중앙고등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39년, 평소 친했던 [[이기을]]·황종갑(黃鍾甲)·유영하(柳永夏)·조성훈(趙誠勳) 등과 시험기간을 제외하고는 매주 한두 번 만나면서 [[자연과학]] 및 [[한국사]] 관련 서적을 읽고 토론을 벌였다. 그 뒤 4학년 진급 후 1940년 10월 이들은 [[북한산]] 자락 [[우이동]] 계곡으로 소풍을 갔다가 고담준론만 일삼을 게 아니라, 내일을 위해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이들은 역사와 정치, 민족의 진로, 민족정기 고취, 독립 쟁취를 위한 민중의 조직화, 일제의 정치 형세 등을 주제로 개인적으로 한 문제씩 연구해서 매주 일요일 모여 토론하는 '5인 독서회'를 조직하고 모임의 지도교사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806|최복현]](崔福鉉) 선생을 위촉했다. 이들은 매주 일요일 모여 각자 정한 주제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했으며, 종종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장 자크 루소]]의 『[[에밀]]』, 『[[사회계약론]]』 등 당시의 금서를 읽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1941년 7월 초, 5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방학 중에 일반사회와 연락 관계를 맺기로 결의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고향이 [[함경남도]] [[북청군]]인 이기을은 황종갑과 함께 고향에서 항일 유격대와 연락하기로 하고, 유영하와 조성훈은 일본 유학 중인 중앙고등보통학교 선배들과 연락하고, 노국환 본인은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하던 맏형 [[노일환]]과 아버지 노병권을 통해 [[김성수(1891)|김성수]]·[[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백관수]]·[[정인보]] 등 인맥을 동원해 국제 정세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식 등을 들어 오기로 했다. 그리고 방학 중에 각자 임무를 마치고 2학기 개학 3, 4일 전에 [[경기도]] [[경성부]]에서 만나 그동안의 연락 상황을 설명하고 토의하자는 편지를 교환했는데, 얼마 후 황종갑이 방학 동안의 활동을 적어 노국환에게 발송한 연락 편지가 함흥경찰서 소속 일본 경찰의 사전검열에 발각되고 말았다.[[https://m.blog.naver.com/donghlee1001/221949673312|#]] 그 뒤 8월 14일 이기을은 [[함경남도]] [[함흥시|함흥부]]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황종갑과 함께 함흥경찰서에 연행되었고, 이어 8월 22일에는 노국환을 비롯해 지도교사 최복현과 독서회 회원 유영하·조성훈도 같이 검거되어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된 뒤 얼마 후 함흥경찰서에 송치되었다. 이때 최복현 선생은 '내 강의를 듣고 학생들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나는 어떠한 처형도 감수하겠으니 학생들만은 석방해 주기 바란다'고 요청했는데, 이 요청이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 받아들여져 노국환은 이기을·황종갑·유영하·조성훈 등 다른 4명의 학생과 함께 검거된지 100일 만인 1940년 12월 5일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http://db.history.go.kr/id/hdsr_008_0020_0060_0030|#]] 석방 이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는 [[현상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에게 노국환을 비롯한 독서회 관련 학생 5명을 퇴학시키라고 지시했지만, 현상윤 교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퇴학을 면했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한편, 1942년 12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는 노국환의 친가가 항일 가정이라며 전라북도경찰국에 노국환의 아버지 노병권을 비롯한 전 가족을 검거해 노병권과 관계가 돈독한 김성수·송진우·백관수 등을 구속할 확고한 단서를 포착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다. 이때 지시를 받은 전라북도경찰국 고등과 이진하(李鎭河) 경부(警部)는 노국환의 고향 본가를 수색하고 가족들의 동태를 조사한 뒤 노병권에게 집안의 불온서적을 모두 없애고 집안에 쓰인 [[단군기원]] 연호를 지우라고 하는 등 오히려 도움을 주었고, 조선총독부 경무국에는 노병권 집안을 조사했으나 달리 의심할만한 정황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이 때문에 [[8.15 광북]] 후 이진하가 1949년 3월 [[전라북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자수한 뒤 형을 감면받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는 전라북도경찰국이 도리어 노병권에게 매수되었다고 판단하고, 노병권 집안과 연고가 없는 청주경찰서에 노병권 일가를 구속 수사하라는 특별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노국환은 1943년 5월 12일 [[경기도]] [[경성부]] [[교북동|교북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교북동]]) [[외숙모]]의 집에서 체포, 구속되었다. 청주경찰서 형사들은 노국환에게 김성수·송진우·백관수 등 국내 [[우익]] 독립운동가들의 지령 여부에 초점을 두어 취조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그해 8월 석방되었다. 다만 당시 청주경찰서장[* [[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13&totalCount=13&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7%9F%B3%E5%B7%9D%E5%85%89%E6%96%87&brokerPagingInfo=SnUpYrZZuHIxMzHLMdPQRSi0k0mUUpCDsHuCGHyKLMNd0f0h&selectedTypes=&selectedSu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7%9F%B3%E5%B7%9D%E5%85%89%E6%96%87&searchKeywordConjunction=AND|청주역장도 겸임했다]].] [[시라카와]] 코분(石川光文) 도경시(道警視)와 청주경찰서 고등계 주임에 의해 노국환의 거주지를 본적지로 제한하는 처분이 내려져 다니고 있던 [[보성전문학교]]를 휴학할 수 밖에 없었고, 타 지방에 출타하려면 순창경찰서 고등계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제약도 받았다. 그럼에도 노국환은 힘 닿는대로 [[학병]]·[[징병]]·[[징용]] 반대 투쟁을 전개했고, 학병은 우선적으로 거부해야 하고 부득이 징병되어 출정하게 된다면 현지에서 도피해 [[한국광복군]]에 합류하도록 독려했다.[[http://www.opench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4445|#]] [[8.15 광복]] 후 그는 1946년 [[보성전문학교]]에 항일운동 특전으로 3학년에 복학할 수 있었고, 그해 6월 졸업했다. 그리고 1949년에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5월 14일 별세했다. 202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사실 같은 독서회 회원이었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616|황종갑]](黃鍾甲)이 [[육군사관학교]] [[https://www.joongang.co.kr/article/1677712|5기 출신]]의 [[포병]] 장교로 [[박정희 정권]]이던 1968년 이미 [[제2작전사령부]] [[참모장]](육군 [[소장(계급)|소장]])으로 [[https://www.joongang.co.kr/article/1157458|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다면 충분히 포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국환은 당시에 [[일본제국 육군]] [[장교]] 출신과 친일 인사들이 득세하던 정권 아래에서 굳이 독립유공자에 대한 포상을 받고 싶지 않아 [[http://www.opench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4445|스스로 신청을 단념했다고 한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순창군 출신 인물]][[분류:풍천 노씨]][[분류:1923년 출생]][[분류:1987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중앙고등학교 출신]][[분류:고려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고려대학교 출신]][[분류:납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