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Deemo의 수록곡, rd1=Noblesse Oblige)] [목차] == 개요 == >Noblesse oblige[* 오블리제가 아니다. 그러나 편의상 오블리제로 많이 불린다.] "[[귀족]]은 의무를 진다"는 뜻의 [[프랑스어]] 표현이다. 이 표현은 [[프랑스]]의 작가 겸 정치가인, 레비 공작 피에르 가스통 마르크(Pierre Marc Gaston de Lévis. 1764-1830)가 <격률과 교훈>(Maximes et réflexions sur différents sujets)(1808)이라는 책에서 처음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부와 권력은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수반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주로 사회 지도층 혹은 상류층이 사회적 위치에 걸맞는 모범을 보이는 행위를 표현할 때, 혹은 그것에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표현이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단어는 사실상 [[사어]](死語)가 된 지 오래라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 아니다. 사실상 뒤늦게 한국에서만 유명해지고 널리 쓰이게 된 특이한 경우이다. 심지어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여러 대륙의 동서양 외국인들도 프랑스인을 포함해서 그 말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사자성어로는 '심계천하(心系天下)'[* 높으신 분들이 세상을 걱정한다는 뜻. 중국 한정 초고가 브랜드인 [[삼성 심계천하 시리즈]]의 유래도 이 사자성어이다.] 등이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종묘사직이라는 단어에 대응시켰다. [[도전 골든벨]] 서울 [[대원외국어고등학교]] 편에서 골든벨 문제로 출제되었다. == 비판 == === [[포퓰리즘]] 관점에서 ===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인 느낌이 강하다는 이유로 이 단어의 사용이나 그에 입각한 일체의 개념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인]], [[기업가]]의 아들이나 서민 김모씨의 아들이나 똑같이 병역법 앞에 동등하게 국가에 대한 의무를 지는 대상인데 왜 전자의 것을 더 가치를 부여해주냐는 식. [[선민사상]]적인 느낌도 있고, 부자가 되어야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는 식의 성공지향적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다. [[백인의 의무]] 또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악용된 사례다. 또한 위에 언급한 실용적인 이유에서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비판도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 자체가 기득권 계급과 그렇지 않은 위치의 계급 격차를 인정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시민 사회에서 의무와 권리는 항상 똑같이 다니게 되므로, 기득권층의 이런 의무는 결국 그들이 기득권을 가지는 것을 합리화시키고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 그래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흔한 좋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진보[[좌파]]들이 본질적으로 싫어하는 개념이다. 다른 면에서 [[자유지상주의]]나 [[자본가]], [[신자유주의]]를 대변하는 우파들도 극히 싫어하는 개념이다. 전통적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 계급을 대변하는 보수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개념이며[* 영국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귀족이 없(던)는 국가에서는 '사회 지도층'들의 의무로서 강조된다.[* 중도보수나 [[기독교 보수]] 세력의 구호로서 흔히 쓰인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상류층의 부담을 늘리는 정책에 상류층이 기꺼이 동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일부 유명 부자들의 기부 행위로서 실천되는 정도이다. 거기다 [[포퓰리즘]] 관점에서 보자면 같은 거지 생활에서 출발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다른 한 사람은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 그런데 열심히 일한 사람은 자수성가해서 대기업의 사장이 되고, 열심히 일하지 않은 사람은 그대로 계속 거지로 남았는데,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상으로 그 열심히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선행을 베풀라고 하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 사유 재산의 중요성 === 아무리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받은 혜택이 있다고 쳐도, 그 집안에 태어난 순간 그 재산은 그 사람의 것인 것이다. 만약 운이 좋았기 때문에 사유재산의 일부를 포기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 [[재산권]]은 애초에 왜 존재하는가? 사회에 불공평함이 존재하는 것과 재분배의 의무를 부자들이 지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단적인 예로 정부는 국민에게 돈이 많다고 해서 [[유니세프]]에 100만원을 당장 기부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권한으로, 사회적 계약조차도 맺지 않은 제 3자가 단순히 돈이 많다는 이유로 더 많은 공헌을 강요하는 것인가? 개인의 재산을 생판 모르는 남에게 쓰도록 강탈해 가는 것만큼 큰 죄악도 없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개념은 재분배와 평등이라는 허울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재산권의 침범이라고 할 수 있다. 단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이글에서 말하는 재산권은 합법적이고 정당성있는 재산권을 말한다. 서류위조, 뇌물수수, [[탈세]], [[횡령]], 투기, 착취 등 불법적인 재산증식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필요하나 자신의 능력으로 정당하게 벌어들이는 재산은 보호받아야한다. === 사회적 의무가 애초에 존재하는가? === 사회적 의무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는 이렇다. 기본적으로 사회가 제공해 준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아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돌려줄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적 의무'를 자세히 보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일을 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물건을 판매하거나, 혹은 일자리를 창출해 줌으로써 이미 사회와의 기브앤테이크 관계가 충족되었다. 만약 어떤 대기업 사장이 일자리를 100개 더 만들어 주었다면 중산층 100명이 더 노동을 해 주는 대가로 사장은 충분한 월급을 제공해 주었다. 그렇다면 둘은 이 이상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주고 받는 계약이 끝났는데, 왜 사회가 무언가를 더 요구하냐는 말이다. 보편적 질서에 기인해 생겨난 관계에 플러스 알파가 더 붙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완전하지 않다. 보편적 질서와 '이미 정산된' 사회와의 관계 외에, 추가로 사회가 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비유를 들어보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정상급 축구선수, 예를 들어 [[박지성]]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 태어났더라도 공을 발로 매우 뛰어나게 다루는 재능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회에서는 그 재능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매일이 전쟁인 과거 남아메리카의 어느 부족에서의 박지성은 아무런 부각도 받지 못하고, 명성도 부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가 사회에서 받은 환경 덕분에 그는 부와 명예를 얻었고, 그는 이것에 대해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기에 의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국가가 복지를 비롯한 정책에 쓰는 재원들의 대부분은 고소득층과 대기업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이는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득 상위 5% 남짓이 부담하는 소득세의 비율이 전체 중 7할이 넘는다.] 흔한 인식과는 차이가 있는 셈. 만약 편법없이 세금을 냈다면 그곳에서 사회적 의무는 끝난 것이지, 과연 법전에도 없는 도덕적 의무를 강요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이는 국가가 막대한 세금을.들여 기업을 돕는 관계라면 사회적 의무가 적용된다. 단순히 돈이 많으니 내라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필요한 자금을 융통해 준다는 식이다. 물론 이를 악용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 애초에 외국 상류층도 부패한 건 다름이 없다 === 물론 한국 사회의 현실을 외면한채 [[양비론|그 나라가 그 나라라는]] 비아냥은 잘못 됐지만 많은 한국인들의 생각과 달리 선진국들도 조금만 들여다 보면 엄청나게 더러운 이야기들이 많다. 예를 들자면 영국만 해도 여러 추문에 휩싸이는 게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경우는 철면피스럽게 빈민기금에다 궁전 난방할 비용을 달라고 징징댄 사실이 폭로되었고, [[윌리엄 왕세자]]는 집 수리에 450만 파운드(한화로 '''78억''' 원)를 써서 비난을 받고 구설수에 올랐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6271550361|#]] [[후안 카를로스 1세]]는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view.html?cateid=1046&newsid=20120416102412568&p=ned|국민들을 등쳐먹고 애인이랑 코끼리 사냥이나 하다가 엉덩이뼈가 부러졌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국민들의 비난을 받고 결국 퇴위해야 했다. 후임으로 즉위한 현 국왕 [[펠리페 6세]]의 매형은 수뢰와 횡령 혐의로 구속되었다.[[http://www.gukj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43884|#]] [[스웨덴]]의 [[칼 16세 구스타프]]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5&aid=0002330475|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곤욕을 치루었다.]] 이 문제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0&aid=0000066849|후계자인 왕자들도 마찬가지라 크나큰 스캔들거리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전 여왕 [[베아트릭스(네덜란드)|베아트릭스]]는 [[히틀러 유겐트]] 단원이었던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와 결혼해서 네덜란드인들의 엄청난 분노를 샀다가 [[빌럼 알렉산더르]]를 낳고 나서야 여론이 해소되었다. 1980년에는 율리아나 여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대관식 준비 겸 초호화로 궁전을 개축하려 했다가 집 없는 암스테르담 시민들의 분노와 폭동을 유발하기도 했다.[[https://en.wikipedia.org/wiki/Amsterdam_coronation_riots|#]] 현 국왕의 왕비인 [[막시마 소레기에타]]도 [[아르헨티나]]에서 독재자에게 아부했던 호르헤 소레기에타가 아버지라서 하마터면 네덜란드-아르헨티나 간 관계가 험악해질 뻔했고, 네덜란드 내에서조차 비판하는 여론이 있다. 위 사례들을 보면 이들이 결코 순수한 애국자이자 착한 상류층인 것만은 아니고 비도덕적인 행태도 자주 보이는 걸 알 수 있다. 유럽 왕실이 정말 모범적인 엘리트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역시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걸 보여준 좋은 예시. 사실 자세히 보면 혼란기에 사고 친 왕족들도 많다. 국왕 경력이 있던 영국의 [[에드워드 8세]]는 '''친[[나치]]적인''' 성향이 있어 2차 대전 기간 동안 [[바하마]] 총독으로 쫓겨났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왕족들은 전쟁을 일으키는데 동조했고, 전쟁이 패전으로 끝나자 다시는 왕좌에 복귀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유럽]]의 왕족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잘 실천한 게 아니라 비교적 잘 실천한 왕족만이 살아남은 것이며, 아무리 이전까지 잘했다고 해도 국민 사정도 나쁜데 깽판을 쳤다가 왕실의 위상과 존재가 위기에 처하는 것은 [[스페인]]의 예로만 봐도 분명하다. 영국의 예를 봐도 분명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고위층이 가진 도덕적 의식이 선행된 게 아니라 고위층들이 시대의 변화에 맞춰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고, 그것이 의무화되어 도덕적 의식으로 정착한 사례에 더 가깝다. 한 마디로 적당히 "우리가 잘해주면 쟤네들이 우리를 위협하진 않겠지"가 기본 사상이다. 그리고 애초에 왕족은 '''병역 의무'''가 주어진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닌 각종 의전에 대한 급부다. == 국내에서 == 국내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않는 상류층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제강점기]], [[6.25 전쟁]]과 [[5.16 군사정변]] 후 군사 독재를 겪는 등 혼란스러운 근현대사를 거친 한국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대부분 [[흙수저]]에서 시작한 [[계급|특권층]]과 부와 권력을 합법적으로 세습한 [[금수저]]들의 사회적 위치에 걸맞는 책임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이 그 원인으로 꼽힌다. 이러한 의견이 나쁜 것을 모두 일제의 탓으로 돌려 면피하는 것이고, 애초에 조선시대 [[유교]] 이념 자체부터 문제라고 보는 시선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유학의 이념은 오히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중국과 조선 등 유교 사회에서 상위 계층을 [[사대부]], 군주의 지향점을 [[군자]]라고 부르는 까닭은 적어도 원론적으로 이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들과 온전한 의미의 양반 사대부들은 [[경연]]과 죽을 때까지 하는 공부 및 수양을 통해 자신들이 먼저 유교의 [[사서오경]]을 깨우치고 [[성리학]]적으로 심성을 맑게 닦아서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 그에 따라 백성들을 교화할 자격을 얻는 것으로 생각했다.[* 중인과 상민 및 천인들을 대할 때는 지배층으로서 떵떵거리면서 사대부 자신들이 유교 덕목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유교(특히 성리학) 위주 국가 체제를 유지할 생각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향약만 봐도 조선의 지배계층이 얼마나 피지배계층을 의식했는지 알 수 있다. 조선 사회를 [[양천제]] 위주로 보는 학자들은 양반 역시 양인이므로 적어도 15세기에서 16세기 초반까지는 양반들이 양인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고 보고 있다. 병역비리나 면제악용 등 기피현상을 보여 비판받는 대한민국의 상류층과는 대조적이게도 당시 조선 고급 관료들의 자제들 중 일부는 특수군의 일반병[* 고위 관료들의 자제들로 편성한 충순위, 충의위 등 부대가 [[오위]] 내에 편성되어 있었다.]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또한 역사적으로 봤을 때 국란기에 전 재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하거나 환란기 정세에 뛰어드는 이들은 대부분 지역 유지나 양반층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그러하였으며[* 오늘날까지 구국의 성웅으로 칭송받는 [[이순신]]도 지체 높은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구한말의 [[최익현]] 등 의병장들 또한 대부분이 이름난 양반 실력가들이었다. [[이시영(정치인)|이시영]], [[이회영]] 가문은 당시 조선의 손 꼽히는 역대급 부잣집이자 [[경주 이씨|명문]]이었으면서도 전재산을 쏟아부어 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지었으며, 독립운동을 하다 6형제 중 다섯이 고문사, 객사, 아사했다. 꼭 [[프랑스 대혁명]] 직전의 프랑스 귀족들 같은 막장 사례와 비교하지 않아도, 조선의 지배층은 동시기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사회적인 책임의식을 가진 편이었다는걸 알 수 있다. 그러한 의식의 기반이 바로 [[유학(학문)|유학]]에서 지향하는 엘리트주의적 모범이기에 "유교적 전통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500년간 조선사회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항상 잘지켰느냐는 전혀 별개의 얘기지만 표면적인 이념의 성격은 그러했다. 영국 귀족의 전쟁 수행과 같은 상무정신을 기반으로 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한국사에서도 동일하게 있었다. [[신라]]가 바로 그것으로, [[삼국사기]] 열전들을 보면 삼국시대 신라 귀족층은 대대적으로 전투에 참여해 수많은 희생을 낳았으며, [[화랑도]]의 임전무퇴에서 알 수 있듯이 전장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 권장되는 일이었고, 실제로 수많은 신라 귀족층이 전투에 투신해 죽었다. [[김유신]] 본인 역시도 젊은 시절 [[고구려]]와의 낭비성 전투에서 자살 돌격에 가까운 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었고, 나이가 70에 달한 시기에도 젊은 장수들 대신 고구려 수도 앞까지 접근하는 위험한 작전을 자원해 나서기도 했다. 신라 문화에서 귀족층은 모범을 보여야 했기에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이 당군과의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자[* 이마저도 마지막에 적진에 뛰어들어 죽으려 하였으나 부하 장수들이 말고삐를 빼앗아 쥐며 말린 탓이었다.]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아들을 참할 것을 청했고 의절했으며, 문무왕이 죄를 면하게 하였으나 끝끝내 용서하지 않아 김유신 사후 매소성 전투에서 김원술이 치욕을 되갚았음에도 김유신의 부인이자 김원술의 어머니 또한 끝내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기에 김원술은 관직을 버리고 세상을 비관하며 살았을 정도였다. 이렇게 귀족층이 병사보다 먼저 나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신라의 특기할 만한 사회 분위기는 역사학자들의 신라의 삼국통일의 원동력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바람직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신라 장군 아들이 황산벌에서 사기를 올리기 위해 죽은 사례들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할 만 하다. 그리고 [[이순신|어느 성웅]]께서도 [[명량 해전|모두가 질 것이라고 생각한 바다에서 대장선에 타서 직접 전투하며 적들을 격퇴한 바 있다.]] 사회 상류층이 국란이나 전란이었을 때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은 아니었다. [[http://m.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37|유명한 경주 최 부자집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평시에도 고귀한 의무와 덕행을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먼저 스스로 실천한 가문은 적지 않았다. [[임술농민봉기]]와 [[동학 농민 운동]] 등 사회가 혼란한 시기에도 이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양반들의 저택들은 농민군이나 심지어 초적들까지도 그들의 덕행을 알았기에 보호했고[* 대표적으로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이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던 젊은 시절의 [[김구]]를 보호한 사례가 있다. 더군다나 당시 안태훈은 아들 안중근과 더불어 민병대를 이끌고 동학 농민군과 맞서던 중이었다.] 오늘날까지 몇몇 유서 깊은 [[종갓집]]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근현대에도 기득권층 중에서도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유일한]]''' 박사, [[김용환(1887)|김용환]], 언급한 [[이회영]], [[전형필]] 처럼 훌륭한 인물도 있고, 최근에야 선행들이 알려진 [[함태호]] 명예회장도 있다. 백범 [[김구]]의 자손들 역시 대대로 [[대한민국 공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다. 언급한 [[경주 최씨|최부자집]] 가문의 최준 선생도 가문의 거대한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었으며, 광복 후에도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 현재의 [[대구대학교]]와 다르다.]을 세워 민족의 교육에 기여하였다. 따라서 서양 중심 또는 현대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상과 세세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한국 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하므로 성급한 일반화는 삼가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대중 매체가 [[민중사관]]의 영향으로 기득권을 무조건 악으로 상정한 후 역사를 통해 정당화하려했기에 이러한 일반화를 가중 시킨 면이 있다. 물론 과거와 달리 [[헬조선|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일반대중을 말 잘듣는 가축 취급하는 금수저가 숱하게 존재하는 게 현실인데, 가장 심각했던 사례라면 역시 [[IMF]] 사태 당시 [[금 모으기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 기부된 금붙이들을 처리하겠다고 나섰던 대기업 및 재벌들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형편이 어려웠던 이들조차 결혼반지나 돌반지 등 그야말로 평생 가져가야 할 보물이나 가보들마저 앞장서서 기부했는데, 정작 이 보물들을 처리하겠다고 나선 대기업 및 재벌들은 이 기부 물품들을 해외에 저렴하게 팔아버리고 바로 비싸게 구매하는 방식으로 부가세 포탈에 이용했다. 당연하지만 안 그래도 외화가 부족해서 파산이나 다름없었던 당시 상황을 더 악화시키면서까지 자기 배를 불리는 행위였으며, 까놓고 말해 [[매국노|나라 팔아먹는 짓]]이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라 그냥 당연히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선인 법적 의무도 대놓고 어기는 것이니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안 지킨 게 아니라 그냥 '''범죄다.''' === 해외 사례의 선택적 보도와 현실의 괴리 === 사실 위의 2.5번 문단에서도 이미 나온 사실이나, 실제적인 상황과 체감하는 상황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들로 인해 일단 논란이 생기면 충분한 사실 확인 없이 기사가 쓰여지고 점점 부풀려지고 확산되지만, 정정 보도는 잘 하지 않고 대중의 뇌리에 남지도 않는 반면 선행에 관한 기사는 별로 쓰이지 않고 이슈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해외의 사례와 비교하는 경우 더욱 그러하다. 국내에 들어오는 상당수의 해외 기사는 독자 취재보다는 그 국가의 기사에서도 특히 화제가 되는 기사를 ~~그대로 베껴서 번역하거나~~ 바탕으로 쓰여지는데 국내에까지 전달될 정도로 이슈가 된 선행 관련 기사는 '''그 나라에서도 드물기 때문에''' 화제가 된 것이고, 국내에도 조회수가 높게 나오니 기사로 쓰여진 것이다. 반면 논란이 되는 해외 기사는 국내에 기사를 써도 비교적 화제가 되지 않으니 실제로 일어난 사건 대비 국내까지 알려지는 비율이 선행 관련 기사보다 낮다. 실제로 한국발의 그런 선행류 기사들, 예를 들면 최근 입법된 [[김영란법]] 같은 소식이 중국에 들어가자 중국 네티즌들은 한국을 본받자는 둥 우리와 똑같은 반응을 이어갔다.[[http://news.kbs.co.kr/news/view.do?ncd=3353739|#]] 100번의 성공보다는 1번의 실패가, 100번의 실패보다는 1번의 성공이 기억에 남고 회자되는 것과 같은 선택적 의식이다. 또한 해외 역시 선행과 악행의 상대치가 국내와 비슷하다 해도 나라도 많고 사람도 많으니 선행이 일어난 절대치는 국내보다 많을 수밖에 없는데, 어느 특정 국가의 선행이 어느 정도라고 인식하고 기억하기보다는 막연히 뭉뚱그려서 해외에는 선행이 많이 일어난다고 여기게 된다. 따라서 해외 뉴스를 보면 실제보다 과장되게 인식해 살기 좋다고 느끼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행의 문제가 아니라 기득권층의 책임의 이행 문제다. 일례로 기업 과세 등의 예를 보면 [[미국]]의 경우 [[워렌 버핏]] 등의 부자들이 부자세를 증세하자고 주장하고, 또 [[도널드 트럼프|트럼프]]가 환경부담금을 부담 않겠다고 했으나 지방 자치단체, 기업들은 그래도 환경부담금을 내겠다고 발표했다. == 예시 == === [[김만덕]] === 조선 후기 [[제주도]]의 유명한 여성 [[거상]]으로, 엄밀히 말하면 천민 출신이었기에 '귀족'은 아니었으나, 상업을 통해 [[자수성가]]하여 번 돈을 사회에 기부한 케이스이다. 김만덕은 1795년 제주도에 태풍이 불어 사람들이 굶어 죽어간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재산을 제주도 관가에 기부했다. 이 소식이 [[정조(조선)|정조]]에게도 전해지자, 정조는 그녀를 일종의 명예관직인 의녀반수에 봉하고 상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사후 유언을 통해 양아들의 기초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제주도 빈민들에게 기부했다. 이 때문에 제주도에서는 만덕할망[* 할망은 할머니라는 뜻 외에도, [[제주어]]에서 여성을 칭하는 존칭으로도 쓰인다.] 등으로 높여 불린다. === [[광해군]] === 오늘날 이미지가 그다지 좋지 않은 광해군이지만, 세자 시절 때 그는 전쟁이 나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 사람이다. 자세한 것은 [[광해군]] 문서 참고. 특히 임진왜란 때 자신의 아버지 [[선조(조선)|선조]]는 무책임하게 권한을 광해군에게 넘기고 요동으로 도망가기 바빴으나 반대로 당시 나이가 18살로 젊은 나이였던 광해군이 책임감을 지고 활약을 하여 이후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모시고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데 큰 원인이 되었다. 이로인해 선조 자신의 이미지가 떨어지고 왕위에서 일찍 물러날 것만 같아지자 광해군을 질투하며 견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 일부 대한제국 황족 === 대부분의 [[대한제국]] 황족들은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며 호기의식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일부는 독립운동에 적극 혹은 소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흔히 이태왕으로서 호기의식했다고 알려진 [[고종 광무제]]는 사실 퇴위 이후부터 망명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대략 4번정도의 망명시도가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두 실패하였지만, 의병활동을 격려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아들이었던 [[의친왕]]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는데, 고종보다 조금 더 적극적이었다. 그는 [[창씨개명]]도 반대, 광복되는 조국에서 평민으로 살겠다고 공언하였으며,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만약 그가 성공했다면, 독립이 더 빨리 이뤄졌을 거라는 견해도 있다. 대한제국 황족들이 대부분 일제에 호의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 둘처럼 독립운동에 자발적으로 도움을 준 이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대한제국의 황족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결론짓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 [[이회영]] 일가 === 조선 10대 부자 가문이었던 이회영 가문은 [[경술국치]] 이후 전재산을 처분하고[* 현 시세로 약 '''600억원''' 정도였다.]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또한 만주 한인촌 건설에도 이바지했으며 [[신흥무관학교]] 설립, 독립군 양성에도 힘썼다. 그러나 10년도 되지 않아 자금이 모두 떨어져 궁핍한 생활을 겪었고, 결국 6형제 중 5명이 광복 이전에 사망한다.[* 유일하게 생존한 이회영의 동생이었던 [[이시영(정치인)|이시영]]은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직]]을 수행했다.] === [[유일한]] === 상인의 아들로서 어렸을 때 미국 유학을 떠났을 정도로 넉넉한 형편으로 태어나기도 했고, 미국에서 자립하면서 고학력을 취득하고 사업가의 길에 들어서는 등 자수성가형 면모도 가진 인물이다. 고국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기 위해 제약업을 선택하여 [[유한양행]]을 세우고, 50세의 나이에 무장독립투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광복 후에도 기업 활동을 계속하면서 세금은 빼먹지 않고 내되 정치자금은 한사코 내지 않으며 자신이 물러나고 난 뒤 자신의 가족이 회사에 남아 있으면 회사에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경영에서 물러나기 전 가족을 전부 해고하고 물러났으며, 물러난 이후에는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사후 전 재산을 사회와 교육에 기증하는 등 사회 공헌에 힘썼다. === [[칼레]]의 [[시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