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국가수반)]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D0000 0%, #D40000 20%, #D40000 80%, #CD0000)" '''[[소련|{{{#ffe400,#ffe300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제10대 장관회의 주석}}}]][br]{{{#ffe400,#ffe300 {{{+1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리시코프}}}[* [[우크라이나어]] 표기는 '미콜라 이바노비치 리주코우(Мико́ла Іва́нович Рижко́в)'.][br]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Рыжко́в[br]Nikolai Ivanovich Ryzhkov}}}'''}}}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6019_original.jpg|width=100%]]}}} || ||<|2> '''출생''' ||[[1929년]] [[9월 28일]] ([age(1929-09-28)]세) || ||[[소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 SSR]] [[도네츠크주]] [[아르툐몹스크]]군 딜리옙카[br](現 [[러시아]]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아르툐몹스크군 딜리옙카) || ||<|2> '''재임기간''' ||제10대 소련 장관회의 주석|| ||[[1990년]] [[9월 27일]] ~ [[1991년]] [[1월 14일]]||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부모''' ||[[아버지]] 이반 표도로비치 리시코프[br][[어머니]]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리시코바 || || '''배우자''' ||류드밀라 새르게예브나 리시코바 || || '''자녀''' ||딸 마리나 니콜라예브나 구티나 || || '''학력''' ||우랄 주립 기술대학 || || '''소속 정당''' ||[include(틀:무소속)] || || '''의원 대수''' ||'''2''', '''3''' (두마) || || '''약력'''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br]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경제 담당 서기[br]제10대 [[소련 장관회의]] [[총리|주석]][br][[국가두마|러시아 국가두마(하원)]] 의원[br][[러시아 연방의회|러시아 연방평의회(상원)]] 의원 ||}}}}}}}}} || [목차] [clearfix] == 개요 == [[소련]]·[[러시아]]의 [[정치인]]이자 [[테크노크라트]]이며, 소련의 마지막 장관회의 주석이다.[* [[1990년]] [[고르바초프]]가 소련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장관회의는 소련 내각으로 변경되었고 장관회의 주석 또한 소련 총리로 변경되었다.] == 생애 == === 초창기 === [[1956년]]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1959년]] 우랄 주립 기술대학을 졸업했으며 [[루간스크주]]의 [[스베르들롭스크]] 시 우랄마시 공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했고, 이 시기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던 [[https://ru.wikipedia.org/wiki/%D0%9A%D0%B8%D1%80%D0%B8%D0%BB%D0%B5%D0%BD%D0%BA%D0%BE,_%D0%90%D0%BD%D0%B4%D1%80%D0%B5%D0%B9_%D0%9F%D0%B0%D0%B2%D0%BB%D0%BE%D0%B2%D0%B8%D1%87|안드레이 키릴렌코]] 장관회의 주석을 만나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 정계활동 === ==== [[소련]] 시절 ==== 당시 친 [[브레즈네프]] 성향의 좌장 키릴렌코가 이끄는 파벌에 있던 [[인물]]이다 보니,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신임을 얻어 [[1975년]] 화물교통부 제1차관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제1부주석에 임명되었고, [[1981년]]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진출했다. 1982년 11월 전원회의에서 서기국 서기로 선출된다. [[1982년]]을 기점으로 키릴렌코가 건강상의 이유로 [[2인자]]로 밀려나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브레즈네프의 뒤를 이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에 임명되자, 브레즈네프와는 노선을 달리한 친 안드로포프 성향의 개혁파가 [[권력]]을 잡았다. 더군다나 브레즈네프가 사망하면서 친 브레즈네프 세력의 중심은 브레즈네프의 심복이었던 [[콘스탄틴 체르넨코]]의 파벌로 변하면서 리시코프의 정치 생명이 끝나는 줄 알았으나, 그가 [[공장장]]으로 일할 때 [[태업]]을 적극적으로 막았던 행적이 '브레즈네프가 산업 현장 지도를 방임한 영향으로 노동자들이 태업하는 것'이라고 우려하던 안드로포프의 눈에 들어오게 되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의 경제 담당 서기에 임명된다. 이때 리시코프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만났고, 경제 담당 서기로서 안드로포프의 정책을 잘 수행하여 소련을 잠시나마 부흥기로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안드로포프가 사망한 후 브레즈네프 파벌의 좌장이자 리시코프의 오랜 라이벌이었던 체르넨코가 서기장에 임명되었다. 때문에 중앙위원회 경제 담당 서기인 리시코프의 의견이 체르넨코의 반대에 부딪혀 대부분 무산되었다.[* 리시코프는 안드로포프가 5년만 더 살아 있었더라면 [[흑묘백묘론|중국의 개방정책]]와 비슷하게 소련이 개방되어 [[소련 해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의 경제 정책을 평가하며 회고했다.] 그러나 체르넨코 사후, 체르넨코 파벌에서 급부상하던 빅토르 그리신 [[모스크바]] 시당(市黨) 제1서기와의 후계경쟁에서 고르바초프가 완승하자[* [[워싱턴포스트]] 모스크바 지국장을 지내기도 했던 [[미국]] 기자 마이클 돕스의 역사서 <1991>에 따르면, 비록 체르넨코 파벌이 당시 소련의 [[기득권]] 세력이긴 했지만, 고르바초프의 대항마로 나온 그리신부터 당시 70세의 고령이었을 만큼 주요 지도자들의 노령화가 심했던 데다, 체르넨코가 오늘내일 하던 시절, 그리신이 공식석상에서 체르넨코를 보란 듯이 부축하며 다음 총서기가 되고 싶다는 듯 아부를 떠는 모양새가, 노령화된 기득권층의 무능 탓에 정체된 소련의 실상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던 정치국 내 개혁파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고르바초프의 승리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리시코프는 오히려 지위가 더 낮아졌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펼친 반([[反]]) 알코올 캠페인 당시 리시코프는 [[암시장]]의 활성화와 주류시장 타격을 예상하여 [[캠페인]]을 적극 반대했고 그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1985년 10월 전원회의에서 서기에서 해임되었다. [[1986년]] 시작된 제12차 5개년 계획에서는 생산품의 생산량과 질을 향상시키자는 고르바초프를 지지했다. 그러나 기계 품질 향상과 전반적인 투자량 확대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를 놓고, 기계 품질 향상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얻을 방법이 없는 것을 안 고르바초프, 그리고 투자량 확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리시코프가 갈라섰다. 결과적으로 무리하게 안드로포프식 방식을 추진한 고르바초프의 정책과 미래에 대한 생각 없이 브레즈네프식의 다소 뒤떨어진 방식을 추진한 리시코프의 정책은 모두 중단됐다. [[1986년]] [[우크라이나 SSR]]에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일어나면서 원전 반경 30km 내의 많은 사람들을 대피시킴으로써 우크라이나계 정치인의 좌장으로서 이름을 알렸다.[* 다만 정확히 30km 반경은 아니었고, 일부 오염지역은 방치된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그가 정부를 대신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출한 것은 공이 맞다.] [[1987년]] 리시코프와 고르바초프는 [[기업]]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기존의 브레즈네프식의 방임과는 다른 방식인 기업주의 권한 축소로 [[노동자]]의 [[힘]]을 증가시켰지만, 결과적으로 그 힘이 너무 커져서 실패했다. [[1988년]]에 그는 [[아르메니아 SSR]]에서 일어난 [[아르메니아 대지진]] 복구를 하겠다며 나섰고,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소련 전역에서 큰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공황으로 인한 정부 [[예산]] 부족으로 전체 복구에는 실패했지만, 국민들 관심 돌리기에 바빴던 고르바초프보다는 행동으로 나선 리시코프가 더 높은 [[평가]]를 받았고 그는 고르바초프의 [[라이벌]]로 부상한다. [[1988년]] 점진적 시장경제 도입을 꾀한 [[페레스트로이카]] 추진 당시 급격한 [[민영화]]가 불러올 악영향을 깨달은 리시코프는 페레스트로이카를 극구 반대했다. 리시코프의 규제 시장경제 정책[* 시장경제 도입을 민간기업과 공기업 사이에 위치한 기업 다수를 창출한 후 서서히 [[사회민주주의]]를 도입하는 사상. 리시코프는 시장경제의 본격적인 도입 시기를 [[1992년]]으로 잡았다.]은 [[노멘클라투라|부패한 관료들]]이나 [[브레즈네프 독트린]] 파기를 우려한 [[소련군|군부]], 그리고 [[지식인]]들을 막론하고 큰 지지를 받았지만, 그의 [[정책]]이 채 꽃을 피우기도 전에 소련이 해체되었고, 새로 거듭난 [[러시아 연방]]은 페레스트로이카에 버금가는 급격한 시장경제화를 맞이했다. 리시코프와 고르바초프의 실책(제12차 5개년 계획, 기업에 관한 법률)을 사실상 전혀 검토하지 않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경제부를 폐지시켰고, 중앙정부의 힘을 강화시켜 보다 효율적인 경제정책 시행을 꾀했지만, [[1990년]] 고르바초프가 대통령 직위를 도입하며 정부의 힘을 약화시키자 둘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1990년]] 리시코프의 지지율은 빠르게 떨어졌지만, 지방정부를 강화시켜 [[소련 해체]]에 영향력을 미친 리시코프의 경제 개혁안[* 가격 자유화, 중앙정부 통제 유지, 단계적 민영화, 무상교육.]은 결함이 심각할 정도로 많은 [[보리스 옐친]]과 고르바초프의 '[[https://ru.wikipedia.org/wiki/500_%D0%B4%D0%BD%D0%B5%D0%B9|500일 계획]]'과 다르게 높이 평가되었다. '500일 계획'은 특히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관계설정을 잘못하여 소련 해체를 불러오게 된다. 리시코프는 [[러시아 SSR]] 최고회의의 내각 불신임안 통과 실패 이후에도 러시아 SSR 최고회의 주석이던 옐친과 500일 계획에 관한 타협에 실패하여 빠르게 지지를 잃은 끝에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에게 패했다. 옐친이 이끄는 러시아 SSR은 이 [[선거]]를 기점으로 소련에게서 차례차례 벗어나기 시작했다. ==== [[소련 해체]] 이후 ==== 소수정당을 세우고 러시아에서 계속 활동했으나, [[겐나디 주가노프]]를 지지하며 [[2003년]]에 국가두마 의원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곧 같은 해에 연방평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2014년 크림 위기]] 당시 [[러시아군]]의 [[크림반도]] 합병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때문에 [[미국]]과 [[서방]]으로부터 제재조치를 당했다.[[https://www.treasury.gov/press-center/press-releases/Pages/jl23331.aspx|#]] == 소속 정당 == || '''{{{#eFD88F 소속}}}''' || '''{{{#eFD88F 기간}}}''' || '''{{{#eFD88F 비고}}}''' || || [include(틀:소련 공산당)] || 1956 - 1991 || 입당[br]정계 입문 || || 인민에게 권력을 || 1995 - ? || - || || [include(틀:무소속)] || ? - 현재 || - || [각주] [[분류:1929년 출생]][[분류:소련 총리]][[분류:소련 공산당 26기 정치국 위원]][[분류:소련 공산당 26기 서기국 서기]][[분류:소련 공산당 27기 정치국 위원]][[분류:러시아의 정치인]][[분류: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분류:도네츠크 인민공화국 출신 인물]][[분류:대조국공훈훈장 1등급 수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