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23년 출생]][[분류:1895년 사망]][[분류:키이우 출신 인물]][[분류:독일계 러시아인]][[분류:러시아의 귀족]] ---- [include(틀:역대 러시아 제국 장관위원회 의장)] ---- ||||
<:>[[파일:Bunge_NKh.jpg|width=350]]|| || '''본명''' ||니콜라이 흐리스티아노비치 분게 Никола́й Христиа́нович Бу́нге[* 독일어: 니콜라이 카를 파울 폰 분게(Nikolai Karl Paul von Bunge).] || ||<|2> '''출생''' ||[[1823년]]|| ||[include(틀:국기, 국명=러시아 제국)] [[키이우|키예프]] || ||<|2> '''사망''' ||[[1895년]] (향년 72세) || ||[include(틀:국기, 국명=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학력''' ||[[성 블라디미르 제국 대학]] {{{-2 ([[정치학]] / [[박사]])}}}[* 석사 논문은 '표트르 대제의 상업 원칙 연구(Исследование начал торгового законодательства Петра Великого)', 박사 논문은 '신용 이론(Теория кредита)'.] || || '''약력''' ||러시아 제국 재무장관(1881~1887), 장관위원회 의장(1888~1895)|| || '''종교''' ||[[루터교]]|| [목차] [clearfix] == 개요 == 러시아 제국의 학자이자 정치인이다. 당대 저명한 경제학자로써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 아카데미 명예회원이자, 본인의 모교[* 이쪽은 총장까지 했다.]를 비롯한 여러 교육기관의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또한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니콜라이 2세]]의 젊은 시절 경제 분야를 가르쳤다. 학문적으로 초창기에는 [[아담 스미스]]의 영향을 받은 자유무역의 지지자였으나 훗날에는 비판자로 전향한다. 정치인으로서는 재무장관, 장관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이반 비시네그라드스키-[[세르게이 비테]]-[[표트르 스톨리핀]]-[[블라디미르 코콥초프]]로 이어지는 러시아 제국 말기의 국가 주도의 통화 개혁[* 이는 니콜라이 2세 시대에 세르게이 비테에 의해 완료된다.], 농업 개혁[* 농민공동체를 해체하고 농민의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을 강화시키는 것], 공업 성장으로 대표되는 경제 정책의 기본적 토대를 놓은 인물이다. 무엇보다 [[국가사회주의(오토 폰 비스마르크)|국가사회주의]]의 지지자로서 재무장관 시절 [[알렉산드르 3세]]에게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처럼 혁명가들에게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상태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받아들여져서 러시아 제국에서 근대적인 노동법과 사회보장제도가 정착되기 시작한다.[* 편견과는 달리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에 대한 사회보장제도는 그 시대 기준으론 좋은 편이었다. 단지 땅이 너무 커서 그게 제대로 시행되는지 감독하기가 힘들었던게 문제다.] 그러나 분게의 국가주의적 정책은 귀족층[* 1860년대의 대개혁 이후 러시아 귀족계급 전반이 몰락하고 있었고 분게가 귀족 토지 은행을 창설하고, 직접 농사를 짓는 귀족들에게는 유리한 조건으로 대출을 시켜줘야 한다는 등 나름대로 이를 지연시키고 귀족의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을 촉진하긴 했다. 다만 지주귀족의 몰락은 그 시대에서 일반적인 역사적 흐름이어서 문제지.] 및 타 파벌[* 주로 농민공동체의 급진적인 해체에 반발하는 파벌이었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여론의 압박에 몰린 그는 결국 재무장관직을 내려놓고 장관위원회 의장이 됨으로서[* 장관위원회 의장이 명목상으로는 황제 바로 아래의 최고위직이지만 정치 운영에서 담당하는 실무 분야가 적었기 때문에 사실상 명예직이었고 당시에도 '명예로운 좌천' 정도로 여겨졌다.] 일선에서 물러난다. 이후 1892년 시베리아 철도 위원회의 부의장 직책을 맡긴 한다. [[니콜라이 2세]]와 긴밀한 사이였다. 황태자 시절 경제학 교사였던 데다가, 알렉산드르 3세가 황태자에게 실무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시베리아 철도 위원회의 의장직을 맡겼는데 그 황태자를 보좌하기 위해 부의장으로 임명된 이가 분게였다.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사망했지만 황제는 자신의 일기장에 '충성스럽고 경험 많은 내 조언자 중 하나가 줄었다. 그의 죽음은 나를 어려운 처지로 만들었다'고 적었고, 분게가 제출한 보고서를 복사하여 다른 황족, 장관, 소비에트 의원들에게 배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