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임진왜란 전투 목록)] ||<-3> {{{+1 '''다대포 전투 - 다대진성 전투'''[br]多大浦戰鬪}}} || || '''시기''' ||<-2>1592년 5월 23일 ~ 24일[br](음력 4월 13일 ~ 14일)[* 또는 4월 14일 ~ 15일] || || '''장소''' ||<-2>조선 경상도 부산 다대포 || || '''원인''' ||<-2>부산진 함락 후, 일본의 다대포 진공. || || '''교전국'''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width=30]]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width=25]] || || '''지휘관''' ||<^|1>'''[[윤흥신]]'''†[br]윤흥제† ||'''고니시 유키나가'''[br]소 요시토시[br]마쓰라 시게노부[br]아리마 하루노부[br]오무라 요시아키[br]고토 스미하루 || || '''병력''' ||약 800 명 ||18,700 명 || || '''피해''' ||방어군 전멸 ||피해 규모 불명 || || '''결과''' ||<-2>일본군의 다대포진성 함락, 이후 [[동래성 전투]] 발발. || [목차] [clearfix] == 개요 == [[임진왜란]] 중인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은 [[부산진 전투]] 끝에 [[부산]]을 함락하고 다대포와 서평포를 공격하였는데 다대포를 지키는 장수는 다대포 첨사[* 다대포의 첨사는 평안도 만포진과 더불어 정3품 당상관이 임명되는 두군데 중 한곳이다.]인 [[윤흥신]]이었다. 참고로 윤흥신은 중종 ~ 명종 때의 권신인 [[윤임]]의 아들로, 을사 사화 때 아버지가 역적이 되어 멸족당할 때 너무 어려서 노비로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수십년 뒤 선조가 윤임을 신원하면서 자신도 노비에서 풀려나 무신으로 관직 생활을 하였다. == 다대포 전투의 전개 및 결과 == 징비록이나 윤흥신 비문에 의하면 4월 13일[* 또는 4월 14일부터 15일까지 치르는 전투였다고 한다.]부터 서평진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치루어 처음에 격퇴하여 일본군의 침략을 지연시켰으나, 4월 15일에 일본군이 대규모로 몰려오면서 전세가 뒤집어진다. 윤흥신은 800명의 병력으로 열심히 싸웠지만 당해낼 수가 없었고 결국 다대포가 함락되고 만다.[* 첫번째 공격은 격퇴했으나 두번째 공격에는 성안의 물자가 바닥나서 더는 싸울 수가 없었다.] 윤흥신은 일본군을 격퇴한 날 부하가 그에게 피하라고 했으나 이를 듣지 않고 다음날 나가 싸우면서 [[전사]][* 전설에 따르면 윤흥신은 활을 쏘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숙소의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던지며 저항하다가 전사했다고 한다.]하였으며 그의 이복 동생인 윤흥제[* 윤임의 서자]도 이복형을 따라 싸우다 전사하였다고 한다. == 여담 == 지금 다대포에 가면 다대 1동 사무소 옆에 제사를 올리는 '윤공단'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윤흥신을 기리는 곳.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는 [[충렬사(부산)|충렬사]]도 원래 [[송상현]]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송공사'라고 불렸는데 나중에 충렬사로 개명되고 [[정발]], 윤흥신의 위패도 같이 모시게 되었다. 다대포진성 전투와 첨사 윤흥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무려 171년이 걸렸다. 영조 때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조선)|조엄]]이 우연하게 다대포진성 전투에 대한 기록을 접하고 조정에 알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과 대조하면서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분류:임진왜란/전투]][[분류:공성전]][[분류:사하구의 사건사고]][[분류:부산광역시의 역사]][[분류:1592년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