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리큐 7철)] [[파일:TakayamaUkon.jpg]] '''高山右近''' '''Blessed Justo Takayama Ukon''' ([[1552년]] ~ [[1615년]] [[2월 5일]]) ||<:> [[파일:타카야마 우콘.jpg|width=300]] || ||<:> [[나가사키]]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에 전시된 다카야마 우콘 || [목차] == 개요 == [[일본]]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와 [[에도 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다. 또한 [[가톨릭교회]]의 [[복자]]이기도 하다. 정식 이름은 여럿 있으나, 후대에는 우콘으로 통칭하며 흔히 히코고로(彦五郞)라고도 부른다. [[기리시탄]]으로 유명하며, [[세례명]]은 유스토(Justo)이고[* 쥬스토라고도 읽는다.] [[2017년]]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다인(茶人)으로도 유명하여, [[리큐 칠철]](利休七哲) 중 한 사람이다. == 생애 == 다카야마 가문은 셋쓰(摂津)국[* 현재의 [[오사카시]]를 포함한 [[오사카부]]의 북부와 [[고베시]] 일부를 포함한 [[효고현]] 남동부에 해당.] 미시마(三島)군[* 지금의 오사카부의 미시마군]의 지방영주이다. 아버지 다카야마 도모테루(友照)가 당주를 하던 무렵, 다카야마 가문은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 휘하의 무장으로 [[마츠나가 히사히데|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를 따르고 있었다. 1552년 우콘이 태어났으며, 12세 무렵에 기리시탄으로서 [[세례성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부모 대에 이미 [[예수회]]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1564년]] [[미요시 나가요시]]의 사망으로 미요시 가문은 몰락일로를 걷고,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쇼군]]위를 물려받으면서 셋쓰의 정세는 급변한다. 요시아키는 셋쓰 지역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다카야마 가문은 세 다이묘 중 하나인 와다 고레마사(和田惟政)에 종사한다. 하지만 좁은 셋쓰 땅이 셋으로 나누어지면서 영토를 놓고 서로 다투는 혼란상이 벌어진다. [[1571년]], 다카무라 가문의 주군인 와다 고레마사가 또다른 셋쓰 지역 [[다이묘]]인 이케다(池田) 씨 휘하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 등에 패배한다. 승기를 탄 아라키 무라시게는 이케다를 배신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결탁, 셋쓰 땅따먹기에 돌입하고 결국 다이묘 지위에 오른다. 한편 다카야마 도모테루(우콘의 아버지)와 우콘은 와다 고레마사를 계승한 고레나가(惟長)와 사이가 틀어져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다카야마 부자는 아라키 무라시게의 조언을 얻어 주군을 칠 계획을 세운다.[* 참고로 [[아라키 무라시게]]는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위인이다.] [[1573년]] 고레나가가 화해를 청하는 척하며 살해하려는 계략으로 다카야마 부자를 소환하자, 다카야마 부자는 가신들을 이끌고 고레나가를 야습하였다. 고레나가는 황급히 고향으로 도망치고, 다카야마 가문은 승리했다. 하지만 우콘은 야습 중 아군의 실수로 거의 목이 베이기 직전의 중상을 입고 겨우 목숨만 건졌다. 이후, 다카야마 부자는 와다 가문의 2만석 영지를 흡수하여 다카쓰키(高槻)[* 지금의 [[오사카부]] 다카쓰키시] 성주가 되었다. 그리고 도모테루는 50세가 되자 우콘에게 성주의 지위를 양위했다. [[1578년]] 아라키 무라시게가 갑작스레 [[오다 노부나가]]에 반란을 일으켰다. 우콘은 은인인 아라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를 썼으나 실패했다. 반란을 진압하러 온 노부나가는 선교사와 기리시탄들의 목숨으로 다카야마를 위협하였다. 고민에 빠진 우콘은 성을 무라시게에게 돌려주고, 가족들을 성에 남겨둔 채 단독으로 노부나가에 투항했다. 다카야마 우콘과 [[나카가와 키요히데|나카가와 기요히데]](中川淸秀) 등의 이반으로 아라키는 결국 패하여 모리(毛利) 가문에게 도망치고 만다. 이 공으로 우콘은 성을 돌려받고 4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나게 된다. [[1582년]] 노부나가의 [[사망]] 이후, 우콘은 [[아케치 미츠히데|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세력에 들어가길 거부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막하에 들어가 분전했다. 다카야마는 전쟁 중에 [[아즈치 성|아즈치(安土) 성]]에 있던 세미나리오(seminário: [[신학교]])를 자신의 본거지인 다카쓰키 성으로 옮기기기도 했다. 이후에도 히데요시 휘하에서 다양한 공훈을 세웠으며, 우콘의 영지도 착착 넓어져갔다. 그 와중에도 포교활동은 계속 되었으며, 그의 인덕에 이끌려 기리시탄 영주들은 크게 늘어났다. 유명한 인물로 [[구로다 간베에|구로다 요시타카]](黑田孝高, 곧 구로다 간베에)는 세례를 받았으며, [[호소카와 타다오키|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마에다 토시이에|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등은 세례를 받지 않았으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동시에 영지 내의 절과 신사를 허무는 정책을 실시했고, 신도나 불교 측에서는 그에 대한 불만이 컸음은 당연지사. [[1585년]]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다. 이에 기리시탄 무장들까지 압박을 받게 되었고, 구로다 간베에 등 종교를 포기하는 경우도 속출했다. 우콘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지와 가산을 포기할 것을 천명했고, 스스로 추방자가 되었다. 이후 기리시탄 영주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로 들어가 은거했다. [[1588년]]부터는 기리시탄에 호의적이던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의탁했는데, [[1590년]] 오다와라의 싸움에는 추방자의 몸으로 마에다군에 종군하여 가네자와(金澤) 성을 쌓을 때 뛰어난 건축술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마에다 가문의 상담역으로 활동했다.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리시탄 추방령을 내리자, 우콘은 마에다의 영지를 떠나 가족과 함께 [[선교사]]들을 따라 [[필리핀]]의 [[마닐라]]로 떠난다. 마닐라에 도착해 신앙의 수호자로 대환영을 받기는 했지만, 노령의 몸으로 장거리 여행은 무리였는지 병을 얻어 1615년 [[향년]] 6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후손들은 귀국을 허락받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여담 == 수만석의 영지를 포기하고 신앙을 택한 인물. 최종적으로 성공한 무장은 되지 못했을지언정 성공한 신앙인이 된 셈이다. 일본 [[가톨릭]]에서는 그를 [[성인(기독교)|성인]]으로 시성하도록 신청하기도 했다. 평등사상을 가져서 솔선하여 천민들에 대한 차별을 반대했다고 한다. 영민들에게 가톨릭을 강요하지는 않았으나, 한편으로 사원을 훼손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인으로서도 유명했으며, [[센노 리큐]](千利休)의 제자로 오다 우라쿠사이(織田有樂齋) 등과 친분을 쌓았다. 우라쿠사이는 그의 다풍에 대해 ‘다 좋은데 결벽증이 있는 듯하다’고 평했다.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전쟁포로와의 인연도 있다. [[승려]] 출신으로 일본에 전쟁노예로 끌려간 카이요라고 하는 사람은 사제들과의 교류로 감명을 받아 가톨릭으로 신앙을 바꾸고 [[예수회]]에 입회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입회 허가가 되지 않자 카이요는 키리시탄 다이묘인 다카야마 우콘의 부하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키리시탄 추방령이 내려지고 주군이 [[필리핀]] [[마닐라]]로 쫓겨나자 같이 동행하였다. 카이요는 우콘 사후에 다시 [[나가사키]]로 돌아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잡혀 [[1624년]] 화형당하였다. 그는 사형당하기 며칠 전에 [[예수회]] 입회허가가 떨어져 '''조선인 최초의 예수회 수사'''가 되었고 예수회에 입회하겠다는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위의 사진처럼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에 다카야마 우콘의 조각상이 있듯이 카이요에 대한 비석도 다른 층에 있다. 성 근처의 마을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관을 직접 들어 영민들을 감동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에 천민들이나 관을 들었기 때문이다. == 시복시성 == 일본 가톨릭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타국에서 객사한 그를 순교자로서 시복시성을 추진하였다. 일본천주교주교회의에서는 1867년 시복된 '205 순교자'이외에 '베드로 키베[* 일본 출신의 [[예수회]] 소속 가톨릭 신부. 최초의 일본인 신부이기도 하다. 1587년 지금의 [[오이타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이묘였던 [[오토모 소린]]의 중신이었으나 키리시탄 추방령이 선포되자, 가족을 이끌고 [[마카오]]로 떠났다. 키베는 사제가 되기 위해 로마유학을 하였으며, 일본인 최초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일본의 [[마르코 폴로]]라고도 불린다. 1620년 로마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인도에서 사목을 하다가 일본의 천주교 박해가 매우 심하다는 전갈을 받고 선교를 위하여 순교를 각오하고 1630년 일본에 돌아온다. 9년간 박해의 눈을 피해서 선교활동에 전념하다가 [[센다이]]에서 체포되어 [[에도]]에서 순교한다. 2008년 187위 순교자와 함께 시복되었다.]와 187순교자'라는 이름으로 시복시성을 추진하였는데(2008년 시복), 그는 '순교자 다카야마 우콘'라는 이름으로 단독으로 시복시성이 추진되었다. 그만큼 일본 가톨릭에서 다카야마 우콘은 위대한 존재로서 인정을 받고 있다. [[2017년]] [[2월 10일]], 일본 [[오사카 성]] 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대리한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이 그의 시복 미사를 주례하여[[http://www.cpbc.co.kr/onmedia/programe.php?cid=671243&wr_id=&code=7350|기사]] [[복자]]로 시복되었다. 축일은 [[2월 3일]]이다. 다카야마 우콘이 20여년간 종군했던 [[마에다 토시이에]]의 본거지, [[가나자와시|가나자와]]성의 바로 근처에 천주교 나고야교구 가나자와 예수성심성당이 있는데 여기에는 그의 동상 및 초상화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또한 그의 행적과 관련 있는 곳을 순례지로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시복 이후인 2017년 10월, 복자 다카야마 우콘의 성유물[* 그가 생전에 입었던 조끼의 일부]이 가나자와 성당에 안치되어 많은 신자들의 공경을 받고 있다. 천주교 오사카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인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가라샤]]와 함께 동상이 세워졌다{[[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araeng240&logNo=50161266703&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출처]]). == 기타 매체에서 == || [[파일:高山ジュスト .jpg]] || ||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세례명인 타카야마 쥬스트로 등장하며, 합전과 내정모두 70대인 B급 무장이다. 태합입지전5에서도 등장. 여기서의 이름은 다카야마 시게토모(高山重友)이다. 능력치 자체는 통솔 53, 무력 48, 정무 70, 지모 65, 매력 72(+3 다도칭호)로 고만고만한 편이지만 건축, 개간, 광산등 내정쪽 능력치가 좋은 편. 산술, 변설 기능이 구려서 직위가 낮을때는 마땅히 맡길만한 임무가 없는 것이 조금 아쉽다. 그의 삶을 다룬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이 있다. 만화 [[효게모노]]에선 주인공 [[후루타 시게나리]](후루타 오리베)의 제부(여동생의 남편) 관계이며, 둘이 뭉쳐 여러 기행을 저지르고 다니곤 한다. 다테 마사무네가 도요토미에게 투항하러 가는게 두려워 둘에게 조언을 구하자, 마사무네에게 백의(심지어 하이그레에 가까운)를 입혀 투항시키게 했는데, 이 것이 도요토미의 배꼽을 잡게 만들어 화해무드를 조성, 의외로 일을 성공시키기도 한다. 2014년 [[NHK 대하드라마]] [[군사 칸베에]]에도 등장. 대표적인 기리시탄 무장으로 묘사된다. [[분류:복자]][[분류:센고쿠 시대/인물]] [[분류:1552년 출생]] [[분류:1615년 사망]][[분류:우다시 출신 인물]][[분류:리큐 7철]][[분류:일본의 객사한 인물]][[분류:오다 가문 가신]][[분류:도요토미 가문 가신]][[분류:다이묘]][[분류:종5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