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선비족]][[분류:137년 출생]][[분류:181년 사망]] [include(틀:역대 선비 제국 대인)] ---- ||<-2> '''{{{#fff 선비 초대 대인}}}[br] {{{+1 檀石槐 | 단석괴}}}''' || || '''존호''' ||대인(大人) || || '''휘''' ||단석괴(檀石槐) || || '''부친''' ||투록후(投鹿侯) || || '''모후''' ||불명 || || '''생몰''' ||137년 ~ 181년 || || '''재위''' ||151년 ~ 181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2세기에 등장한 [[선비(민족)|선비]]족의 [[군장(동음이의어)#s-1|대군장]]. 선비족을 포함한 북방 여러 [[유목민족]]을 통일하여 선비족 최초의 [[유목제국]] 선비제국을 세웠다. == 생애 == 하늘에서 번개가 치며 우박이 입속에 들어가 [[임신]]을 하였고 10달만에 태어났다.[* 하늘의 빛에 의해 회임하는 것이 [[고구려]]의 [[건국군주]] [[고주몽]]과 유사하다.] 용감하고 건장하면서 지략을 가져 [[부락민]]들이 모두 경외하고 복종했으며, 금지하는 법을 시행하면서 공정하게 처리해 이를 함부로 어기는 사람이 없었고 추대받아 '[[대인]]'이 되었다. 탄오산과 철구수 사이에 [[왕정]]을 건립하고, 군사가 강성해지자 동•서부의 대인들이 그에게 귀부했으며, 남쪽으로는 ([[후한]]의 북쪽) 변경 지역을 [[약탈]]하고, 북쪽으로는 [[정령(동음이의어)#s-3.1|정령]][* [[투르크]]의 선조 [[철륵]]의 다른 명칭이다.]을 막았으며, 동쪽으로는 [[부여]]를 물리치고, 서쪽으로는 [[오손]]을 공격해 [[흉노]]의 옛 지역을 점거했고 [[요동]]을 정복하여 그 동•서의 길이 4,000여리나 되었다.[* 단석괴 생전에 선비족이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범위로 보면 당시의 [[후한]] 영토보다 넓었던 북방제국이었다.] [[환제(후한)|환제]] [[영수]] 2년([[156년]]) 가을 7월에는 운중을 공격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후한]]을 공격했으며,[* 후한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아서 후한 조정에서는 [[장환]]을 사흉노중랑장에 임명하여 선비족에게 대항했다.] 그를 막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사신을 파견하고 인수를 가져와서 [[왕]]으로 책봉해 화친을 시도했다. 단석괴는 이를 거부하고 후한을 공격해 더욱 약탈했으며, 후한 영토를 유린하고 후한의 영토를 3부로 나누면서 각 부마다 대인을 두어 통치하게 했다. [[영제(후한)|영제]] [[희평]] 6년([[177년]])에 후한에서 [[하육(후한)#s-1|하육]], [[전안(후한)|전안]], [[장민#s-1]] 등을 파견해 공격하자 3부의 대인들에게 각 무리를 거느리고 싸우게 해서 이들을 모두 격파했으며, 이후에도 후한을 계속 공격하다가 181년에 사망[* 당시 기준으로 적지않게 산 것은 맞지만,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면서 흔히 아는 《'''[[삼국지]]》의 배경 시대 [[후한]]말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라는 [[군웅할거]]의 [[난세]]가 펼쳐지는 역사를 생각해보면 5년만 더 살았어도 후세에도 엄청난 인지도를 자랑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큰 걸물인 셈.]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아들 [[화련(선비족)|화련]]이 추대되었다. 그러나 화련의 역량은 부친 단석괴에 미치지 못한데다가 전사하여 선비제국은 분열되고 쇠퇴하여 미완의 유목제국으로 해체되었고 [[답돈]]을 비롯한 [[오환족]]의 세력이 다시 강성해졌으며 시대의 흐름 역시 그들에게 유리하지 못해서, 그 후 선비족은 [[조조]]의 오환족 토벌 이래 [[가비능]], 그리고 [[위진남북조시대|미래의]] [[모용부]], [[탁발부]], [[우문부]]에게 그 역사적 역할을 넘겨주어야 했다. == 미디어 믹스 == [[삼국전투기]]에서는 소패2 전투 편에서 이름만 언급된다. 여기저기 선비족을 통합하여 국가를 세웠지만[* 이 건국 장면은 영화 [[아버지의 깃발]]의 포스터를 패러디했다.] 그가 40대에 사망하자 선비족은 구심점을 잃고 다시 흩어진 뒤 크게 3개의 세력으로 쪼개졌다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