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2> '''{{{+1 檀韶[br]단소}}}''' || || '''작호''' ||파구현후(巴丘縣侯) → 의양현후(宜陽縣侯) || || '''성''' ||단(檀) || || '''이름''' ||소(韶) || || '''자''' ||영손(令孫) || || '''생몰''' ||366년 ~ 421년 || || '''출신''' ||고평군(高平郡) 금향현(金鄕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 [[송(남조)|유송]]의 장수로 자는 영손(令孫)이다. 형제인 [[단지(동진)|단지]], [[단도제]]와 함께 유유를 도와 유송의 개국공신이 된 명장이었다. == 생애 == 고평군 금향현 출신이다. 단소의 집안은 5형제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서 형제들이 모두 당숙인 [[단빙지]] 밑에서 자랐다. 처음에는 연주 종사로 임명되었고, 서조주부, 보국부 사마를 역임했다. 404년, 유유가 [[환현]]을 토벌하고자 거병할 때, 단소는 아우인 [[단지(동진)|단지]], 단륭, [[단도제]] 등과 함께 유유에게 종군했고 유유의 참군사가 되었다. 환현이 토벌된 뒤, 단소는 진군부 참군이 되었고 영삭장군, 동해군 태수가 더해졌으며, 건무장군으로 진호되고 용양장군, 진군(秦郡) 태수, 북진류군 내사를 역임했다. 또한 환현을 토벌한 공으로 파구현후(巴丘縣侯)에 봉해졌고 식읍 500호를 받았다. 408년, 유유가 거기장군으로 임명되자, 단소는 다시 유유의 참군사가 되고 용양장군이 더해졌다. 뒤에 유유가 스스로 중군장군으로 강등되면서 단소는 효기장군, 중군부 자의참군으로 옮겼고 영삭장군이 더해졌다. 유유가 [[남연]]을 정벌할 때, 단소는 상미(向彌), 호번(胡藩) 등 50명을 이끌고 임구성(臨朐城)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남연의 수도인 광고를 포위할 때 [[모용초]]가 누각을 불태우고 포위를 분산시켜 단소는 횡야장군(橫野將軍)으로 강등되었다. 광고가 함락될 때 단소는 군대를 이끌고 가장 먼저 입성하여 모용초를 사로잡았으며, 북낭야군 태수를 겸하고 영삭장군, 낭야군 태수로 진호되었다. 이후 좌리에서 [[노순]]을 토벌할 때 단소는 다시 전공을 세웠고 남연 정벌의 공도 함께 인정받아 의양현후(宜陽縣侯)에 봉해졌고 식읍 700호를 받았다. 또한 이전의 작위였던 파구현후는 작위를 백으로 낮추고 식읍도 250호로 하여 단진(檀臻)에게 내렸다. 411년, 보국장군으로 진호되었다. 412년, 모친상을 당한 뒤 관군장군으로 기용되었다. 413년, 낭야군 내사, 회남군 태수를 역임했고 관군장군은 그대로 받았으며, 고숙(姑孰)에 진수하였다. 또한 좌장군으로 진호되고 대중정을 겸하였다. 416년, 독강주예주서양신채2군제군사(督江州豫州之西陽新蔡二郡諸軍事), 강주 자사로 옮기고 좌장군은 예전과 같이 받았으나, 죄를 지어 면직되었다. 420년, 유유가 동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동진)|공제]] 사마덕문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고 유송을 건국하니, 이가 초대 황제인 [[무제(유송)|무제]]였다. 단소는 이때 식읍 800호가 더해져 총 식읍이 1,500호가 되었다. 유송 건국 1년 뒤인 421년, 단소는 건강에서 사망하여 안남장군, 산기상시로 추증되었다. 단소는 술을 즐기고 탐욕스러운 성격이었다. 또한 내사나 태수, 자사로 부임했을 때 치적을 세운 적이 없었으며, 육문(六門) 안에서 수레에 올랐다가 추궁을 당하여 삭탈관직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유는 단소 형제가 자신의 거병에 참여했고 또한 단소의 아우인 단도제가 큰 공적을 세웠기에 여전히 단소를 총애했다. [[분류:송(남조)/인물]][[분류:366년 출생]][[분류:421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