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신라의 고총 고분군)] [[파일:달성 고분군 분포도.jpg]] 발굴조사 당시의 달성 고분군의 분포도. 부립회생병원이라고 되어 있는 곳이 지금 대구의 대구의료원의 전신이다.[*출처 조선총독부, 1931, 『대정십이년도고적조사보고 경상북도달성군달서면고분조사보고』] [목차] == 개요 == [[대구광역시]] [[비산동(대구)|비산동]]과 [[서구(대구)|내당동]], [[대명동(대구)|대명동]] 일대에 걸쳐서 형성되어 있었던 [[신라]]의 고분군. 고고학이나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면 잘 알 수 없는 유적이다. == 조사 내용 == ||[include(틀:지도, 장소=비산 4동, 높이=224px, 너비=100%)]|| 달성의 근처에 마치 [[경주시|경주]]의 [[대릉원]]마냥 거대한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어서 고분군의 이름도 이 [[달성|달성(達城)]]에서 따온 달성 고분군이다.[* 일제강점기에 지명이 달성이 위치한 이곳이 달성군이었다. 사실 여기서 따온건데 달성군 이름이 달성 자체에서 나온거니깐 그런거로 하고 넘어가자.] 달성의 남서쪽으로 [[비산동(대구)|비산동]]과 [[서구(대구)|내당동]], [[대명동(대구)|대명동]] 등에 걸쳐서 형성되어 있었다. [[파일:달성 고분군 37호 전경.jpg]] 1931년([[쇼와]] 6년) 조사당시의 모습.[*출처 조선총독부, 1931, 『대정십이년도고적조사보고 경상북도달성군달서면고분조사보고』] 사진의 가장 왼쪽이 지금의 달성이고 가장 멀리 보이는 산은 [[팔공산]]이다. 옆의 민가들의 크기를 통해 보더라도 상당한 규모의 고분군들이 조영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진에 나온 비산동 37호분은 하나의 봉토 아래에 두 개의 횡구식 석실이라는 석곽처럼 생긴 석실이 2개가 같이 있는 구조이다. 두 석실 모두 높은 위계의 신라 금공품들이 출토되었는데 出자형 금동관과 금동제 관모, 관식[* 이상 관 및 관을 장식하는 머리에 쓰는 장식품들이다.], 태환이식[* 큰 고리의 귀걸이, 통상 태환이식이라함은 최소 도금이거나 금, 은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한다.], 경식[* 가슴쪽 치레 장식], 은장삼엽문환두대도와 삼루문환두대도[* 각 삼엽문과 삼루문은 칼의 손잡이 부분의 장식 형태를 뜻한다. 삼루문은 클로버 모양, 삼엽문은 클로버 모양+인동초 장식이 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 등이 출토되었다. 이는 신라 귀족, 왕족들의 금은 장식품 착장 체계에 있어 상당히 높은 위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경주 이외의 지방에서는 거의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풀셋트이다. 여기서 나온 금동관은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위계로 말미암아 대구 분지에 분포하는 고총 고분군들 ─ [[달성 고분군]], [[불로동 고분군]], [[구암동 고분군]], 그리고 주변의 [[문산리 고분군]], [[성산동 고분군]]과 같은 고총 고분군 중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고분군으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이 달성 고분군은 토기 양식적으로나 묘제적으로나 [[낙동강]] 중류역의 각종 고총군, 고분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역시 [[의성군|의성]] [[금성산 고분군]]처럼 대구 방면에서는 가장 중심지적인 성격을 나타내었던 것으로 추론된다. 또 한편으로는 일찍이 [[달성|달성(達城)]]이라는 토성의 존재로 하여금 일찍이 [[원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던 세력이 성장하여 달성 고분군을 조영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는 [[금호강]]변의 [[불로동 고분군]]이나 [[경산시]]의 [[임당 고분군]]하고도 유사한 고총군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양상이다. 대구시의 형성과정에서 일찍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인지도는 낮지만 지금도 재개발로 인한 구제 발굴의 수요가 생기고 있다. 발굴결과를 보면 여전히 고분군의 흔적들이 조사되고 있다. == 여담 == 일제시기에 고분들을 발굴하고 그 이후 개발되어 고분들이 사라졌기에 일제가 남긴 보고서가 유일하다. 이 당시 [[일본 제국|일제]]의 발굴 보고서는 [[지산동 고분군]]에 대한 것처럼 보고서가 두 장 짜리만 있는가 하면 제법 공을 들여서 쓴 것도 있었다. 다른 목적성이 있었다고 보이는 [[가야]]권이나 [[낙랑]]의 발굴과는 달리 소상히 발굴조사 보고서가 기술(記述)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의 관학자들의 연구들이 의도가 잘못되었을지언정 발굴조사 시스템은 당시 수준에서는 제법 높았다. 해방 이후의 한국의 문화재 관련 발굴조사 및 보고서 기술은 80~90년대 쯤 대학발굴이 흥기할 무렵에 일약 진전이 있었다. 60~70년대 발굴은 대부분 보고서나 서술적 측면에서 부족했었다.] 문화재에 대한 현대적인 인식 이전에 모든 고분들이 개발로 인해서 사라진 상황에서 --덕분에 문화재를 둘러싼 마찰은 없지만-- 유일하게 달성 고분군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어 관련 연구에서 ~~어쩔 수 없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고분군이 우리 손에 의해 체계적인 발굴이 이뤄진 후 잘 보존되었다면 문화재 하나가 아쉬운 대구광역시에 큰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대구시가 주로 내세우는 역사 관련 관광 프로그램이 중구의 근대 골목과 [[동산병원]]의 선교사 건물들과 계산성당 등을 체험하는 '근대로의 여행'이다. 대구시가 근대 문화 컨텐츠를 밀어온 것은 대구의 근대 이전 역사 관련 유적 보호가 빈약하다는 한계점이 내포되어 있다.] 개발이 안되었다면 고분군을 달성과 연계하여 경주 시가지의 [[경주 월성|월성]]처럼 고대 문화를 살리고 [[중구(대구)|중구]] 경상 감영의 중세 문화를 거쳐 근대 골목에서 근대 문화까지 함께 체험하는 역사적인 도시가 되었을텐데 아쉬운 부분이다. == 관련 문서 == * [[고분문화 #s-4]] [[분류:고분]][[분류:대구광역시의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