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고구려계 도래인]] [[분류:고구려의 승려]] [[분류:고구려의 화가]] [[분류:579년 출생]] [[분류:631년 사망]] [include(틀:개벽 선정 조선 10대 위인)] ---- [목차] == 개요 == '''曇徵''' (579 ~ 631) [[고구려]]의 [[승려]]이자 [[화가]]. 국내의 [[사서]]에는 담징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나, [[혜자]] 등처럼 [[일본서기]]에는 담징에 관한 기록이 기술되어 있다. == 생애 == 610년([[영양왕]] 21년), [[백제]]를 거쳐서 일본인 승려인 [[법정]]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당시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담징은 5경과 채색에 재주가 있었으며 [[종이]], [[먹]], 연자방아(碾磑)[* 말이나 소가 절구 위에 있는 돌을 끌어서 돌려 곡식을 빻도록 만든 방아.] 등의 제작방법을 일본에 전하였다고 한다. 특히 종이와 먹은 몰라도 연자방아는 당시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된 듯하다. == 호류지 금당벽화의 화가? == [[일본]]의 [[구전]]에 따르면 법정과 함께 [[나라시|나라]]의 [[호류지]]로 가서 [[호류지 금당벽화]]를 그렸다는 [[카더라]]가 있다. 그래서 사학자 [[이병도]]가 이를 근거로 담징이 호류지 금당벽화를 그렸다고 국내에서 주장했고, 한땐 이런 설이 한국사 교과서에 실려 정설처럼 취급되기도 했다.[* 과거 한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때의 일화가 나오기도 했는데, 당시가 [[여수전쟁]] 기간이라 고향 생각에 그림을 못 그리다가 고구려가 수에 이겼다는 말을 듣고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는 식. 물론 미화가 넘치는 어린이용 위인전마냥 사료적 근거는 딱히 없어보이는 창작 스토리긴 하다.] 다만 문헌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호류지가 담징이 이미 사망하고 고구려도 멸망한 후인 670년 화재로 전소되었다고 기록되어있어 현재의 호류지는 이후 재건한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벽화 역시 이후 그려졌을 가능성이 많아 오늘날에는 정설로 인정받진 못하고 있다. 1995년 집필된 글이긴 하다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3838|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담징을 삼국시대 일본 호류사금당벽화(사불정토도)를 그린 승려.화가라고 소개하면서도, 다만 일본 학계에서는 이것이 한 사람의 수법이 아닐 뿐 아니라 요철법·채색법·인물의 묘사법 등이 서역화풍에 토대를 두고 당풍으로 변형된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하여 담징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7세기 후반경의 하쿠호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부가 설명을 달아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