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보물)] [[파일:대구 무술명 오작비2.gif]] [목차] == 개요 == 大邱 戊戌銘 塢作碑. 6세기 경 [[신라]] 중고기에 영동리촌(另冬里村, 현 [[대구광역시]] 일대)에서 [[저수지]]를 축조하고 세운 기념비. 현재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 중이며, [[대한민국의 보물|대한민국 보물]] 제516호로 지정되어 있다. == 내용 == [[파일:대구 무술명 오작비1.jpg|width=400]] 1946년 [[대구광역시]] 중구 대안동에서 발견된 주형광배(舟形光背) 모양의 자연석으로, 6세기 경 무술년 사월삭 십사일(戊戌年四月朔十四日)에 신라 영동리촌(另冬里村)에서 저수지를 축조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민간에서 세운 비석이다. 비문은 오랜 세월이 흐르며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이 비석에 나오는 무술년은 518년([[법흥왕]] 5년) 또는 578년([[진지왕]] 3년) 둘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578년 제작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비체(碑體)의 형식, 비문의 서체 등이 6세기 전반보다는 후반 때와 더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518년 제작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오작비의 발견 이후 1968년에 추가로 발견된 [[영천 청제비]]가 연구 결과 536년(법흥왕 2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이 오작비 또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삼고 있다. 비석에는 제1행 22자, 제2행 17자, 제3행 20자, 제4행 21자, 제5행 28자, 제6행 24자, 제7행 21자, 제8행 18자, 제9행 8자로, 전문 약 179글자가 새겨져 있다. [[영천 청제비]]와 함께 당시 신라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국적인 관개지 및 관계시설을 구축해놓았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순수한 중국식 [[한문]]체가 아닌 [[이두]]식(吏讀式)의 문체로 되어 있으며 직명·지명·인명 등 고유명사가 대부분으로, 이 고유명사 중간 마다 몇 구절의 문장이 끼워져 있다. 저수지의 크기는 대광(大廣) 20보(步), 높이 5보 4척(尺), 길이 50보 였고, 312명의 인원이 13일 동안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비문을 쓴 글쓴이와 책임감독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6세기 경 대구 중구 대안동 일대에는 영동리촌(另冬里村), 부작촌(夫作村), 진득소리촌(珍得所里村) 등의 이름을 가진 촌락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 수리시설 및 사회사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원문 및 해석 == >戊戌年十一月朔十四日另冬里村且只[* 且只를 高라고 판독하기도 한다.]▨塢作記之此成在▨ >人者都唯那寶藏阿尺干都唯那慧藏阿尺干 >大工尺仇利支村壹利刀兮貴干支▨上▨壹▨利干 >道尺辰▨生之▨▨村▨▨夫作村芼令一伐奈生一伐 >居毛村代丁一伐另冬里村沙木乙一伐珎淂所利村也淂失利一伐 >塢珎此只村內▨利一尺▨▨一尺另所▨一伐伊此木利一尺 >▨助只彼日此塢大廣廿步高五步四尺長五十步此作 >起數者三百十二人功夫如十三日了作事之 >文作人壹利兮一尺 >---- >무술년([[578년]]) 11월 삭(朔) 14일에 영동리촌(另冬里村)의 차지▨오(且只▨塢)[* 오([[塢]])는 [[저수지]] 혹은 [[둑]]을 뜻하는 한자이다.]를 만들고 기록한다. > >이것을 만든 사람들은 도유나(都唯那)[* 신라에서 [[진흥왕]] 대에 마련된 승직(僧職)으로, 그 외의 승직으로는 국총(國統), 대도유나(大都維那) 등이 있었다. 비문의 둑[塢\]을 축조하는 데 지방관 대신 승려가 책임자로 파견된 까닭은 확인되지 않는다.]인 보장(寶藏) [[아찬|아척간]](阿尺干)[* 이처럼 승려에게 관등이 주어진 사례는 이 비가 유일하다.]과 역시 도유나인 혜장(慧藏) 아척간, 대공척(大工尺)[* 척(尺)은 일반적으로 기술자를 의미하므로, 대공척은 둑의 축조 작업 전체를 책임진 직책이라고 볼 수 있다. [[경주 남산 신성비]]에 보이는 '장척(匠尺)', '공척(工尺)' 등과 동일한 성격을 지녔다.]인 구리지촌(仇利支村) 출신의 일리도혜(壹利刀兮) 귀간지(貴干支)[* 신라 외위 11등 가운데 제4등에 해당한다.], ▨상▨일▨리(▨上▨壹▨利) 간(干)[* 신라 외위 11등 가운데 제7등에 해당한다.], 도척(道尺)[* 대공척과 마찬가지로 둑의 축조와 관련된 직책으로, [[영천 청제비]]의 부척(斧尺)과 유사한 성격이라 할 수 있다.]인 진▨생지▨▨촌(辰▨生之▨▨村) ▨▨, 부작촌(夫作村) 출신의 모령(芼令) 일벌(一伐)[* 신라 외위 11등 가운데 제8등에 해당한다.], 나생(奈生) 일벌, 거모촌(居毛村) 출신의 대정(代丁) 일벌, 영동리촌 출신의 사목을(沙木乙) 일벌, 진득소리촌(珎淂所利村) 출신의 야득실리(也淂失利) 일벌, 오진차지촌(塢珎此只村) 출신의 내▨리(內▨利) 일척(一尺)[* 신라 외위 11등 가운데 제9등에 해당한다.], ▨▨ 일척, 영소▨(另所▨) 일벌, 이차목리(伊此木利) 일척, ▨조지(▨助只) 피일(彼日)[* 신라 외위 11등 가운데 제10등에 해당한다.] 등이다. > >이 저수지의 크기는 너비 20보, 높이 5보 4척, 길이 50보이다. 이것을 만드는 데 동원된 수는 312인의 공부(功夫)이며, 13일 간에 일을 다 마쳤다. >이 비문을 작성한 사람은 일리혜(壹利兮) 일척이다. 참고자료: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Ⅱ,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50&page=1&pre_page=1&setId=6&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gsk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gskh_003_0010_0070_0030&position=-1|한국사데이터베이스 판독문]] == 외부 링크 ==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4712&cid=46620&categoryId=46620|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대구 무술명 오작비]]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80535&cid=40942&categoryId=33380|두산백과 : 대구 무술명오작비]] * [[https://ko.wikipedia.org/wiki/대구_무술명_오작비|한국어 위키백과 : 대구 무술명 오작비]]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2982735|경향신문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 설총보다 100년 앞선 '이두의 시작' 무술오작비…여승이 지휘한 공사기록이었다]] == 보물 제516호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2,05160000,22&pageNo=1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 대구 무술명 오작비 (大邱 戊戌銘 塢作碑)]] >1946년 대구시 대안동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가 7, 8년 동안이나 행방을 알 수 가 없었는데, 그 후 다시 경북대학교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 >비(碑)는 길쭉한 모양의 자연석으로, 아래는 직선으로 잘려 있고 윗부분은 원형으로 처리되어 있다. 아래부분의 모습으로 보아 본래 받침돌 위에 세웠거나 암반 위를 파고 세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 >비의 내용은 건립날짜와 저수지 축조내용 및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글자가 상당수 깎여나가 해석을 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신라시대 수리시설이나 사회사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분류:대한민국의 보물]][[분류:신라의 금석문]][[분류:경북대학교박물관 소장품]][[분류:대구광역시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