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 [목차] [clearfix] == 개요 == 戴逵 (? ~ 396) 동진의 은사. 자는 안도(安道). 예주 초국(譙國) 질현(銍縣) 출신. 조부 대석(戴碩)과 부친 대수(戴綏), 형 대록(戴逯)까지 모두 출세하여 나름 동진에서 잘 나가는 가문이었으나 본인은 은거를 선택하였다. 특히 예술 쪽에 재능이 뛰어나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다. == 생애 == 대규는 어릴 때부터 박학하고 담론을 좋아하였으며, 문장 또한 뛰어났다. 그리고 예술에도 재능이 있어 거문고 연주에 능하였고, 여러 서화를 제작하는 등, 그 다양한 재능을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한번은 계란의 흰자를 보고는 곧바로 〈정현비(鄭玄碑)〉를 지어 비석에 새겼는데, 그 내용이 사려가 깊고 기묘하여 당대 사람들은 이를 읽고 감탄을 금치 못 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재능이 있었음에도 속세의 일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 하고, 항상 거문고를 타며 책을 읽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대규가 20여 세에 이르렀을 때, 예장(豫章)으로 가 명망높은 유학자인 [[범선(동진)|범선]]을 스승으로 섬겼다. 범선은 역시 대규를 다른 제자들과 달리 보고는 조카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그때 태재, 무릉왕 사마희(司馬晞)는 대규가 북과 거문고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사자를 보내 그를 불러 오게 하였다. 그러자 대규는 사자 앞에서 거문고를 부수고 외쳤다. > "대안도는 왕족을 위해 악공이 되지 않겠다!" 이를 전해들은 사마희는 노하여 그 형인 대술(戴述)을 붙잡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대술은 동생과 달리 오히려 기뻐하였고, 기꺼이 고문고를 들고 가 연주하였다고 한다. 이 소동이 있은 후, 대규는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고 회계(會稽)의 담현(剡縣)으로 가 은거하였다. [[효무제(동진)|효무제 사마요]] 재위기에 명재상 [[사안(동진)|사안]이 대규의 명성을 듣고 그의 재능을 직접 보고 싶어하였다. 마침 대규도 볼일이 있어 잠시 도성 건강(建康)을 방문하였는데, 사안은 직접 그를 찾아가 만나보았다. 둘은 만나서 경전과 거문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는 서로 마음이 잘 통해, 사안이 자신의 집으로 대규를 초대하였다. 대규는 사안의 학식과 재능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존경하게 되었고, 해가 저물 때까지 더불어 대화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태원 12년(387년) 5월, 효무제 사마요가 조서를 내려 대규를 산기상시, 국자박사로 삼고 누차 불렀으나, 대규는 아버지의 병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군과 현에서 회유와 압박을 해오자, 대규는 이를 피해 오군(吳郡)으로 숨어들었다. 오국내사 왕순(王珣)은 특별히 무구산(武丘山)에 집 한 채를 내어주어 대규를 숨겨주었고, 대규는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냈다. 결국 효무제는 회계내사 [[사현]]의 상소를 받아들여 대규의 임명을 취소하였고, 대규는 이 소식을 듣고 나서 다시 담현으로 돌아왔다. 왕순이 상서복야에 임명되자, 조정에 상소하여 대규를 국자좨주, 산기상시에 추천했지만, 대규는 당연히 이에 응하지 않았고, 산에 숨어들어 그림과 조각상을 만드는 데에 전념하였다. 그는 《아곡처녀도(阿谷處女圖)》, 《동위연시도(董威輦詩圖)》, 《호인농원지도(胡人弄猿圖)〉 등 다양한 사실화를 그렸고, 여러 불상을 조각하여 절에 기증하였다. 태원 20년(395년), 태자태부, 회계왕 [[사마도자]], 소부 왕아(王雅), 첨사 왕순이 다시 상소하여 대규를 추천하였으나, 이듬해인 태원 21년(396년)에 대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대규의 장남 대발(戴勃)은 부친의 기풍이 있어, 조정에서 그를 산기시랑으로 삼으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고 한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396년 사망]][[분류:쑤저우시(안후이성) 출신 인물]][[분류:중국의 화가]][[분류:중국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