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F51BA 0%, #3F51BA 20%, #3F51BA 80%, #3F51BA)" {{{+1 {{{#fecd21 '''{{{+1 戴法興}}}[br]대법흥'''}}}}}}}}} || ||<:> '''[[직위|{{{#FEDC21 최종직위}}}]]''' ||<(> 월기교위^^(越騎校尉)^^ || ||<:> '''[[성씨|{{{#FEDC21 성씨}}}]]''' ||<(> 대^^(戴)^^ || ||<:> '''[[휘|{{{#FEDC21 휘}}}]]''' ||<(> 법흥^^(法興)^^ || ||<:> '''{{{#FEDC21 아버지}}}''' ||<(> 대석자^^(戴碩子)^^ || ||<:> '''{{{#FEDC21 생몰연도}}}''' ||<(> 414년 ~ 465년 9월 6일 || ||<:> '''{{{#FEDC21 고향}}}''' ||<(> 양주^^(揚州)^^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 || ||<:> '''{{{#FEDC21 승상 재임기간}}}''' ||<(> 464년 7월 12일 ~ 465년 8월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송(육조)|유송]]의 권신으로 [[양주(중국)#s-2|양주]](揚州)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 사람이다. 영광(永光) 연간에 월기교위(越騎校尉)를 지냈다. == 생애 == 강직하기로 이름이 있었던 대석자(戴碩子)의 아들로 위로는 두명의 형이 있었는데 그중 대법흥이 능력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453년]] [[5월 20일]], [[효무제(유송)|효무제]] 유준(劉駿)이 즉위하자 대법흥은 조정의 일을 대신 맡게 되었는데 덕분에 그는 황제의 행신(倖臣)으로써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유준은 정사를 보는 것을 포기하고 매일마다 사치와 향략에 빠졌기 때문에 조서의 실행과 상서대(尙書臺)의 사무는 모두 대법흥의 손 안에서 이루어졌다. 대법흥은 과거와 현재를 구분할 줄 알고 정무를 처리하는데 실수가 없어서 유준은 대법흥을 신임할 수 있었다. 당시 명사 소상지(巢尙之)는 비록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문학과 역사를 두루익혀 황제의 총애를 차지하였고 때문에 조정의 정무는 소상지와 대법흥이 처리하게 되었고 사소한 일은 대명보(戴明寶)가 모두 처리하였다. 소상지는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여 관련 인사를 전부 풀어주고 사람을 보는 눈이 좋아 능력을 보고 걸출한 인재를 선발하는 등 뛰어난 모습을 보였고 때문에 조정은 모두 소상지에게 의지하였다. 반면 대법흥은 이런 정무를 처리하는데 뇌물에 크게 의지하였고 그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고위관직에 오르기 힘들었다. [[464년]] [[7월 12일]], 효무제 유준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남 [[전폐제(유송)|유자업]]이 뒤를 이었는데 이미 조정의 정무 처리는 대법흥과 소상지가 맡고 있었고 여전히 모든 정무 처리는 대법흥의 손에서 이루어 졌기 때문에 민중에서는 조정에는 두명의 천자가 있는데 한명은 유자업이고 다른 한명은 대법흥이니 황제의 자리는 유자업의 것이라 할 수없다는 말까지 떠돌았으니 유자업의 입장에서 조정을 좌지우지 하는 대법흥은 좋게 보일리가 없었다. 대법흥은 유자업이 비행(非行)을 저지를 때 마다 이를 막아서고는 했는데 이것이 유자업에게 크게 거슬렸다. 유자업은 대법흥에게 죄를 물어 월기교위(越騎校尉)의 직위를 박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유자업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다시 사신을 보내 대법흥에게 자결을 명령하였고 크게 한탄하면서 자신의 두 아들에게 창고를 걸어 잠궈 가족들에게 창고의 열쇠를 신중하게 보관하도록 명한뒤 자결하니 향년 52세였다. 유자업은 대법흥이 자결하자 그의 두 아들을 살해했으며 대법흥의 관을 불태웠다. [[분류:송(남조)/인물]][[분류:414년 출생]][[분류:465년 사망]][[분류:사오싱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