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어: Atlantikwall * 영어: Atlantic Wall [목차] == 개요 == [[파일:대서양방벽.jpg]] 1942-1944년 대서양 방벽 지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 [[나치 독일]]이 만든 방어선이다. 전체 구간은 명목상으로는 프랑스의 [[비스케이 만]]에서 [[네덜란드]]와 [[독일]]의 국경까지, 실제적으로는 [[노르망디]]에서 시작하여 [[파 드 칼레]]까지 이어지는 총 연장이 3,860km에 이르는 방어선이다. == 구조 == 방어선의 특성은 가장 강력하게 방어된 파 드 칼레 지역은 [[마지노 선]]에 버금가는 콘크리트 요새선이지만, 노르망디를 비롯한 나머지 지역은 교통 요충지나 상륙하기 딱 좋은 곳에 원형 진지를 만들고 [[해안포]] 등의 직사화기나 [[토치카]]들을 배치하며, 해안의 원형 진지를 지원해줄 [[포병]] 진지를 배치한 후, 그 간격을 각종 장애물로 메꾼 방어선이다. 따라서 방벽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곳은 파 드 칼레의 일부지역에 한한다. 이때 완성된 벙커와 방어진지들은 진정 크고 아름답다. 실제로 그 당시 유적을 가보면 그때 철근 공구리 쳐놓은 방벽들이 금하나 없이 멀쩡한데다가 입이 딱벌어질 정도의 규모를 자랑한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해안에 있는 해군 [[유보트]] 기지의 경우는 원래 계획의 축소 버전인데도 그 유명한 [[영국 공군]]의 톨보이 폭탄을 방어해냈다. 1차 격벽은 뚫었지만 2차 격벽은 생채기만 조금 나고 끝났다. == 배경 == 대서양 방벽을 만들게 된 이유는 [[영국 본토 항공전]]의 총체적 실패로 더 이상 [[영국]]을 점령할 수 없으며, [[크릭스마리네]]의 사정으로 인해 해상에서 연합국 [[해군]] 전력을 차단해 상륙을 사전 저지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어졌고, 동부 전선이나 아프리카 전선등에서 독일군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프랑스에 주둔한 부대를 빼서 증원군으로 배치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연합국이 프랑스에 상륙할 때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막상 건설을 시작하고 보니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비전문가의 간섭이 많아지고,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가 기를 썼음에도 독일 내의 자원수급에 문제가 생기다보니 다량의 콘크리트, 철강이 필요한 요새의 특성상 건설이 지지부진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이런 방어선을 당장 전선에 필요한 물자를 대량으로 소모하면서 만들 필요까지는 없다는 독일군의 상당수 고위층의 의견 및 프랑스를 휴식을 하고 관광이나 하는 곳으로 여긴 현지부대의 게으름으로 인해 호들갑을 떤 것에 비하면 공사의 진척도는 바닥을 달렸다. 그러나 [[북아프리카 전선]]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면서 갈 곳을 잃어버린 [[육군]][[원수(계급)|원수]] [[에르빈 롬멜]] 장군이 프랑스에 새로 만들어진 B[[집단군]]의 사령관이 되면서 분위기가 좀 바뀌게 된다. 원래 롬멜 장군은 대서양 방벽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연합군이 상륙해서 [[교두보]]를 만들면 더 이상 이걸 밀어낼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 후 열성적인 태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상륙 24시간 내에 적군을 바다로 밀어내지 못하면 서유럽은 끝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 역할 == 막상 필요한 건설물자와 장비는 히틀러가 중시했던 파 드 칼레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채널 제도]]에 집중되었으므로 위의 두 곳은 중장갑을 갖춘 해안포 진지[* [[H급 전함]]에 들어가려 했던 [[https://en.m.wikipedia.org/wiki/40.6_cm_SK_C/34_gun|40,6cm SK C/34]]를 갔다박은,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 전사한 비스마르크 함의 함장 [[에른스트 린데만]] 해군[[대령]]의 이름을 딴 크고 아름다운 요새화 해안포 진지인 린데만 포대 등. 더 충격적인것은, 린데만 포대 비슷한 위치에 지어진 포대들은, 그 위치에서 '''영국까지 사거리가 닿았다. 그중 린데만 포대는 영국을 향해 무려 2,200발 가량의 16인치 포탄을 쏟아부었다.''' 린데만 포대같이 40,6cm SK C/34를 쓴 포대들은, '''세상에서 가장 큰 해안포대 진지'''라는 타이틀이 붙었다.]를 장비하는 등 대서양 방벽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방어진지가 되었지만 실제로 연합군이 상륙할 노르망디는 물자도 제대로 못 받아서 제대로 된 요새시설을 만들지 못했다. 해군과 육군이 섹터를 나눠 운용한 해안포 진지[* 노르망디는 육군이 맡았다.]들 중 육군 해안포 부대 운용과 진지 공사 및 경계근무에 동원된 육군 병력 상당수가 2~3선급 고령층 [[예비역]] 및 외인부대원들이라 사기와 노동의 질이 떨어졌던 점도 이에 한몫했다. 설상가상으로 롬멜 장군이 프랑스로 온 지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시간까지 촉박했으므로 롬멜 장군도 몇 가지 간이 방어시설에 추가를 한 것 외에는 크게 방어선을 강화시키지는 못했다. 근데 희한한 것은 그 히틀러가 주요 상륙지는 노르망디가 될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장군들과 [[제독]]들이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하자 히틀러는 파 드 칼레로 맘을 바꾼다. 게다가 파 드 칼레는 연합군이 노르망디 주변에 구성된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때 후방에서 습격을 받아서 점령당했고, 채널 제도는 종전 때까지 무시당한 것을 본다면 엄청난 양의 물자와 장비가 엉뚱한 곳에 사용되었다고 봐도 된다. 물론, 그 방어 시설 때문에 상륙하기 최적의 장소인 파 드 칼레를 연합군이 포기했고, 여건이 보다 좋지 않은 노르망디를 택하게 만들어 상륙 단계에서 각종 애로사항을 유발했으므로 바보짓이라 할 수는 없다. 사실 "파 드 칼레와 채널 제도에 방어력을 집중했는데 정작 연합군이 상륙한 것은 노르망디였으므로 삽질이었다" 식의 해석은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것이다. 문제는 연합군이 서유럽 탈환을 위해 유럽 본토에 상륙을 시도할 경우 나치 독일이 방어해야 할 대서양 전선의 길이가 수천킬로미터에 달했다는 것이고, 당연히 이 기나긴 전선 전체를 요새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가장 위험한(=연합군의 입장에서는 가장 상륙여건이 좋은) 지점인 파드칼레를 요새화함으로써 보다 상륙여건이 나쁜(=독일 입장에서는 덜 위험한) 지점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는 나름대로 성공한 투자라 볼 수 있다. 단, 연합군측이 ~~자기들만큼이나 멍청하게~~ 파 드 칼레가 요새화된 상황에서도 우직하게 들이밀 것이라고 착각했는지 다른 지역에 방어망을 구축하기 위한 투자에 비해 파 드 칼레 지역에 지나치게 몰빵했다는 점, 2차대전 중 유일하게 점령당한 영국 영토라는 상징성 이외에는 별 의미가 없는 채널 제도에 집착한 점(굳이 변명하자면 유럽 본토에 가까운 채널 제도를 연합군이 탈환하여 거점으로 삼는 것을 우려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어차피 대륙 본토에 직접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성공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 의미있는 우려는 아니었다.)등은 확실히 구제불능의 삽질이 맞다. 오마하 해변 같은 경우 대전차 장애물이나 상륙정 접안 저지용 [[부비트랩]] 바리케이트 등 상대적으로 구색만 갖춘 수준으로도 어느 정도 상륙부대에 피해를 강요할 수 있었다. 일각에서 방벽 때문에 상륙 이후 [[연합군]]을 한달여간 저지할 수 있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노르망디 지역에 교두보가 확보된 이후에는 바다를 향해 구축된 진지의 전투력은 전혀 무의미해지고, 실제 전사적으로도 프랑스 전역에서 연합군의 진공을 저지한 것은 내륙으로부터의 증원부대지 해안방어병력이 아니었다. == 완전히 건설되었더라면? == 만약 노르망디 지역에까지 본격적으로 방벽 건설이 되었으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가능성은 낮다. 설령 방벽이 완성되고, 또 연합군이 그 방벽에 상륙을 감행했다 하더라도 공수작전 이후 새벽에 기습상륙을 펼친 마당에 요새화된 해안진지의 유효성은 상당히 반감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정작 상륙작전을 실시한 당시 상황을 보면 완벽하게 요새화시켰다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을수도 있고 최소 어느 한 해변은 상륙실패가 발생했을 것이다. 요새선은 [[공수부대]]의 침투로 무력화되기 쉽다는 2차대전 초기 서부전역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훈은 차치하더라도, 당장 연합군의 항공폭격과 함포사격은 막기 어렵다. 항공기야 영국 본토에서 연료 낭비하며 날아와야 해서 [[루프트바페]]가 대응할 시간이 있다곤 해도. 무엇보다 당시 전황상 이탈리아 전선이 붕괴되어 가고 있던 점을 생각하면 설사 프랑스에서의 제2전선 전개를 막는다 하더라도 남부유럽 방면의 압력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어차피 앞은 [[소련]] 뒤와 중앙은 연합군이 오는 상황이라 독일은 엎어치든 메치든 결국 큰 그림에선 의미가 없는 셈이었다. 당시 독일의 입장에서 보면 연합군의 대서양 해안 상륙을 막아내봤자 패배는 막을 수 없고 오히려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대서양 상륙->연합군의 서유럽 진격을 막아낸 결과 소련군이 서유럽까지 진격했다면 이거야말로 독일 입장에선 최악의 상황이 된다. 당시 독일에게 제일 심하게 당했던 소련이 대독 문제에서 가장 엄격한 입장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괜히 당시 동부전선의 독일군 지휘관들이 소련군의 진격을 막아내면서 독일인을 서부의 연합군 점령지로 피난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결국, 동부 전선에서 소련군의 진공을 막아낼 수 없다면 대서양 전선의 방어 성공은 전략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거나 오히려 나쁜 결과만 가져오게 되는 것. == 기타 == 연합군이 대서양 방벽을 공략하기 위한 수단으로 연구한 것이 [[퍼니전차]] 시리즈였다. [[디에프 상륙작전]]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기갑 장비의 활용이 적절치 않았고, 지형 역시 기존의 전차로는 제대로 된 운용이 어렵다는 결론을 얻은 영국군은 대서양 방벽의 각각의 공략 환경에 맞춘 기갑 장비를 연구했고, 이를 대표적인 기갑 전문가이자 군내 이단아였던 퍼시 호바트 소장에게 맡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퍼니전차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영국군의 대서양 방벽 공략을 더욱 편하게 했고 상대적으로 적은 희생으로 상륙에 성공했다. 물론 운도 따랐다. 반대로 이질적인 퍼니전차의 도입을 거부하고 셔먼 DD 전차만을 도입한 미군은 사전 포격의 불충분함 + 독일군의 강한 저항에 더해 셔먼 DD의 운용 미숙으로 대부분이 상륙 전 수장되면서 화력 부족으로 많은 희생을 치르며 오마하 해변을 공략해야 했다. [[파일:external/www.robertsarmory.com/hedge3.jpg]] 연합군은 여기에 쓰인 방벽 구조물중 철근빔으로 만들어진 대전차장애물을 활용하여 '헷지 차퍼' 혹은 '헷지 블로 커터'라는 전차 장비를 제작했다. [[미합중국 육군]] 제2[[기갑]][[사단(군사)|사단]]의 커티스 컬린(Curtis G. Culin) [[하사]]가 제작했는데, 이는 노르망디 내륙에 길과 밭의 경계용도로 심어진 잡목림(전차도 돌파할수 없을 정도로 빽빽했다.)에 애를 먹어서이다. [[서든 스트라이크 4]]의 연합군 두번째 캠페인인 헤지로우 전투에서 셔먼 전차에 부착되어 등장한다. [[분류:제2차 세계 대전/계획]][[분류:나치 독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