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수당시대/황제]][[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726년 출생]][[분류:779년 사망]][[분류:뤄양시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당 황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ece5b6 '''대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돌궐 가한)] ---- [include(틀:당나라의 태위)] ---- [include(틀:역대 당 황태자)]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8E096, #F4EEB0 20%, #F4EEB0 80%, #E8E096); color: #1e1e1d,#2d2f34" '''{{{#000 돌궐 제20대 가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color: #ece5b6" '''당 제8대 황제[br]{{{+1 대종 무황제 | 代宗 武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ang_Daizong.jpg|width=100%]]}}} || ||<|2> '''출생''' ||[[726년]] [[11월 11일]] || ||[[당나라|당]] [[허난성|동도]] [[뤄양시|낙양]] 상양궁[br](現 [[허난성]] [[뤄양시]]) || ||<|2> '''즉위''' ||[[762년]] [[5월 18일]]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구선문[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사망''' ||[[779년]] [[6월 10일]] (향년 54세)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대명궁 내전[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 '''능묘''' ||[[원릉]](元陵) || ||<|4> '''재위기간''' ||'''{{{#ece5b6 당의 황태자}}}''' || ||[[758년]] [[11월 10일]] ~ [[762년]] [[5월 18일]] || ||'''{{{#ece5b6 제8대 황제}}}'''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4EEB0; font-size: .9em" {{{#1e1e1d,#2d2f34 '''제20대 가한'''}}}}}} || ||[[762년]] [[5월 18일]] ~ [[779년]] [[6월 10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이(성씨)|농서 이씨]] || || '''휘''' ||숙(俶) → 예(豫) || || '''부모''' ||부황 [[숙종(당)|숙종]][br]모후 장경황후 || || '''형제자매''' ||14남 9녀 중 장남 || || '''배우자''' ||[[예진황후]][* 안사의 난으로 피난 도중 실종되었다. 이후 당대종은 황후 자리를 공석으로 하고, 정의황후가 생전에 귀비로서 대신 후궁을 통솔했다. 사극 <대당영요>의 여주인공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의황후[* 생전에는 귀비(貴妃), 사후 황후의 시호를 받음] || || '''자녀''' ||20남 20녀 || || '''종교''' ||[[불교]] || || '''작호''' ||광평군왕(廣平郡王)[br]→ 초왕(楚王) → 성왕(成王) || || '''묘호''' ||'''[[대종]](代宗)''' || || '''존호''' ||보응원성문무효황제[br](寶應元聖文武孝皇帝) || || '''시호''' ||예문효무황제(睿文孝武皇帝) || || '''한호''' ||천가한(天可汗) || || '''연호''' ||광덕(廣德, [[763년]] ~ [[764년]])[br] 영태(永泰, [[765년]] ~ [[766년]])[br]대력(大歷, [[766년]] ~ [[779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당(통일왕조)|당나라]]의 제8대 황제. [[당숙종]] 이형의 장남이며[* 단, 서장자이다. 당나라 중기에는 서장자의 계승이 일반적이었다.], 어머니는 추존된 장경황후 오씨이다. 휘는 예(豫)이며, 초명은 숙(俶)이었다. 묘호는 [[대종]](代宗)이었으며, [[시호]]는 예문효무황제(睿文孝武皇帝)로 줄여서 예황제(睿皇帝)[* 당대종의 황후가 예진황후이다. 대종의 시호는 일반적으로 '예'가 쓰인다. 효자와 관련된 시호로는 특이 케이스이다.]였다. 능호는 원릉(元陵)이다. == 생애 == === 황제 이전의 삶 === [[황태손]]의 지위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광평왕 '''이숙'''(廣平王 '''李俶''')으로 살았다. [[안사의 난]]으로 아버지가 분조를 이끌고 영무에서 즉위할 때 동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천하병마(天下兵馬)원수로 임명되었고, 757년 9월 [[시안(도시)|장안]] 및 [[낙양]]의 양경을 함락할 때 초왕(楚王)에 봉해졌다가, 758년 성왕(成王)을 거쳐 그해 5월 [[황태자]]가 되었다. 이때 이름을 '''이예'''(李豫)로 고쳤다. [[안록산의 난]]으로 장안을 공략할 때 [[위구르 제국|회흘]]의 친왕 엽호(야브구)가 파견되자 그와 [[의형제]]를 맺겠다고 말할 정도로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당숙종은 원군을 하루빨리 얻어내기 위해 [[시안(도시)|장안]]을 수복하면 [[황금]]과 [[비단]], [[자녀]]의 약탈을 허용한다고 했다. 이때 이예가 절을 하며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지금 처음으로 [[시안시|서경]](장안)을 얻었는데 만약 갑자기 [[포로]]로 잡고 약탈하면 [[뤄양시|동경]](낙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역적]](안경서)을 위하여 굳게 지켜서 다시 차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니, 바라건데, 동경에 도착하면 마침내 약속대로 하시지요." 이예는 이렇게 엽호를 달래어 맞절을 받고, 장안의 약탈을 막아 칭송을 받았다. 훗날 동도 낙양을 수복한 후에는 부호들에게서 비단 10,000필을 거둔 후, 그걸 위구르군에게 줘서 대약탈을 막았다. 하지만 [[사사명의 난]]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부황 숙종의 말년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의붓어머니였던 장황후는 환관 이보국과 함께 전횡을 일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과 사이가 좋았고, 군재가 있었던 이복동생 건녕왕 [[이담(당)|이담]](建寧王 李倓)이 모함으로 죽자 태자 이예는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얼마 뒤 장황후와 환관 단항준, 이복형제인 월왕 이계(越王 李係)[* 《[[구당서]]》와 《[[신당서]]》에 따르면 장황후는 월왕 이계에게 "나를 도와주면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을 했는데, 월왕은 흔쾌히 수락했다.]가 이보국과 태자 이예를 함께 죽이려고 했으나, 이들은 이보국에게 발각되어 유폐되었으며('''보응정변''') 숙종이 이 충격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할아버지 [[당현종]]과 아버지 숙종이 급서한 상황에서 그는 황제로 즉위했다. 이때가 762년 5월 23일의 일이었다.[* 즉위식 날짜로 추정.] === 환관 이보국을 제거하다 === 당대종은 옹립의 공신인 이보국을 처음부터 위험 인물로 적대시했지만 이보국이 [[금군]]([[친위대]])의 지휘권을 잡았기 때문에 쉽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이때문에 일단 이보국을 '''상보'''(尙父)[* '''상부'''라고 읽지 않는다. 서주의 [[태공망]], 진나라의 [[여불위]] 등이 왕에게서 받았던 호칭인데 대략 '''"너님 울 아부지(선왕)랑 동급임ㅇㅇ"''' 정도의 뜻이다. 그런데 후한 말기의 간신 [[동탁]]은 자칭했다.]라 칭하며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모든 업무에 있어 [[자문]]을 듣는 등 그를 추켜세워서 안심시켰다. 또한 6월 4일에는 이보국이 꿈에도 바라지 않았던 [[삼공]]의 지위([[사공]])와 [[재상]]직(중서령)까지 주기도 했다. 이보국은 정말 [[재상]]이 되고 싶어했던 모양이다. 당숙종이 붕어하기 이전인 3월에는 전에 자신이 재상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소화를 파직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이보국의 세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7일 만에 환관 정원진이 정변을 일으키자 이보국은 행군사마와 병부상서직에서 파직되어 군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대종은 정원진을 대판원수행군사마로 삼고, 이보국을 황궁에서 내보내 밖에 있는 집에 살게 했으며 13일에는 중서령에서도 파직시켰다. 대종은 그에게 박육왕(博陸王)을 내려 달랬고, 이보국도 자신이 실각되었음을 인정했다. 이보국은 벽지로 유배되었으나 결국 그해 10월 [[암살]]되었다. 이보국의 시체는 이상하게도 머리와 오른팔이 사라졌는데, 대종은 그에게 후한 장례를 내려주었다. === 환관 정원진의 세도 === '''늑대가 가면 호랑이가 오는 법'''이다. 환관 정원진의 세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회남의 절도사였던 내진이 숙종의 부름에도 오지 않자 오랫동안 의심했다. 결국 당 조정이 그의 권한을 줄이려고 하자 762년 8월에 조현하고 용서를 빌었다. 대종은 내진을 후대했으나, 환관 정원진은 내진이 사조의 측과 짜고 왕중승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참소했으며, 결국 이듬해 763년 1월 28일, 내진은 관직이 깎이고 파주로 유배형을 받았는데 도중에 처형당했다. 이런 수작을 부린 탓에 절도사들은 당 조정을 믿지 않고 의심하며 원한을 품었으므로, 이들의 분노를 누그러트리고자 대종이 절도사직을 뿌려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런 정원진의 세도와 횡포는 서쪽의 토번이 침공하여 그가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 위구르의 성장과 안사의 난의 진압 === 한편 대종이 즉위하고 5년 사이 [[위구르 제국]](회흘)은 북방의 최강자로 거듭났다. [[연나라]]의 황제를 자칭하는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와의 대치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사조의는 당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 것을 틈타 위구르와 손을 잡으려고 했다. 중사 유청담이 >'''"(대종 황제는) 바로 예전의 광평왕이었으며, 엽호와 함께 양경을 수복한 분입니다."''' 라고 위구르를 설득해도 별로 먹히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위구르군이 사조의를 지원하려고 군대를 파견하자 전중감 약자양을 파견해 위구르 측을 접대하게 했다. 약자양의 접대를 받은 위구르 측은 선대 [[카를륵 카간|갈륵가한]](葛勒可汗)의 [[국구]](장인)인 삭방절도사 [[복고회은]]을 만나보기를 요청했다. 복고회은은 손쉽게 위구르를 설득했고, 재물을 미끼로 위구르군이 진군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당대종은 옹왕 이괄(雍王 李适)[* 훗날의 [[덕종(당)|당덕종]]이다.]을, [[숙종(당)|숙종]]이 자신에게 그랬듯이 천하병마원수로 삼고, 복고회은을 보좌역[* 실질적인 총사령관이나 다름없다.]으로 돕게 했다. 그러나 이때 옹왕은 위구르의 [[뵈귀 카간]]으로부터 >'''숙부인 가한에게 춤을 추라''' 는 모욕을 당했고, 반대하던 당의 신하들이 채찍 100대를 맞다가 죽어나가는 수모를 당했다. 그리고 소각사 전투의 승리로 [[사사명]]에게 빼앗겼던 동도 [[낙양]]을 수복하자, 5년 전 대종이 말했던 대로 위구르군의 대[[약탈]]극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백마사]]로 몰려든 백성들에게 불을 질러 무려 10,000명이나 죽었다. 역적 처형을 빙자한 당 본군의 약탈도 만만치 않았으되, 옹왕[* 훗날의 덕종]에게는 이것이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았다. 여하간 [[안사의 난|대란]]은 763년 1월, [[사조의]]가 자결하면서 끝이 났다. 대종은 [[사사명]]과 같은 사례를 막기 위해 투항한 모든 [[군벌|군웅]]에게 하북의 모든 지역을 나눠주어 [[절도사]]로 봉했다. 멋대로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를 사칭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는 훗날 '''[[번진]]이 난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종은 그해 7월 연호를 '광덕'(廣德)으로 고치고, '''보응원성문무효'''(寶應元聖文武孝)라는 존호를 받았다.[* 이때 아버지 숙종이 11월을 정월로 삼았듯, 4월을 정월로 했다는 말이 있다.] === 토번군의 장안 함락과 환관 정원진의 실각 === 명장 [[가르친링]] 사후 [[토번]]은 약해졌지만, [[안사의 난]]이 벌어지는 와중 당나라에 열세였던 국력을 회복하고, 장안 서쪽 100리까지 영역을 넓혔다. 이런 상황에서 선제인 숙종은 침략을 막고자 매해 [[비단]] 50,000필을 바쳤는데, 대종이 즉위하면서 이를 그만두었다. 이에 새로 즉위한 14세의 [[토번]] 왕 [[적송덕찬]](赤松德贊)은 격노했고, 이를 빌미로 당나라의 영토를 넘보았다. 763년 토번군이 대진관으로 들어와 '''하서와 농우의 모든 당나라의 영토를 점령한 것'''은 당나라 입장에서는 [[서역]]으로 가는 목구멍을 막은 격으로 사실상 전역이 상실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토번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해 10월, [[다짜뤼공]]이 [[무려]] '''200,000명'''의 대군을 동원해 검남[* [[쓰촨성]] 일부]과 [[관중#s-4]]으로 밀고 들어왔다.('''광덕지변''') 결국 10월 7일 대종은 섬주(陝州)로 피난했고, 이틀 뒤 9일 토번군은 비워진 수도 [[시안(도시)|장안]]에 입성하여 허수아비 황족인 [[이승굉]]을 당나라의 황제로 세웠다. 하지만 부원수 [[곽자의]]가 돌아와 맹활약하여 토번군은 12일(혹은 15일) 만에 장안성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엄청난 활약은 [[곽자의]] 항목 참조. 참고로 그가 초기에 움직일 수 있었던 병사는 고작 수십, 수백 명이었고, 토번군을 구원군 소문으로 도망치게 할 때 그가 모은 병사는 고작 수천 명이었다.[* 토번군 진영에 풍토 [[전염병]]이 돌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미 대약탈이 끝난 상황이기도 했다.] 한편 토번군의 침공이 저지되자 그동안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던 환관 정원진은 11월 2일에 삭탈관직되어 낙향을 명령받았는데, 계속 복권할 기회를 노리고 장안을 떠나지 않자 유배형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전란은 끝나지 않았다...''' === 복고회은의 난과 명장 곽자의의 대활약 === [[토사구팽]]을 두려워하던 대녕군왕(大寧郡王) / [[삭방절도사]] / [[중서령]] [[복고회은]]은 [[태원]]의 [[하동절도사]] 신운경과 갈등을 빗다가 조정의 알현을 거절하고 764년 1월, 기어이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곽자의]]의 명성에 사기가 떨어진 삭방군을 이끌고 [[태원]]과 유차를 공격했으나 실패하니 영무로 들어가 '''[[토번]]과 [[위구르]]의 대군 120,000명을 불러버렸다.'''(764년 8월) 이런 상황에서 7월 [[이광필]]이 사망했지만, 곽자의를 다시 파견한 당나라는 한 번의 기습으로 12만 대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10월 8일) 하지만 복고회은은 포기하지 않았다. 765년(영태 원년) 9월 다시 위구르 · 토번(100,000명) · [[토욕혼]] · [[탕구트]][* 당항(黨項)] · 노랄 등으로 이루어진 5국 연합군(...)을 불러왔다...[* 그런데 이 침공은 역설적으로, 주변 민족이 당나라의 황제를 여전히 [[가한]](可汗)으로 취급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대종을 천가한(天可汗)이라고 부른 마지막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학자에 따라선 곽자의가 죽은 [[덕종(당)|당 덕종]]의 건중 2년(781년)까지는 당나라의 황제가 천가한(天可汗)을 겸임했다고 보기도 한다.] 근데 정작 복고회은은 남하하던 도중에 병사했고, 그저 [[약탈]] 집단으로 변신한 5국 연합군이 그나마 맛이 가버린 복고회은 잔당을 무시하고 그대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곽자의]]는 하중에 있어 봉천을 비웠고, 대종도 [[금군]]을 거느리고 나서야했다. 선봉의 토번군 때문에 병사 수천 명만 남은 [[장안]]이 함락 직전에 몰리자 금군을 장악한 환관 어조은 등이 하중으로 [[파천]]하기를 건의[* 실상은 반 협박이었다.]했으나 곽자의가 상소하여 이를 물리쳤는데, 과연 9월 하순에 큰 비가 내려 토번군은 후방으로 물러났다. 다시 토번이 10월에 위구르와 연합하여 곽자의가 있는 경양까지 진격해 포위하자(10월 8일), '''곽자의가 단기필마[* 위구르군 진영에 가서는 '''스스로 무장 해제까지 했다!''']로 위구르군 진영으로 찾아가 설득해 당나라와 손을 잡도록 했다.''' [[당나라군|당군]]과 연합한 위구르군은 10월 15일 토번군을 격파하고, '''토번의 약탈물을 획득했으며''' 이에 대종은 위구르에게 비단 100,000필을 내리고, 약속대로 위구르 카간의 국구였던 복고회은의 잔당을 관대하게 용서함으로써 반란을 진압했다. 이때 [[노익장|노장]] 곽자의의 나이가 70세, 대종이 40세였다. === 끝나지 않는 전란 === '''하지만 여전히 내란은 끝나지 않았다.''' 사천에서는 [[절도사]]를 자칭하는 이들의 분란이 끊이지 않았고, 동화주지사 [[주지광]]이 767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다.('''주지광의 난''') 2월 6일, 곽자의는 주지광 진압과 뒷처리를 마무리짓고 장안으로 돌아와 조현했다. 이때 대종은 당대의 [[권신]]이었던 원재, 왕진, 환관 어조은 등에게 명령하여 돌아가면서 집에서 술자리를 열게 했는데, 한 번 모일 때마다 소모된 비용이 100,000민(당시 통화 단위)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이렇게 곽자의가 [[시안(도시)|장안]]에 있을 때 일어난 유명한 에피소드가 [[고사성어]] '''장롱작아(裝聾作啞)'''이다. 대종은 딸인 승평공주(昇平公主)를 곽자의의 아들인 곽애(郭曖)와 결혼시켰는데, 어느 날 곽애와 승평공주가 부부싸움을 하다가 화가 난 곽애가 승평공주에게 >"네가 의지하는 건 네 아버지가 천자이기 때문이냐? '''나의 아버지는 천자를 가볍게 보아 천자를 안 하는 것'''이다." 라고 소리쳤다. 승평이 이를 부황인 대종에게 고하니 대종은 >'''"네 남편의 말이 맞다, 저들이 천자가 되고자 한다면 천하는 저들의 것이다."''' 라며 딸을 타일러 보냈고, 곽자의가 후에 황제에게 사죄하고, 아들 곽애에게 곤장을 쳤다. 이때 대종이 >"바보가 아니고 귀머거리가 아니면 가장 노릇을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소."(鄙諺有之, 不癡不聾, 不作家翁) 라며 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곽자의를 달랬으니, [[농아|귀머거리로 꾸미고 벙어리인 척]] 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768년 토번이 3년 만에 다시 1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노략질를 하러 왔으나, 곽자의가 봉천에서 출진해 또다시 토번군을 연파했다. 이 와중에 곽자의를 참소하던 환관 어조은이 재상 원재와 갈등하다가 살해당했으나(770년 3월), 원재 역시 크게 부패하며 전횡을 일삼았다. 원재와 그에 빌붙은 왕진은 777년에야 대종에게 [[숙청]]당했다. 773년 8월, 토번은 160,000명의 대군으로 또 쳐들어왔는데, 나이 어린 삭방병마사 혼감이 장수들과의 불화로 1차 저지에 실패했으나 곽자의가 혼감을 다시 믿고, 경원절도사 마린과 함께 다시 공격하게 하여 물리쳤다. 775년 9월 토번이 또 침공했는데, 봉상절도사 이포옥과 마린에게 패배해 물러갔으며, 776년에도 침공했으나 증병에 성공한 곽자의가 쉽게 이들을 격퇴했다. 하지만 기어이 [[서역]]과 [[당나라]]를 이어주던 실날 같던 [[난주]]가 함락당했다. 778년 위구르가 다시 적대적으로 돌아서 당나라를 약탈했으나, 5년 만에 돌아온 혼감이 이들을 막아냈다. 토번이 위협하고 있었던 775년(대력 10년)에는 절도사 진압 문제에 손을 대기 시작했지만, 여기서도 굴욕을 당했다. 당시 하북의 절도사 중 최강의 힘을 자랑하던 것은 천웅군절도사 전승사였는데, 전승사는 자신의 힘을 믿고 주변 절도사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여 여러 절도사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 결과 치청절도사 [[이정기]]와 성덕절도사 이보신을 축으로 하여 전승사에 대한 토벌령을 내려달라고 조정에 청원하자 대종은 이를 절도사 진압의 기회로 여기고 주변 9개 절도사들에게 전승사에 대한 토벌령을 내렸다. 처음에는 잘 되는 듯 했다. 이정기와 이보신은 둘 다 천웅군 번진에 못지 않는 거대 번진의 절도사였고, 따라서 사방에서 공격받은 전승사는 얼마 못가 많은 영토를 상실했다. 그런데, 전승사를 적당히 두들기고 영토도 뺏었다 싶자, 저 둘이 전승사와 사돈 관계를 맺고는 조정에 전승사를 용서해 달라고 청원했다. 그리고 토벌에 참가했던 다른 절도사들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의사를 보이면서 전승사와 동맹을 맺고는 '''역으로 조정을 압박하여, 결국 그 다음해인 776년에 사면령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이는 당 조정의 입장에선 큰 굴욕이었다. 대부분의 군사력이 토번군의 대규모 침공 저지에 돌려져 있었던 당나라의 입장에선 절도사들의 반기를 무력으로 진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파란만장한 치세를 보냈던 대종은 779년 5월 21일(혹은 23일)에 붕어했는데, 향년 54세였다. 죽기 직전에 곽자의를 섭총재로 삼아 [[덕종(당)|덕종]]을 보좌해 줄 것을 명령하며 후사를 부탁하니, 곽자의는 2년 뒤 최고의 자리에서 영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 평가 == 황태자 시절에는 군재를 제법 보였지만, 제위에 오르고 나서는 호구 같은 면모들을 피할 수 없었던 황제였다. 가히 명장 [[곽자의]]가 아니었으면 당나라의 사직이 지탱되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으며 나중에는 거의 '''"[[MB가 다 해주실 거야|곽자의 님이 다 해주실 거야]]!!"''' 수준으로 제국을 다스렸다.[* 그리고 곽자의는 정말로 다 해줬다...] 그래도 어려운 처지에서 외적들을 스스로 몰아낸 것, 조공을 바치지 않은 것, 권신들을 차례로 숙청한 것 등에서는 아버지 숙종보다는 조금 나은 정도였다. 거기다 당나라를 구해낸 영웅인 곽자의의 등 뒤에 칼을 꽂지 않는 행적 덕에 사직을 말아먹지 않은지라 이정도만 해도 평타는 쳤다라고 해주는 이들도 상당하다. 실제로 훌륭한 인재에게 적당한 자리를 주고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해주는 것도 지도자의 능력이니 곽자의를 밀어주고 끝까지 신뢰해 준것은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 그러나 이런 전란의 와중에 대종은 [[불교]]에 심취하는 바람에 불교 사찰에 많은 토지와 면세 혜택을 주기도 했다. 이때문에 당나라의 재정이 한층 더 악화되었다. == 대중매체에서 == * 2017년 방영된 중국 드라마 <대당영요>의 주인공으로, 광평왕이었던 시절부터 황제 등극까지의 내용을 다루었다. 또한 예진황후 심씨와의 러브스토리도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9338139&memberNo=33180239|대당영요]] * 2010년 방영된 중국 드라마 <양귀비비사>에서는 아이일 때 잠시 등장한다. 할아버지이자 황제인 현종에게 황실에 대한 세간의 소문을 진언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곧은 성격을 가진 것으로 표현되었다. *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의 769년 시나리오에서 등장하는 [[중국]]의 황제가 바로 당대종이다. 근데 이 게임의 시스템상[* [[중국]]이 혼란 상태에 빠졌다든가, 플레이어가 자기 가문의 사람을 중국의 황제로 옹립하기 위해 [[안서도호부]]를 상대로 건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즉각 왕조가 갈아치워지고 황제가 폐위된다.], 본인의 대에서 나라가 망하고, 대종 본인도 제위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 [include(틀:신당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