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발해 국왕)] [include(틀:후삼국시대 군주)] ||<-3><:>'''{{{#FFD700 발해 13대 가독부[br]{{{+1 {{{#FFD700 大玄錫 | 대현석}}}}}}}}}'''|| ||<:>'''{{{#FFD700 시호}}}'''||불명 || ||<:>'''{{{#FFD700 성씨}}}'''||대(大) || ||<:>'''{{{#FFD700 휘}}}'''||현석(玄錫) || ||<:>'''{{{#FFD700 생몰연도}}}'''||820년대 전후[* 아버지인 대건황이 790년대 이후로 추정되므로 대현석은 많이 잡으면 820년대 전후로 추측이 가능하다.] ~ 882년 또는 894년 || ||<:>'''{{{#FFD700 재위기간}}}'''||871년 ~ 882년 또는 894년(11년 혹은 23년) || [목차] [clearfix] == 소개 == [[발해]]의 제13대 가독부. 대건황의 [[아들]]. [[시호]]는 알려지지 않았다. 시호가 경왕(景王)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신라 [[효소왕]] 때 발해가 건국됐고, (신라) [[경애왕]] 때 (발해가) [[거란]]에게 공격당해 망했다.’라는 《[[동국사략]]》의 구절을 [[한국사]]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부족했던 [[일본]] 학자들이 ‘(발해가) 경왕과 애왕 때 거란에 공격당해 망했다.’라고 잘못 해석해서 같은 시기 신라 왕이었던 경애왕과 혼동해서 생긴 사건이다. 정확히는 신라 ‘경애(景哀)왕’에서 앞의 ‘경(景)’을 대현석, 뒤의 ‘애(哀)’를 [[대인선]]에 대입한 것이다. 한때는 [[교과서]]에도 이 오류가 들어있다가 현대에는 빠졌고 [[이유립]]도 여기 낚여서 《[[환단고기]]》의 <발해 왕 계보>에서 대현석을 경황제(景皇帝)라고 써버림으로써 자폭하고 말았다. 대현석과 대인선 사이에 빠진 왕인 [[대위해]]는 당시 유일하게 《당회요》(唐會要)라는 책에만 기록된 인물이어서 왕인지도 몰랐던 것이다. 《환단고기》에서는 대현석이 천복(天福)이라는 [[연호]]를 썼다고 기록했지만 신빙성 없는 기록이다. == 생애 == [[대인수]], [[대이진]], [[대건황]]의 약 60여 년간 잠잠했던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이 때부터 다시 심화되었다. 대현석 재위 후기 [[신라]]와 발해 사이에 [[보로국]]과 [[흑수국]]이 있었고, 이들이 [[헌강왕]] 대의 신라와 교섭을 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면 발해가 혼란에 빠지면서 [[함경도]]와 [[연해주]] 일대에 주거하던 [[말갈]]족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며 [[영토]]의 상당수를 상실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현석 시기를 기점으로 융성하던 발해가 쇠퇴하기 시작한다'''. 사후 아들 혹은 친척인 대위해가 [[왕위]]를 승계하였는데 《[[신당서]]》의 서술 범위가 906년까지인데도 불구하고 대현석 이후의 발해 국왕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과 882년을 기점으로 발해의 주류 세력이 정당성의 양씨에서 문적원의 배씨로 교체된다는 점에 근거하여 대현석이 [[정변]]에 의해 [[시해]]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러한 주류 세력 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대위해]] 문서에 자세히 적혀 있다. 대현석부터는 군주의 즉위년도와 생몰년도가 정확하지 않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871년~882년 동안에는 정당성의 양씨가 하정사를 맡았으나 882년부터 발해 [[멸망]] 때까지 문적원의 배씨가 하정사 지위를 독점하기 때문에 882년에 비정상적으로 왕계가 넘어가고 대위해-대인선 계열 군주가 즉위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 관련 기록 == 877년, 양중원(揚中遠)을 비롯한 105인으로 된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 내치, 외치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남아있는 기록으론 >'''虔晃子也, 懿宗咸通中, 三遣使朝唐.'''(건황자야, 의종함통중, 삼견사조당) >건황의 아들이다. [[당의종|의종]] 함통 연간(860년 ~ 874년)에 세 번 사신을 보내 당에 조공하였다. >---- >《발해고》 ---- >이진이 죽고 동생 건황이 즉위했다. (건황이) 죽고 현석(玄錫)이 즉위하였다. 함통(咸通) 연간(860년 ~ 873년)에 3번 조공하였다. >彝震死, 弟虔晃立. 死, 玄錫立. 咸通時, 三朝獻. >---- >《신당서》 '''이게 전부.''' 이후에 나오는 기록은 대현석의 이야기가 아니라 통론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 연표 == * 871년 겨울, 정당성 좌윤 상진장군 양성규 등 105명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 872년, [[오소도]]가 당의 [[빈공과]]에서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 876년 겨울, 공목관 양중원 등 105명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 882년 겨울, 문적원소감 배정 등 105명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 886년, 남부 국경의 보로국과 흑수국이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였다. * 894년, 대현석이 죽고 대위해가 즉위하였다. [[분류:발해 국왕]][[분류:89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