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당나라의 장수]][[분류:733년 출생]][[분류:791년 사망]]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목차] == 개요 == 戴休顔 (733 ~ 791) [[당나라]] 중기의 장수로 하주(夏州) 출신. == 생애 == 대휴안의 집안은 대대로 무예를 숭상했으며 대휴안은 패기와 담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또한 군중에서 용맹함과 책략으로 칭송을 받았다. 대력(大曆) 연간[* 766년 ~ 779년]에 [[곽자의]]의 부장으로 기용되어 당항강을 정벌하고 하곡(河曲)을 안정시켜서 시태상경(試太常卿)으로 임명되고 제음군공(濟陰郡公)에 봉해졌으며 함녕군왕(咸寧郡王)으로 진봉되고 삭방절도부사(朔方節度副使)를 겸임하였다. 또한 빈주(邠州)의 성을 축조한 공로로 염주(鹽州) 자사로 승진했다. 783년, [[주차(당나라)|주차]]가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덕종(당)|덕종]]과 신하들이 봉천(奉天)으로 대피한 가운데 대휴안은 3,0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밤낮으로 봉천으로 진군하였으며 덕종은 대휴안을 칭찬하여 그에게 실봉 200호를 내렸다. 그는 혼감, 두희전, 한유괴 등과 함께 반군의 공격을 방어하여 전공을 세웠다. 784년, 이회광의 반란으로 인해 덕종이 다시 양주(梁州)로 대피하자 대휴안은 봉천의 유수를 맡았다. 이때 대휴안은 다음과 같이 호령하였다. >이회광이 이미 반란을 일으켰다! 이회광은 함양(咸陽)을 점령한 뒤 대휴안에게 사자를 보내 그를 부추기려고 했으나 대휴안은 이회광의 사자를 참수한 뒤 군대를 정도하여 봉천을 수비하였다. 이회광은 대휴안의 움직임에 매우 놀라서 결국 경양(涇陽)을 거쳐 밤에 달아났다. 대휴안은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 봉천행영절도사(奉天行營節度使)로 임명되었다. [[이성(당)|이성]]이 장안을 수복한 뒤 대휴안은 혼감, 한유괴 등과 함께 주차의 군대를 물리치고 3,000명을 참수하였으며 중위교(中渭橋)까지 추격하다가 연추문(延秋門)에 주둔하였다. 이성이 장안을 완전히 수복한 뒤 대휴안은 혼감, 한유괴 등과 함께 주차를 추격했으며 주차의 반란이 평정된 뒤 검교우복야(檢校右僕射)가 더해지고 식읍 600호를 받았다. 대휴안은 좌용무군통군(左龍武軍統軍)으로 임명되었고 791년[* 구당서 덕종본기의 기록. 대휴안 본인의 열전에서는 785년에 죽은 것으로 나온다.]에 죽어서 양주(揚州) 대도독으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