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덕수궁)]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683235,#683235 '''덕수궁 함녕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대한제국 황궁의 내정전)] ---- [include(틀:조선 왕궁의 내정전)] ---- ||<-5>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보물/801~1000호|{{{#fff 대한민국의 보물}}}]]''' || || 819호 ||<|2> ← || '''820호''' ||<|2> → || 821호 || || [[덕수궁 중화전]] 및 [[덕수궁 중화문|중화문]] || '''덕수궁 함녕전''' || [[종묘#s-4.5|종묘 영녕전]] || ---- }}} || ----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보물|{{{#f39100 대한민국 보물 제820호}}}]]''' || ||<-2> {{{#fff {{{+1 '''덕수궁 함녕전'''}}}[br]{{{-1 德壽宮 咸寧殿}}}}}}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덕수궁 함녕전,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 '''{{{#fff 수량}}}''' || 1동 || || '''{{{#fff 지정연도}}}''' || 1985년 1월 8일 || || '''{{{#fff 제작시기}}}''' || [[대한제국]], 1897년 창건, 1906년 중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덕수궁 함녕전.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덕수궁_함녕전_전경1.jpg|width=100%]]}}} || || {{{#683235 '''함녕전[*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8193&ccbaKdcd=12&ccbaAsno=08200000&ccbaCtcd=11|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br][[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15659&ccbaKdcd=13&ccbaAsno=01240000&ccbaCtcd=11|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목차] [clearfix] == 개요 == {{{+1 德壽宮 咸寧殿}}} [[덕수궁]]의 [[황제]] 침전이다. 황제도 [[사람]]이니만큼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한데 함녕전이 바로 그런 곳이다. 쉽게 말해 황제의 [[집]]. [[정문]]인 [[덕수궁 대한문|대한문]]과 [[정전]]인 [[덕수궁 중화전|중화전]] 사이에 있다. [[덕수궁 덕홍전|덕홍전]]과는 한 영역이다.[* [[덕수궁 덕홍전|덕홍전]]이 서쪽에, 함녕전이 동쪽에 있다.] == 이름 == ‘함녕(咸寧)’ 뜻은 ‘모두(咸)가 평안하다(寧)’이다. 《주역(周易) - '건(乾)' 괘 단사(彖辭)》에 나오는 “만물에서 으뜸으로 나오니, 만국이 모두 평안하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http://blog.daum.net/solji-k/17205095|#]] 열강이 각축하던 시절에 국가 간에 평화롭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듯 하다. ‘함'''령'''전’으로도 아는 사람들이 많다. ‘[[寧]]’을 '령'으로 읽고 쓰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듯 하다.[* 대표적인 예로, [[인명]]으로는 [[무령왕]](武寧王), [[효령대군]](孝寧大君), [[이어령]](李御寧) 등을, 이외에는 [[보령군]](保寧郡), [[고령가야]](古寧伽倻), [[경희궁 태령전|태령전]](泰寧殿)을 들 수 있다. 자세한 것은 '[[寧]]' 문서 참조.] 그러나 그것은 [[활음조 현상]] 때문이다. '寧'의 앞 글자에 받침이 없는 경우 '녕'으로 발음하기 힘들어 편의상 그렇게 부르고 쓰는 것일 뿐이다. 함녕전의 경우, '녕' 앞의 글자 '함'에 받침이 있기 때문에 원래대로 함녕전으로 읽는 것이 맞다. == 역사 ==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본래 [[성종(조선)|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다가 [[임진왜란]] 당시 [[선조(조선)|선조]]가 잠시 머물던 [[궁전|행궁]]이었다. 그나마도 [[인조]] 이후엔 [[덕수궁 즉조당|즉조당]]과 부속 건물 몇 채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전부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주면서 약 270년 간 비었다. 그러다 1896년([[건양]] 원년)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대한제국)|고종]]이 환궁할 곳으로 경운궁을 택하여, 경운궁을 제대로 된 [[궁궐]]로 만드는 공사를 시행했다. 이 때 [[임금]]의 정식 침전으로 지은 것이 함녕전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897년 함녕전.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임인진연의궤 - 함녕전도.png|width=100%]]}}} || || {{{#683235 '''1897년 완공 직후의 함녕전'''}}} || {{{#683235 '''《임인진연의궤》[* '임인진연'은 '임인년(1902년)의 궁중 잔치'란 뜻이다. 이 연회는 고종이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열렸다.]에서 나타나는 1902년 경의 함녕전 그림'''}}} || 이 때 지은 [[건물]]들은 대부분 신축이었으나, [[국가]] [[재정]] 상황 때문에 [[경복궁]]의 [[전각]]을 옮겨온 것도 많았다. 함녕전이 그런 경우로, 경복궁의 만화당(萬和堂)을 옮겨 지었다.[* 경복궁 북동쪽의 대비전의 별당 건물로 추정된다.] [[황제]]의 침전인만큼 빨리 공사를 시작했지만, 1897년([[건양]] 2년) 2월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이 환궁한 후에도 완공을 못하여 고종은 한동안 [[덕수궁 석어당|석어당]]에서 머물렀다.[* [[덕수궁 즉조당|즉조당]]에서 머물렀단 이야기도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사실 환궁 전 신하들이 권유하긴 했으나, 즉조당은 거처로 삼기엔 너무 좁았으며 무엇보다 [[경복궁 선원전]]에서 옮겨온 [[어진]]들을 임시로 모셨기 때문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거절했다.[[https://blog.naver.com/minsu977/221256780196|#]]] 그 해 6월, 함녕전의 상량문 제술관이 임명되었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za_13406019_002|#]] 함녕전에서 [[신하|신료]]들을 접견한 것으로 보아[[http://sillok.history.go.kr/id/kza_13409030_001|#]] 대략 7월에서 8월 경에 공사가 끝난 듯 하다. 완공 이후 고종은 함녕전을 자신의 주 처소로 삼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함녕전 의궤.png|width=100%]]}}} || || {{{#683235 '''《경운궁중건도감의궤》의 함녕전 모습[* [[https://www.gogung.go.kr/ancientBooksView.do?bbsSeq=6157&bizDiv=2|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 1904년([[광무]] 8년) 4월에 함녕전의 [[온돌]] [[수리]] [[공사]]를 하고 [[아궁이]]에서 불을 때다 대화재가 일어났다. [[경운궁]] 주요 전각이 불 타 사라졌고 화재의 발원지였던 함녕전도 당연히(...) 잿더미로 변했다. 그해 12월에 바로 복구 공사에 들어가 2년 뒤인 1906년(광무 10년)에 재건했다. 이 때 기존의 함녕전과 약간 모습이 달라졌다. 함녕전 서쪽에 위치했던 행각을 [[담|담장]]으로 바꾸고, 서북쪽에 온돌방 4칸을 추가로 지었다. 함녕전이 소실된 이후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덕수궁 중명전|중명전]]을 집무실 겸 침전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06년([[광무]] 10년)에 다시 지었어도 그 무렵 있었던 여러 [[헤이그 특사|역]][[정미 7조약|사]][[대한제국 군대 해산|적]] [[기유각서|격]][[경술국치|변]]때문에 함녕전으로 돌아갈 시기를 놓치고[* 그 유명한 [[을사조약]]이 바로 [[덕수궁 중명전|중명전]]에서 체결되었다.] 계속 중명전에서 거주했다. 1907년([[융희]] 원년)에 [[순종(대한제국)|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함녕전에 잠시 머물긴 했지만, 얼마 안있어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移御. 임금이 이사가다.] 결국 고종이 공식적으로 아주 돌아온 것은 [[경술국치|이미 국권을 뺏긴 후인]] 1912년 10월이었다. 이후 이왕직[* 李王職.]에서 고종의 편의를 봐준답시고 행각들에다 대기실, 사무실을 설치하는 등 주변 모습을 많이 바꾸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죽음|승하]]한 후 함녕전을 빈전과 혼전[* 혼전(魂殿): 임금과 왕비 신위를 임시로 봉안하던 곳. 빈전(殯殿):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곳.]으로 사용했고 이후 전호(殿號)를 효덕(孝德)으로 정하여 약 1년 간 함녕전을 '효덕전(孝德殿)'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후 주인없이 건물은 비었고, 1938년 일제의 [[덕수궁]] [[공원|공원화]] 계획으로 [[관광지]]로 변했다. 2009년 [[문화재청]]에서 일제가 변형한 행각을 [[복원]]했고 2019년에는 정문 [[광명문]]을 원 위치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 1층[*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으로 장식했다. 잡상의 수는 7개이다. 평면은 ‘ㄴ’자 형태이다. 또한 [[암석|장대석]]을 높게 쌓은 4단의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각기둥을 세운 뒤, 쇠서[* [[소]] [[혀]] 모양의 부재.] 1개만 둔 몰익공 [[공포(동음이의어)|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다. [[경복궁 강녕전|강녕전]]과는 달리 중앙에 월대 없이 5단 짜리 [[계단]]만 3개를 설치했으며 뒷면에는 대청과 통하는 쪽은 계단 1개를, 북쪽으로 돌출된 부분엔 동쪽과 북쪽에 각각 1개 씩의 계단을 두었다. * 정면 9칸, 측면 4칸에 북쪽에 온돌방 4개를 덧붙여 총 40칸 규모이다. 내부는,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놓고 칸을 나누지 않고 한 [[공간]]으로 뚫어 넓게 했으며 [[천장]]은 우물 반자[* 서까래가 안보이게 천장을 가리고 평평하게 만드는 구조물.]로 막고 [[단청]]을 아름답게 칠하여 화려함을 부각했다. 대청을 중심으로 동, 서 양 옆의 정면 2칸, 측면 2칸을 [[온돌|온돌방]]을 두었으며 앞면의 협칸과 측면의 칸들을 [[마루]]로, 뒷면의 협칸은 쪽방으로 구성했으며 온돌방도 대청과 마찬가지로 벽체를 치지 않고 전부 한 칸으로 통하여 공간을 넓게 했다. 대청과 온돌방을 연결하는 문은 중앙에만 창호를 두고 그 위 아래로 [[종이]]를 바른 불발기[* [[종이]]를 두껍게 바른 장지문의 한가운데에 교살이나 완자 살을 짜 대고 창호지를 바른 [[문]].] [[양식]]으로 설치했다. * 다른 [[궁궐]]들의 메인 침전은 일반적으로 다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건물]]인데 반해,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고, 대부분 쇠서가 2개인 이익공 [[공포(동음이의어)|공포]]인데 반해 함녕전은 쇠서 1개를 둔 몰익공 공포이다. 사실 앞서 말했듯 [[경복궁]]의 수많은 그저 그런 전각 중 하나인 만화당을 옮겨다 지은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처음부터 정식 침전으로 지은 [[경복궁 강녕전|강녕전]], [[창덕궁 대조전|대조전]] 등과 비교해 구조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옮길 때 용마루를 빼도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그대로 놔둔데엔 두 가지 이유로 추측할 수 있다. 하나는 무량각 [[건물]]이 굉장히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건물이라 함부로 뺐다간 공사가 더욱 힘들어졌을 것이고[* 실제로 [[전통]] [[집|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또 하나는 이게 [[중국]] [[양식]]이라 그런 선진 기술을 귀하신 [[왕]]과 [[왕비]]의 침전에만 적용한 것인데, 이미 여러 [[서양]] [[문명|문물]]을 접하고 자주 독립국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굳이 중국풍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이다. * [[근대]] 시기에 지어서 그런지 [[서구권|서구적]]인 요소가 더럿 보인다. [[대청]] 천장엔 [[샹들리에]]가 2개나 걸려있고, 대청 문틀[* 방으로 들어가는 문 제외.]마다 [[커튼]] [[박스]]를 달았으며 지금은 치웠지만 대청과 툇간 바닥에 [[카펫]]도 깔았었다.[[http://www.doopedia.co.kr/photobox/comm/community.do?_method=view&GAL_IDX=101012000708063#hedaer|자세한 내부 모습을 보고 싶으면 여기로.]] == 여담 == * 1899년([[광무]] 3년)에 황의수란 사람이 [[덕수궁]] 서문 [[덕수궁 포덕문|포덕문]]을 통해 궁 안으로 들어와 [[덕수궁 함녕전|함녕전]]까지 가서 “나는 [[천주교|서교]]를 널리 선전해 [[천자]]가 될 것이다.”란 말을 해서 체포되었고, [[교수형]]을 당했다. 사실 [[천주교]], [[개신교]]의 [[포교]]가 허용받은 지 한참 지난 시기라 그 죄목으로 [[처형]]당한 건 아니었다. '''궁에 무단 침입'''해 '''황제의 침전'''에서 '''자신이 천자가 되겠다'''고 한 게 문제.[[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07001_004|#]] --빼박 역적 인증--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XlTxv92drgM)]}}} || || {{{#683235 '''함녕전 내부 개방 소식을 다룬 〈SBS 8 뉴스〉 영상'''}}} || 2016년 3월 말에 [[문화재청]]에서 함녕전 내부를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공개했다. * 비영리 문화단체 '아름지기재단'에서 [[문화재청]], 덕수궁 관리소, 에르메스 코리아, 문화유산국민신탁 등과 협조하여 '궁궐 전각 내부 집기 재현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함녕전을 대상으로 하여 2016년에는 외주렴을, 2017년에는 용교의, 오봉병, 용문석을 재현했다. [[http://arumjigi.org/project/project_atd.php?idx=16&inner_idx=19|#]] == 영상 매체에서의 활용 == [[대한제국]] 시기를 다룬 [[미디어|영상물]]이 드물어 함녕전이 등장한 적은 별로 없으며 하다못해 야외 세트장에서 재현한 것으로도 나온 적이 거의 없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덕혜 함녕전.png|width=100%]]}}} || || {{{#683235 '''《덕혜 - 마지막 왕녀》에 등장한 함녕전'''}}} || 1996년에 [[MBC]]에서 방영했던, [[덕혜옹주]]를 주인공으로 한 [[광복절]] 특집극 《덕혜 - 마지막 왕녀》에서 나왔다.[* [[덕혜옹주]]의 어린 시절은 [[이정윤]]이, 소녀 시절은 [[김민정(1982)|김민정]]이, 그리고 성인은 [[이혜숙]]이 맡았다.] 초반부엔 [[아버지]] [[고종(대한제국)|고종]]([[이낙훈]] 분)과 함께 놀며 예쁨받던 곳으로 나오고, 후반부엔 [[관광지]]로 나온다. [[일본]]에 [[인질|볼모]]로 끌려갔다가 [[8.15 해방|독립]]이 되고도 한참 뒤에 [[귀국]]해 노인이 된 덕혜옹주([[이혜숙]] 분)가 이미 [[관광지]]로 변한 [[덕수궁]]에 가서[* 이 때 상궁들이 "마마도 돈을 내고 들어가셔야 하옵니다." 라고 하고, 덕수궁 즉조당을 구경하는 덕혜옹주 일행 뒤로 관람 온 [[일본인]] 관광객 일행에게 [[가이드]]가 어린 시절 덕혜옹주가 다녔던 유치원 자리라며 그의 어린 시절을 설명한다. 왕녀가 돈 내고 궁에 들어가며 덕혜 자신이 살았던 모습이 역사적 일화로 언급 될 만큼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표현하는 장치이다. 마치 영화 《[[마지막 황제]]》를 생각나게 한다.] 실내 출입을 할 수 없는 함녕전을 보고 감정이 북받쳤는지 울부짖으며 (들어가지 말라고 막아놓은) 칸막이를 흔들면서 아버지 고종을 그리워한다. 관리소 직원이 이를 보고 달려와서 "이러시면 안된다" "아실만한 양반이 뭐하시는거냐"며 말리지만, 오히려 덕혜옹주와 같이 왔던 [[상궁]]들에게 혼난다. --사실 직원 말 틀린 거 하나 없긴 한데 좀 [[싸가지]]없게 말하긴 했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교태전, version=10, paragraph=3, title2=덕수궁, version2=461, title3=덕수궁 포덕문, version3=8)] [[분류:덕수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