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덕수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3> {{{#683235 {{{+1 '''덕수궁 함유재'''}}}[br]{{{-1 德壽宮 咸有齋}}}}}}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덕수궁, 너비=100%, 높이=100%)]}}} || ||<-2> {{{#683235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세종대로]] 99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 5-1) || ||<-2> {{{#683235 '''건축시기'''}}} || [[1896년]] {{{-1 (창건) }}} / [[1904년]] {{{-1 (중건) }}}[br][[1921년]] ~ [[1926년]] 사이 {{{-1 (철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함유재 터.png|width=100%]]}}} || || {{{#683235 '''하늘색 원 안이 함유재 터이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덕수궁]]에 있었던 [[건물]]이다. [[덕수궁 정관헌|정관헌]]의 남쪽, [[덕수궁 덕홍전|덕홍전]]의 북쪽, [[덕수궁 함녕전|함녕전]]의 서북쪽에 있었다. 이름 '함유(咸有)'는 《서경 - [[상서]]》 편에 나온 '함유일덕(咸有一德)'에서 유래했다. '임금과 신하가 다(咸) 한 가지 덕(一德)이 있다(有)'는 뜻이다. == 역사 == 1896년([[건양]] 원년) 2월에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조선/왕사|왕실]]은 [[경복궁]]을 떠나 [[아관파천|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 언제까지 [[주한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에만 머물 수 없었던 고종은 환궁처[* 환궁은 임금이 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를 근처에 있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정했다. 그러나 [[경운궁]]은 본래 [[임진왜란]] 당시 [[월산대군]][* [[성종(조선)|성종]]의 형.]의 사저와 근처 민가를 합쳐 만든 임시 [[행궁]]이었고, 그나마도 [[인조]] 때에 [[덕수궁 즉조당|즉조당]]과 그 주변 별채를 제외하고는 전부 본 주인에게 돌려준 상태였다. 그래서 번듯한 건물이 없었기에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1896년부터 경운궁을 [[궁궐]]답게 만드는 대공사를 진행했다. 그 때 지은 건물 중 하나가 바로 함유재이다. 함유재 공사는 몇 달 만에 끝났다. 그래서 1897년([[건양]] 2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돌아간 뒤 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함유재를 [[신하]]들과 만나 [[정사#s-2]]를 펼치는 곳으로 활용했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D%95%A8%EC%9C%A0%EC%9E%AC(%E5%92%B8%E6%9C%89%E9%BD%8B)|#]] [[경운궁]]에서는 편전을 한 건물로 고정하지 않고 여러 건물들을 사용했는데 함유재도 그 중 하나였던 듯하다. 《[[승정원일기]]》에는 1898년([[광무]] 2년)과 1899년(광무 3년)에 함유재에서 주요 [[대신]] 및 각 부처의 신하들을 소견한 기록이 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35_05A_07A_00090|#]][[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35_07A_25A_00040|#]][[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36_07A_25A_00030|#]] 그 중 두 번은 고종의 [[절일#s-3.2.2|생일(만수성절)]]을 맞아 신하들이 경하하러 온 내용이다. 1904년([[광무]] 8년) [[덕수궁 함녕전|함녕전]]에서 일어난 [[화재|대화재]]로 불탔다가 곧 재건했다. [[일제강점기]] 초반에도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이곳을 활용했다. 1912년에는 잠시 옮겨가 머물렀고[[http://sillok.history.go.kr/id/kzc_10510017_001|#]], 1915년에는 [[도쿄]]가는 것을 고하러 온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 [[총독]]을 만나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c_10810025_002|#]] 1919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죽음|승하]]한 후 [[덕수궁]][* 1907년 고종이 퇴위당한 후, 경운궁 이름은 '[[상황]]의 궁'이란 뜻의 '덕수궁'으로 바뀌었다.]은 빈 궁이 되었고, 일제는 덕수궁 건물 대부분을 철거 및 매각하면서 함유재도 헐었다. 철거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1922년에 [[영친왕|의민태자(영친왕)]]의 아들 [[이진(1921)|이진]]이 덕수궁에서 사망한 후 빈소로 썼다는 《[[매일신보]]》의 기사와 1926년 경에 작성한 《덕수궁각건물배치도》에 보이지 않는 것을 종합해보면 저 사이에 헌 듯 하다.[[https://www.koreascience.or.kr/article/JAKO201820765438891.pdf|#]] == 구조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함유재 의궤.png|width=100%]]}}} || || {{{#683235 '''《경운궁영건도감의궤》의 함유재[* [[https://www.gogung.go.kr/ancientBooksView.do?bbsSeq=6157&bizDiv=2|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 1904년(광무 8년)에 불탄 후 재건했을 때의 공사보고서인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 함유재의 형태가 그려져 있다. 맞배지붕이고 정면은 6칸으로, 양측면 벽을 [[벽돌]]로 쌓은 형태이다. [[분류:덕수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