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800080> {{{#ffffff {{{+3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br]{{{-1 [[라틴어]]: Decimus Iunius Brut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조부)[br]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아버지)[br]유니아(누이)[br]셈프로니아(아내)[br][[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77년 || ||<#800080> {{{#ffffff '''전임''' }}}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기원전 78년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br][[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 || ||<#800080> {{{#ffffff '''동기''' }}} ||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 ||<#800080> {{{#ffffff '''후임''' }}} ||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기원전 76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br][[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기원전 76년 집정관)|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후손을 자처한 [[노빌레스]] 가문인 유니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조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기원전 178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는 기원전 13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삼촌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기원전 140년 [[법무관]]을 역임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을 주동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조상이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누이 유니아는 기원전 80년 법무관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아내였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의 첫번째 남편이었던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외삼촌이다. 기원전 100년 12월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토벌하고자 [[포로 로마노]]에 집결한 귀족 집단에 가담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이후 몇년 간 여러 재판에서 변호사로 활약했다고 한다. 기원전 94년에서 90년 사이에 [[법무관]]을 맡았고, [[술라의 내전]]이 벌어졌을 때 술라의 편에 섰다. 기원전 77년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임된 그는 히스파니아 전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할 임무를 맡은 군대를 이끌라는 제안을 거부했고, 영향력 있는 원로원 의원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기원전 91년 집정관)|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당시 별다른 공직을 맡지 않았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할 임무를 맡기자고 제안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한 의원이 "폼페이우스가 집정관을 대신해서 [[임페리움]]을 받는 게 정말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필리푸스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아니오. 두 집정관을 대신해야 하오." 그 후 브루투스의 행적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기원전 63년 아내 셈프로니아가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음모에 참여해 남편이 없을 때 갈리아의 알로브로게스 부족 사절단에게 집을 제공하고 카틸리나 공모자들과 접촉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이때까지 살아있던 것은 분명하다. 브루투스는 카틸리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간지 얼마 안 가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모종의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은 [[파트리키]] 집안인 포스투미우스 씨족에 입양되어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로 개명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첫 아내가 기원전 51년 집정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의 아내 포스투미아의 자매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이후 카틸리나 음모에 가담했다고 전해지는 두 번째 아내 셈프로니아와 결혼했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에 따르면, 그는 셈프로니아와의 사이에서 2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신상명세는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