陶丘洪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청주 평원군 출신으로 [[변양]], [[공융]]과 함께 이름을 날렸고 스스로 식견이 화흠보다 뛰어나다고 여겼으며, 맑으면서 사물에 대해 널리 통달했고 효렴으로 천거되고 태위부로부터 벽소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유대(삼국지)#s-1|유대]]를 천거했고 다음 해에는 [[유요]]를 무재로 추천하려고 하자 관리가 연이어 형제를 추천한 것에 대해 묻자 도구홍은 두 마리의 용을 메고 먼 길을 가는 것이나 기린을 부려 천 리를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비유해 그 두 사람이 뛰어난 인재라는 것을 말했다. 185년에 [[왕분(삼국지)|왕분]]이 사람들을 모아 [[영제(후한)|영제]]를 폐위하고 합비후를 옹립하려고 하면서 [[화흠]]과 함께 계책을 정할 것을 권유받아 가고자 했지만 화흠의 만류로 가지 않았다. [[하옹]]이 [[원술]]을 꾸밈이 많은 사람이라 여겨 원술이 하옹을 원망했는데, 원술이 하옹에 대해 세 가지 죄가 있다면서 비난하자 도구홍이 이에 대해 반박해 하옹을 변호했고 30세에 사망했다. 관녕전에 따르면 정시 2년(241년)에 태복으로 있던 도구일(陶丘一)이란 신하가 영령궁 위위 맹관, 시중 [[손옹]], 중서시군 [[왕기(삼국지)|왕기]]와 함께 [[관녕]]을 인재로 추천하는데, 이 도구일이란 사람과 일족일 가능성이 있다. [[분류:후한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