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1 [ruby(外様大名, ruby=とざまだいみょう)] / Tozama Daimyō}}}''' 도자마 다이묘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도자마추라고 불리며 존재했다. 다만 후대에 알려진 것은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 각 지역의 [[다이묘]]들에게 충성도에 따른 차별대우를 한 사례가 가장 일반적으로 불린다. [[통용 표기]]에 따른 [[토자마 다이묘]]라고도 표기한다. == 특징 == [[에도 시대]]의 [[다이묘]]는 신판 다이묘(親藩大名, 신번대명),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 보대대명), 도자마 다이묘 셋으로 나뉘는데, 이 기준은 [[에도 막부]]를 수립하는 것에 얼마나 더 공헌했는지로 갈라졌다.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에 들어온 이들이 도자마가 되었다.[* 굳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적대하던 다이묘들이 아니라 해도 동맹세력으로 있던 이들 역시 해당된다. [[다테]] 가문, [[구로다]] 가문, [[호소카와]] 가문, [[가토]] 가문, [[야마우치]] 가문 등.] 반면 신판 다이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혈족들이 임명되었고, 후다이 다이묘의 경우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이에야스를 주군으로 받들던 세력들이 임명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도쿠가와 가문 외에 약 200 가문이 존재했는데, 전투 이후 2년 동안 88가문이 [[개역]]당하여 가문이 끊겼다. 에도 막부 초기에도 많은 도자마 다이묘 가문이 개역당하고 수많은 [[로닌]]이 생겼났다. 그리고 에도 시대 막부 말기에는 80%에 가까운 지방 세력의 가문이 사라졌다. 이들 도자마 다이묘는 주로 에도에서 먼 [[규슈]] 등 변방 지역을 본거지로 하는 경우가 많았고, 본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에 충성한 전례가 있고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대체로 약했기 때문에 에도 막부에게 견제와 푸대접을 받아서 에도 막부에게 불만이 많았다. 에도 막부를 무너뜨린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의 주축 세력이 이 도자마 다이묘의 영지인 [[사쓰마]]([[시마즈]] 가), [[조슈]]([[모리]] 가), [[도사]][* 도사 번은 원래 [[조소카베 모리치카|조소카베]] 가가 다스리던 곳이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조소카베 가는 개역당하고 [[야마우치]] 가문이 새로운 번주가 되었다. 조소카베의 가신들은 하급무사로 전락하고, 야마우치의 가신은 상급무사로 오랫동안 두 계급 사이에 차별이 심했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주역들은 하급무사 출신이었다.] 출신인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는 원래 잠재적인 위험분자들을 수도에서 멀리 떼어놓아 수도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의도였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약해지고 이들이 대외무역 및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쉽게 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다만, 도자마 다이묘에 대한 대우가 꼭 같지만은 않았다. 예컨대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 번]]은 시간이 좀 지나면서 쇼군 가와도 통혼할 정도로 긴밀한 사이가 되어서 [[막말]]시기만 되면 그래도 애초에는 [[조슈]] 번과는 달리 공무합체라인에 서서 막부 유지의 입장을 고수하기도 했다. 제아무리 도자마 다이묘일지라도 일단 다이묘에 속한 이상, 1만 석 이상의 조세를 수취하는 [[금수저]] 계층이자 기득권이었기 때문에 막부 말기의 혼란 속에서도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존황양이]], 나중에는 토막을 부르짖은 유신지사들은 대부분 이른바 구라마이라고 불렸던 중/하층 사무라이였다. 거기다가 산킨고타이로 인해 다이묘쯤 되면 어릴때부터 에도에서 생활하는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다이묘들은 각 번의 중하층 사무라이들보다는 에도 막부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또한 [[조슈 번]]의 경우도 본래 번주 [[모리]] 가문이 반 막부파까진 아니었고 번내 근왕파 무사들, 예컨대 [[타카스기 신사쿠]] 등이 주도한 번내 쿠데타를 통해서 조슈 번이 토막파 주도세력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도자마라도 센고쿠 시대 당시 친 도쿠가와 성향을 지닌 다이묘들[* [[야마우치]] 가문, [[구로다]] 가문, [[호소카와]] 가문, [[다테]] 가문 등.]은 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 특히 [[다테 마사무네]]같은 이는 막부 중신으로도 있기도 했다. 그 외에 [[마에다 토시이에]]의 마에다 가문도 거의 도쿠가와 신판 가문급 대우를 받았다.[* 도쿠가와 [[고산케]](오와리-기슈-미토), 직접방계 마쓰다이라(에치젠-아이즈-오치), 도쿠가와 고산쿄(다야스-히토쓰바시-시미즈), 간접방계 마쓰다이라(히사마쓰-오쿠다이라) 등의 다음가는 세력이 마에다-다테-시마즈... 순이었다. 물론 이런 순위는 막부 내부 권력계도, 혹은 대외적인 것으로, 당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유동적이었다. 또한 막부 내정 등이 아닌 실질적인 번 자체 권력으로만 판단한다면 마에다와 시마즈는 상기 고산쿄보다는 훨씬 강한 권력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저렇게 분봉받은 것은 형식적인 것으로, 막부 말기의 고쿠다카로는 시마즈가 다테보다 높은 등 변동이 많았다.] 이는 도자마 다이묘라 할지라도 강성한 번들이 많기도 했거니와 도자마 다이묘 중에서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동군에 서는 등 이에야스와 친한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자마 다이묘들이 에도 막부에서 무작정 괄시당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 가문들인 후다이 다이묘들이라든지 세력이 작은 도자마 다이묘들이 수틀리는대로 걸핏하면 [[가이에키]](영지몰수)였던 것과 달리 기본적으로 에도 막부 극초반의 과도기를 제외하면 애당초 막부가 20만석 이상의 도자마 다이묘를 가이에키한 사례 자체가 없다.[* 물론 가이에키를 자제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가이에키를 하면 그 밑에 있던 무사들도 모두 해고되어 실업자가 된다. 이렇게 실업자가 된 무사들을 로닌이라고 부르는데 막부 초기, 각 번을 꺾기 위해 가이에키를 많이 하는 바람에, 거기다 세키가하라 이후 고쿠다카가 줄어든 다이묘들은 휘하 가신을 상당수 해고했던 바람에 처음부터 로닌이 많았고 이 로닌들은 일자리가 없다 보니 각종 사고, 심하면 반란까지 일으키며 그렇다고 이들을 어디 써먹을 방법도 없어 이래저래 골치아픈 존재인지라 이들을 더 늘리지 않기 위해선 가이에키를 자제할 수 밖에 없었다.] 굳이 찾아봐야 도자마 다이묘였던 사타케 가문이 지배하던, 그것도 영지 전체가 아닌 일본 제일의 구리광산이던 인나이 광산을 제한적으로 가이에키했다가 곧 철회한 사례 하나가 유일하다. 비록 막부가 우위이긴 하지만 애당초 유력 도자마 다이묘들은 각 가문들마다 깃발 하나만 꽂아도 당장 수천단위의 병력을 뽑아낼 수 있기에, 이들이 단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면 막부로서는 부담스럽기 짝이없는 세력들이었다. 이때문에 20만석 이상의 도자마 다이묘에 대해서 막부에서도 직속가신으로 대하지 않아 별도로 대우한 것이지 실제로는 극진한 특별대우를 했다. [[분류:에도 시대]][[분류:다이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