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70> '''{{{#white 백제 영군장군 토진대사 도침}}}''' || ||<#191970> '''{{{#white 자칭}}}''' ||<(> 영군장군(領軍將軍) || ||<:><#191970> '''{{{#white 별칭}}}''' ||<(> 토진대사 || ||<:><#191970> '''{{{#white 스승}}}''' ||<(> 묘련(妙蓮) || ||<:><#191970> '''{{{#white 이름}}}''' ||<(> 도침(道琛) || ||<:><#191970> '''{{{#white 생몰연도}}}''' ||<(> ? ~ ?[* 이 부분은 [[백제부흥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복신과 내부분열이 일어나 [[살해]]된 것은 맞지만 시점이 딱히 언제인지 명확하지 않다. 대략 [[661년]] 4월 반골양 전투 후 ~ [[662년]] 사이에 복신에게 피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목차] == 개요 == [[백제]] [[멸망]] 직후 [[귀실복신]], [[흑치상지]] 등과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지휘한 장수로 원래는 [[승려]]였다. == 생애 == 다른 백제측 인물들처럼 기록이 남은 것이 별로 없어서 자세한 내력을 알 수는 없고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개암] 불복장 유물에서 발견된 별기[* 1979년 개암사 대웅전에 모신 불상의 내부 유물이 도난당했는데 도난범들이 불상의 왼손을 잘라내고 안에 든 것을 꺼내다 떨어뜨리고 간 종이. 작성자는 개암사사적기에 1658년 개암사를 재건했다고 나오는 승려 밀영.]에는 도침이 개암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묘련(妙蓮) 대사의 제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에서도 이 설을 차용했다.]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고 칭한 귀실복신과 함께 도침은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고 불렸다. 661년 2월 백제부흥군이 힘을 모아 옛 수도 사비성을 공격해서 나당연합군을 궁지에 몰았는데 도침은 웅진강 입구에서 목책을 세우고 [[유인궤]]가 이끄는 당군의 사비성 진입을 막았다. 백제부흥운동의 여파로 [[사비성]]에 고립된 [[유인원(당나라)|유인원]]에게 "대사께서는 언제쯤 서쪽으로 돌아가시렵니까? 마땅히 사람을 시켜 전별해 드리리다."라고 조롱하는 글을 보낼 정도로 백제 부흥군의 위세는 컸지만 백제부흥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귀실복신과 내분을 일으켜 결국 귀실복신에게 피살되었다. 이후 귀실복신도 [[풍왕]]과 불화를 일으켜 풍왕에 의해 [[처형]]당하였고 흑치상지도 [[항복]]하면서 백제 부흥군의 세력은 위축되었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에서 열리는 은산별신제에서 복신과 함께 모셔지는데 음이 변형돼 '토진대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 창작물에서의 모습 == || [[파일:도침-삼국기.jpg|width=400]] || || [[삼국기]]에서의 도침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삼국기, 문단=4.3)] || [[파일:도침-대왕의꿈.png|width=400]] || || [[대왕의 꿈]]에서의 도침 || 이 작품에서는 [[연개소문]]의 밀명을 받고 [[백제]]에 파견된 [[고구려]] 출신 인물로 각색되었다. 그런데 실제 역사상에서의 도침은 백제인이고 [[승려]]인데, 이 작품에서는 승려가 아니라 [[장수#s-2|장수]]로 나왔고, 또한 백제인이 아닌 고구려인으로 나왔는데, 워낙 [[인지도]]가 낮은 인물이라 그냥 장수 A 정도로만 묘사되었다. == 여담 == 도침 이외에도 [[일본]]에 사신으로 간 사미승 각종(覺從), [[태종 무열왕]]이 함락시킨 왕흥사잠성 등 백제 [[불교]]계도 부흥운동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도침을 부흥운동가 [[부여자신]]과 동일인물로 보았으나, 도침은 [[귀실복신]]에게 살해된 데 비해 [[일본서기]] 기록상 부여자신은 백제부흥운동이 패망한 이후로도 살아남아 일본에 망명했기 때문에 동일인물일 가능성은 없다. [[분류:백제의 인물]][[분류:백제의 승려]][[분류:백제의 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