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목차] [clearfix] == 개요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문서이다. == 20세기 == === 1900년대 === 1900년 [[독일 축구 협회]](DFB)가 창설되었고, 1908년 4월 5일 스위스 [[바젤]]에서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스위스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독일 국가대표팀의 첫 A매치 경기가 열렸다. === 1910년대 === === 1920년대 === ==== [[오토 네르츠]] 감독 ==== 오토 네르츠 감독은 1926년에 선임되었으며,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첫 전임 감독이다. 그에게 주어진 목표는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축구|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축구]]였다.[* 월드컵은 1930년이 첫 경기로 이 항목에 들어올 수 없다.] 그러나 1928년 올림픽에서는 2라운드에서 [[우루과이]]를 만나 1대 4로 대패하였다. === 1930년대 ~ 1940년대 === 1930년에 개최된 제1회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1930 우루과이 월드컵]]에는 불참했다. 첫 출전한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3위를 기록했다. ==== [[제프 헤어베어거]] 감독 ==== 1936년부터 제프 헤어베어거 감독을 선임한다.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오스트리아 병합|합병]]된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흡수하여 월드컵에 출전했다. 직전 대회인 1934년 월드컵에서 독일이 3위, 오스트리아가 4위를 거두었던 성적도 있고 1937년 독일은 11경기에서 10승을 거둘 정도로 전력도 탄탄했다. 이래서 1938년 통합 독일 대표팀은 1938년 월드컵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는데 신생 독일 국대는 대회 직전에 급조된 팀이었기 때문에 팀웍에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월드컵이 열리기 불과 두 달전에 오스트리아가 합병되었는데 양국 축구협회 통합부터 시작하여 선수들간의 갈등[* 오스트리아 선수들이 독일에 감정이 좋았을리는 당연히 없고 그렇다고 독일 선수들도 오스트리아 선수들에게 포용적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아무리 헤어베어거가 명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라고 해도 그건 1954년 월드컵 우승까지 합쳐진 평가이지 이때의 헤어베어거는 대표팀 재임 만 2년도 안된 신출내기였다. 당시 재임중이던 감독들 중 최고의 감독인 [[비토리오 포초]]든 선수단 장악에 일가견이 있는 후대의 [[알렉스 퍼거슨]]이든 누구라도 당시의 조건하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불가능하다.]까지 온갖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두 달이란 시간은 너무 짧았다. 독일 축구 챔피언십때문에 월드컵에 출전할 만한 선수들을 따로 모으기도 불가능했던건 덤. 여기에 윗선의 개입이 상황을 더욱 꼬아놨는데 대외적으로 대표팀이 하나의 독일처럼 보여야한다는 이유로 11명의 선수 구성 비율을 기본적으로 6:5로 맞춰야 한다는 강압[* 독일 선수가 6이든, 기존 오스트리아 선수가 6이든 어쨌든 비율을 최대한 비슷하게 맞추라는 의미이다.]도 있었다. 결국 당시 독일 대표팀은 축구협회부터 코칭 스태프까지 매우 혼란스럽고 잡음이 많은 상황에서 급조되다시피 구성되었고, 제대로 손발을 맞춰볼 기회도 없이 곧바로 월드컵에 출전해야 했다. 결국 졸전 끝에 1라운드에서 허무하게 탈락했다.[* 물론 처음에는 1:1 무승부였지만, 재대결에서 2:4로 패배해서 탈락했다. 이 2경기에서 그 말도 안되는 6:5 원칙은 지켜졌다.] 시드 배정국 중 유일하게 탈락, 공식 순위는 10위. 이 대회는 독일 대표팀이 8강 안에 들지 못한 '''셋뿐인 월드컵이다.'''[* 나머지 둘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아예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각각 따로 월드컵에 나왔거나 헤어베어거에게 선수 선발과 구성에 전권을 줬다면 더 나은 결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었던 월드컵은 1950년에 재개되어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브라질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독일 3국인 [[서독]], [[동독]], [[자를란트]]([[자르 보호령]]) 대표팀은 제2차 세계 대전 추축국이라는 이유로 FIFA로부터 월드컵 출전을 금지당했다.[* 사실 [[이탈리아]]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구 추축국인데도 불구하고 1950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었다. 이는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이탈리아가 먼저 연합군에 항복한 후 연합군으로 전향하면서 패전국이 아닌 특수지위국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월드컵 출전 금지라는 제재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 1950년대 === [[파일:external/www.historytoday.com/fritzwaller.jpg|width=600]]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1954 스위스 월드컵]] 우승 후 줄리메컵을 들고 있는 주장 [[프리츠 발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은 독일축구협회(DFB)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해체했다. 그리고 1945년 11월 FIFA는 독일축구협회와 일본축구협회(JFA)에 국제 경기 참여 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1950년 9월까지 독일은 모든 국제 대회에 출전을 금지 당했다. 1945년 11월, 북독일 리그와 남독일 리그가 각각 첫 경기를 시작하며 서독에서 프로축구 리그가 재건되었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독일 국가대표팀의 재건은 한동안 이루어지지 못했다. 1948년 스위스가 FIFA에 독일 징계 철회를 요청했으나 기각되었다. 당시 스위스 축구 클럽들은 독일 클럽들과 경기를 치르고 있었지만 프랑스 등의 항의로 중단되었다. 1949년에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독일 징계 철회를 요청했다. 이후 1949년 서독 정부 수립을 계기로 연합국 군정 허가 하에 독일 클럽 팀에 대한 제재가 제한적으로 완화되었다. 1949년 말 슈투트가르트에서 독일축구협회(DFB)의 공식적인 재건식이 열렸다. 재건된 독일(서독)축구협회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기존 독일축구협회(DFB) 및 독일 국가대표팀의 계승을 천명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국가대표팀이 중단될 때까지 대표팀 감독을 맡았었던 [[제프 헤어베어거|제프 헤르베르거]] 감독이 다시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어 국가대표팀 재건의 중책을 맡았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스위스 축구 협회]]가 다시 독일의 징계 철회를 요청했다. 비록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의 출전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브라질 월드컵 직후인 1950년 9월 드디어 독일축구협회에 대한 징계가 풀리고 FIFA 회원 자격이 복구되었다. 1950년 11월 22일 슈투트가르트의 [[메르세데스-벤츠 아레나|네카르스타디온]]에서 스위스 국가대표팀과 감격적인 전후 첫 A매치(친선전)가 열렸다. 독일 대표팀의 전후 첫 공식 경기가 열린 슈투트가르트의 [[메르세데스-벤츠 아레나|네카르스타디온]]은 그리 큰 경기장이 아니었지만 당시 무려 10만명 이상이 몰렸다.[* 참고로 당시 슈투트가르트 인구가 50만명이 안됐다.] 한편 동독은 1952년 서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독과 별도의 독자적인 새로운 축구협회(DFV)를 창립하고 동독 국가대표팀을 창단했다. 독일은 1964년 도쿄 올림픽 때까지 동하계 모두 올림픽에 동서독 단일팀을 구성하여 출전했기 때문에 축구 역시 단일팀을 구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고, FIFA와 UEFA 측에서도 동독 대표팀도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국가 대표팀의 기록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정작 동독 정부 측에서 분단 이전 독일축구협회와 국가대표팀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축구협회와 대표팀을 꾸렸다. 서독은 출전 금지가 풀린 첫 메이저대회인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우승컵을 차지하면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당시 독일은 서독, 동독, [[자를란트]] 3개국 대표팀으로 나눠어 출전했다. 자를란트 대표팀은 이 대회가 메이저 대회 처음이자 마지막 출전이었으며, 2년 후 서독 대표팀에 흡수되었다. 사실 이 대회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특이한 대전방식을 도입했는데, 조별 예선에서 풀리그를 거치지 않았고[* 그래서 당시 한국 대표팀은 독일과 같은 조였음에도 헝가리, 터키와만 경기를 치렀다.], 8강 이후 토너먼트에서는 조1위끼리 맞붙거나, 조2위끼리 맞붙는 방식이었다. 이런 이상한 대전방식 때문에 독일은 조별리그에서 불리한 입장에 있었는데, 같은 조 최약체팀인 승점자판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과 경기를 치르지 않게 된 것이었다. 당시 한국전쟁이 끝난지 1년도 안된 시점의 한국은 명백한 약체팀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이러한 특이한 대전 방식의 헛점을 이용하는 전략인 접근을 취했는데, 조별리그에서 당시 세계 최강 헝가리와 맞붙었을 때 주전 7명을 제외한 사실상 2군을 내보내 패하고 조2위로 8강에 올랐다. 조1위로 8강에 오른 헝가리는 각조 1위인 브라질, 우르과이를 만나 혈전을 치르며 결승까지 올라와야 했지만, 독일은 토너먼트에서 조2위 국가인 유고슬라비아와 오스트리아를 만나 각각 2:0, 6:1로 꺾으며 손쉽게 결승에 진출했다. 결국 결승전에서 독일은 헝가리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당시 마자르 군단 헝가리는 세계 최강의 축구 대표팀으로, 이날 결승전에서 독일에서 패하기 전까지 4년여 동안 A매치 32경기 무패라는 대기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결승전은 초반 8분만에 헝가리가 두 골을 선취하며 2:0으로 앞서나가며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2분 후 [[막스 모를로크]]가 만회골을 터트리며 추격을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고 이어 [[헬무트 란]]이 2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치며 끝내 경기를 경기를 뒤집는데 성공하며 극적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세계 최강이던 마자르 군단 헝가리를 극적으로 꺽고 우승을 차지한 이 경기는[* 조별리그에서도 독일과 헝가리가 만났는데, 그 때는 '''{{{#red 3:8}}}로 발렸다. '''더군다나 이 당시의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은 현재도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무시무시한 강팀이었다.] 결승전이 열렸던 도시 스위스 베른의 이름을 따서 '''[[베른의 기적]]'''이라 불린다. 이 우승은 패전과 조국의 분단이라는 이중고(苦)에 시달렸던 독일 국민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안겨준, 독일 국민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역대급 사건이다.[* 다만 [[메스암페타민|약빨]]이 있었다는 의혹이 있다.] 이후 16회 연속 대회 8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17회째는 [[신태용호/2018 FIFA 월드컵 러시아/독일전|알다시피...]]]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죽음의 조인 1조에 배정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북아일랜드와 무승부를 거두며 다소 고전했으나 남미의 강호 아르헨티나를 격파하고 1승2무로 조1위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 유고슬라비아를 만나 1:0 승리를 거두고 4강에 진출했다. 4강전에서 개최국 스웨덴에게 패하여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최종 순위는 4위이다. === 1960년대 === [[1962 FIFA 월드컵 칠레|1962 칠레 월드컵]] 조별 리그에서 독일은 개최국 칠레와 스위스를 눌렀으나, 당시 그리 강한 전력이 아니었던 이탈리아와 비겨 2승 1무를 거두었다. 그래도 조 1위의 성적으로 8강 토너먼트에 진출했으나, 8강전에서 유고슬라비아에 0:1로 패하고 말았다. '''4강 진출 실패의 충격'''으로 독일은 통합 프로리그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당시까지는 통합 분데스리가가 아닌, 각 지방의 레기오날리가(Regionalliga) 우승팀끼리 또 토너먼트를 벌여 우승자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이듬해 1963년 [[분데스리가]]를 출범시켰다. 분데스리가는 급속도로 발전하여 1990년 독일 통일로 인해 경제침체의 영향을 받을 때까지 70~80년대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 중 하나로서 위용을 뽐냈다. ==== [[헬무트 쇤]] 감독 ==== 분데스리가 출범과 때를 같이 하여 54년 스위스 월드컵 우승의 주역인 명장 [[제프 헤어베어거|제프 헤르베르거]]가 물러나고 1964년부터 [[헬무트 쇤]]이 새로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1956년부터 수석코치를 맡은 사람을 감독으로 올린 내부 승격이다. 1960~70년대 독일 대표팀은 국가대표 B팀을 상설 운용했다. 다른나라에서도 간헐적으로 국가대표 B팀을 운용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지만, 당시 독일 대표팀은 B팀을 매우 활성화하여 상설화시켰다. 국가대표 B팀은 50년대부터 있었지만, 62년 칠레 월드컵 4강 탈락 충격으로 인한 독일 축구계 개혁 이후 국가대표 B팀도 강화되어 1965년부터는 다른나라 A대표팀과 평가전을 갖기 시작했다... 독일 축구협회는 B팀을 통해 차세대 국가대표 A팀 멤버로 성장할 선수들을 선별하여 육성했다. 이후 B팀은 1974년 우승 멤버들을 배출하는 산실 역할을 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 독일 국가대표 B팀은 웬만한 다른나라 국가대표팀 못지 않은 강력한 전력을 가졌는데, 당시 워낙 뛰어난 선수들이 넘쳐났던 A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했던 다른 우수한 선수들이 B팀에 수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헬무트 쇤 감독이 A대표팀의 조직력을 고려하여 다분히 [[FC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양팀 선수층 위주로 A대표팀을 꾸렸던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하위권팀에 소속된 뛰어난 선수들이 B팀에 많이 소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클럽 경기 일정이 많아지고, A매치로 인정받지 못하는 B팀의 특성상 선수들의 동기 부여에도 한계를 보이면서 B팀은 사라지게 되었고 나중에 23세 이하 대표팀 등의 형태로 간접적으로 계승되었다.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을 거두었다. 조별 리그에서 독일은 첫 경기에서 스위스를 5:0으로 대파한 후, 2차전에서 아르헨티나와 비겼으나, 3차전에서 스페인을 이기면서 2승 1무의 성적으로 조 1위로 8강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브라질이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면서 독일은 대회 최고의 우승후보로 부각되었고, 그러한 평에 걸맞는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이며 8강에서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를 4:0으로 대파하였고, 4강에서 우승후보 소련을 만나 [[레프 야신]]의 놀라운 선방에도 불구하고 파상공세 끝에 두 골을 넣고 결승까지 올랐다. 결승전에서는 개최국 잉글랜드와 만났다. 이 경기는 장군멍군식으로 전개된 경기였다. 1:1 상황에서 피터스의 득점으로 잉글랜드가 앞서나갔고, 2:1 상황에서 베버가 동점골을 넣었는데 뱅크스와 무어는 이 이전 상황에서 공이 슈넬링어의 팔에 맞았으므로 잉글랜드가 프리킥을 차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주심이 무시했다. 2:2 동점 상황에서 경기는 연장전으로 이어졌고 [[제프 허스트]]의 튕겨져 나온 공이 골로 인정되는 오심[* 골로 인정되려면 골라인을 완전히 통과해야 한다. 영국 옥스포드대 공과대학과 임페이얼 칼리지의 연구 등에서도 이것이 노골임이 인정되었다.]으로 경기는 3:2가 되었다. 만회골을 위해 총공세를 펼치던 독일은 수비진까지 모두 잉글랜드 진영으로 올라와 공격에 가세했으나 체력의 한계로 인해 위협적인 찬스는 만들지 못했으며, 롱패스는 번번이 차단당했고, 이 상황에서 무어의 롱패스를 받은 허스트가 그대로 전진하여 득점시키면서 4:2로 경기가 종료되었다.[* 허스트가 막판 추가 득점을 상황도 관중이 난입하는 상황이어서 논란을 야기했다. 근데 어차피 독일 선수들이 쫓아가기를 포기한 상태였고 완벽한 1:1 찬스였기 때문에 이 골에 대해서 취소되어야 한다느니 하는 논란은 없다. 당시 경기를 뛴 베켄바우어도 훗날 인터뷰에서 잉글랜드의 우승에 대해 언급하며 무어와 찰튼을 치켜세울 때 세 번째 골에 대해서는 오심이라고 언급했지만, 네 번째 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 1970년대 === [youtube(SrAVbnAlqYs)] ▲축구 사상 위대한 팀 .. 1972-1974 독일 (Football's Greatest International Teams .. Germany 1972-1974)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3위를 기록했다. 조별 리그 3경기에서 3연승을 거두고 조 1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한 독일은 8강전에서 잉글랜드와 리턴매치를 갖게 되었다. 전반전에는 2:0으로 끌려갔으나, 후반전에 이르자 잉글랜드가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고 독일이 반코트 게임으로 경기를 주도하며 두 골을 성공시켜 경기는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연장전에서 마침내 역전골을 터트려 잉글랜드에 설욕하며 4강에 진출했다. 이탈리아와의 4강전은 연장전까지 이어지며 선취득점-동점-역전-재동점-재역전-재재동점-추가골이 이어지는 역대급 명승부를 펼친 끝에 4:3으로 석패하여 결승진출에 실패했다. 이것이 월드컵에서 독일이 이탈리아에 패배한 첫 경기다. 이전까지는 이탈리아와 무승부만 있었다. 이 경기에서 베켄바워는 이탈리아의 거친 파울로 쇄골이 부서지고 어깨가 탈골하는 부상을 입었으나 이미 2명을 교체한 후였기 때문에 삼각건으로 탈골된 팔을 상체에 고정시킨 후 끝까지 경기에 뛰는 투혼을 발휘하여 전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게르트 뮐러]]는 대회에서 총 10골을 성공시켜 득점왕에 올랐고, 그해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UEFA 유로 1972]]에서 [[헬무트 쇤]] 감독은 당시 분데스리가를 양분하던 [[FC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선수들을 주축으로 대표팀을 구성했다. 1970년 월드컵 대표팀 멤버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부상 등의 이유로 [[볼프강 오베라트]], [[베르티 포크츠]], 볼프강 베버 등이 참여할 수 없었다. 특히 1970년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며 그해 발롱도르 5위에 올랐던 중원 플레이메이커 오베라트의 공백은 적지 않은 타격이었다. 오베라트 대신 발탁된 이가 바로 [[귄터 네처]]였다. 네처 역시 분데스리가에서 오버라트와 쌍벽을 이룬 뛰어난 중원 플레이메이커였다. 헬무트 쇤 감독은 1970년 월드컵을 앞두고 오베라트와 네처를 공존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쇤 감독은 둘 중 오베라트를 주전으로 선택했다. 이후 네처는 오베라트에 밀려 대표팀에 승선할 기회를 많이 얻지 못했다. 하지만 네처 역시 분데스리가에서 맹활약하며 1971년 발롱도르 4위에 올랐고, 1972년 유로에서 주전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 서독 대표팀은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이며 승승장구했다. 베켄바워와 네처가 경기를 조율하면서 화려한 축구를 구사했고, 전방에는 어떻게 해서든 골로 결정짓는 [[게르트 뮐러]]가 있었다. 특히 예선 플레이오프 빅매치였던 잉글랜드전 웸블리 원정경기에서 잉글랜드를 완전히 압도하면서 3:1로 승리했다. 결승전에서는 소련을 상대로 일방적인 경기를 경기를 펼치며 3:0의 대승을 거두고 유럽 정상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 서독 대표팀이 보여준 창의적인 축구는 '아트사커', '람바참바 풋볼'이라 불리며 찬사를 받았다. 독일이 이런 창의적인 축구를 보인데는 판타지스타 패스마스터 [[귄터 네처]]의 역할이 컸다.[* 네처는 1972 유로에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고 이듬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유로대회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72년 발롱도르 투표 1~3위를 독일 선수들이 독식했다. (1위 [[프란츠 베켄바워]], 공동 2위 [[게르트 뮐러]], [[귄터 네처]]) 2000년대 중반 이전 독일 축구하면 투박하고 실리적인 축구를 떠올리지만 독일 축구가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닌데 대표적으로 유로 1972 당시 독일 대표팀은 브라질에 비견되는 아트사커를 구사한다는 찬사를 받았다. [[파일:external/www.matchhighlight.com/beckenbauermuller1974.jpg|width=600]] ▲[[1974 FIFA 월드컵 서독|1974 서독 월드컵]] 우승의 주역 [[프란츠 베켄바워]]와 [[게르트 뮐러]] 자국에서 개최된 [[1974 FIFA 월드컵 서독|1974 서독 월드컵]]을 위해 구성된 서독 대표팀은 당시 분데스리가와 유러피언컵을 호령하던 전성기의 [[FC 바이에른 뮌헨]] 주축 멤버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 '폭격기' [[게르트 뮐러]]를 위시하여, [[제프 마이어]], [[파울 브라이트너]], [[울리 회네스]] 등 베스트 11 중 6명이 바이에른 뮌헨 소속이었다. 당시 서독 대표팀은 [[귄터 네처]]와 [[볼프강 오베라트]]라는 두명의 뛰어난 중원 플레이메이커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오베라트는 1970 월드컵에서 주전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했고, 오베라트가 부상으로 빠진 1972년 유로에서는 귄터 네처가 활약하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헬무트 쇤]] 감독은 분데스리가에서 라이벌이었던 자존심 센 이 두 명의 플레이메이커를 공존시키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1972 유로에서 네처의 임팩트가 워낙 컸기 때문에 서독 국민들은 네처를 원했으나, 쇤 감독은 오베라트를 1974 월드컵 주전으로 선택했다.[* 귄터 네처는 1974년 월드컵 동독전에서 교체로 출전한 것이 전부였다. 1972년 유로에서 갑작스런 성공 이후 네처가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해서 폼이 떨어졌는데 이는 네처 스스로도 인정했다. 또 스타일 상 대표팀에서 네처와 베켄바워의 역할이 겹쳤고, 이때문에 베켄바워가 대표팀에서 네처를 견제했다는 썰도 있다. 네처가 레알 마드리드 선수였기 때문에 당시 독일의 쇄국정책 때문에 대표팀에서 탈락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어디까지 네처의 폼 저하가 주 원인이었다. 쇤 감독은 월드컵 전 평가전에서 계속 네처를 기용하며 어떻게든 그를 활용해보려고 노력했다.] 오베라트가 중원 플레이메이커로 선택되면서 서독 대표팀의 색깔은 72년과 다소 달라졌는데, 창의성 있는 아트사커 대신 활동량과 기동력, 전사와 같은 투쟁력이 보다 강조되었다는 평을 듣는다. 조별 리그 1, 2차전에서 서독은 칠레와 호주를 각각 1:0, 3:0으로 꺾었다. 3차전 상대는 동독이었다. 이 경기는 서독과 동독의 역사상 유일한 A매치였으며 당시에 상당한 화제를 모았던 경기였다. 그런데 서독은 이 경기에서 의외로 동독에 패하면서 조 2위로 8강에 진출했다. 서독 국민들은 마치 대한민국이 북한에게 패한 것과 같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고, 이에 헬무트 쇤 감독은 국민들에게 동독전 패배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해야만 했다. 다만 서독이 8강 리그에서 유리한 B조에 속하기 위해 고의로 동독전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74년 월드컵부터 8강, 4강 토너먼트 대신 2개의 조별리그로 치뤄지는 새로운 룰이 적용되었는데, 동독에게 패해 조 2위가 된 서독(1조 2위)은 유고슬라비아(2조 1위), 스웨덴(3조 2위), 폴란드(4조 1위)와 함께 B조가 된 반면, 1조 1위 동독은 브라질(2조 2위), 네덜란드(3조 1위), 아르헨티나(4조 2위)와 함께 A조가 되었다... 8강 리그 결과 A조에서는 토탈사커로 선풍을 일으키던 [[요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가 3승 무패로 결승에 올랐고, B조에서는 서독이 3승 무패로 결승에 올랐다. 양 팀 모두 3승무패로 결승에 올랐지만 유력한 우승 후보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의 강호들을 발라버리며 결승에 올라온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팀들을 이기고 올라온 서독보다 훨씬 큰 인기를 얻고 있었고 전세계가 네덜란드에 열광하고 있었다. 결승전이 시작하자마자 네덜란드는 크루이프 팬들에 의해 전설로 불리는 그 유명한 16번의 볼터치 후 크루이프가 [[회네스]]에게 걸려 넘어지면서 페널티킥으로 선취 득점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거기까지였다. 선취 득점 이후 일방적인 서독의 경기였다. 헬무트 쇤 감독은 크루이프를 봉쇄하기 위해 대인방어에 뛰어난 [[베르티 포크츠]]를 기용하였는데, 포크츠가 크루이프를 효과적으로 봉쇄하면서 네덜란드는 예전같은 경기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서독은 일방적으로 네덜란드를 몰아붙인 끝에 전반 25분 베른트 횔첸바인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파울 브라이트너]]가 성공시키며 동점을 만들었다. 이후 서독의 공세는 더욱 거세어졌다. 서독은 수비수인 브라이트너나 심지어 크루이프의 전담 마크맨인 [[베르티 포크츠]]까지 문전 돌파 후 슛을 날리는 등 수비수들까지 전천후로 공격에 가담하며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토털 풋볼이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네덜란드 앞에서 시전했다. 이렇게 서독은 수비수들까지 돌아가면서 공격에 가담하는 등 수시로 위치를 바꿔가며 유기적인 플레이를 펼쳤으며 리베로 베켄바워는 최후방에서 경기를 조율하는 동시에 크루이프의 침투를 무력화시켰다. 역전골을 넣게 위해 계속 밀어붙이던 독일은 전반 43분 [[게르트 뮐러]]의 골로 마침내 역전에 성공했다. 후반전에도 독일은 계속 기회를 잡았다. 뮐러가 두번째 골을 넣었으나, 오프사이드가 선언되었다. 그러나 이 오프사이드 판정은 오심으로 밝혀졌다. 85분에는 횔첸바인이 또다시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넘어졌으나, 주심의 휘슬은 울리지 않았다. 결국 2대1로 승리하며 서독이 두 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줄리메컵이 브라질에게 영구 수여된 이후 최초로 [[FIFA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린 팀이기도 하다.] [[UEFA 유로 1976]]에 서독은 1974년 월드컵 우승멤버와 비슷한 멤버구성으로 출전했다. 조 1위로 조별 리그를 통과한 독일은 8강전에서 스페인을 꺾었고, 4강전에서는 유고슬라비아에 4:2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전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초반에 두 골을 넣어 손쉽게 승리를 가져가나 했으나, 독일의 집요한 반격으로 [[디터 뮐러]]와 베른트 횔첸바인의 연속골로 2:2 동점이 되어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승부차기에서 4번째 키커 [[울리 회네스]]가 실축하면서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한편 회네스 다음 키커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키커 [[안토닌 파넨카]]가 바로 이 경기에서 [[파넨카킥]]을 시전하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유로 1976이 끝나면서 그동안 대표팀을 이끌었던 베켄바우어, 뮐러, 오베라트, 회네스, 하인케스 등이 은퇴하면서 대표팀은 세대 교체에 들어가게 된다.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앞두고 서독 대표팀은 [[클라우스 피셔]], 디터 뮐러, [[칼 하인츠 루메니게]] 등 신예들을 대거 기용하여 공격진을 꾸렸다. 이들은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게르트 뮐러를 퇴물로 만들며 득점왕 경쟁을 펼치던 뛰어난 자원들이었으나 막상 대회가 시작되자 경험 부족 때문인지 한결같이 부진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또 중원에서 경기를 조율하던 베켄바우어와 오베라트를 대체할 만한 걸출한 플레이메이커들이 부재했던 것도 컸다.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1라운드 조별리그에서는 2차전에서 멕시코를 6:0으로 바르기도 했지만, 1차전에서 지난 대회 4강 폴란드와 0:0 무승부를 기록한데 이어 3차전에서도 튀니지의 밀집수비를 뚫지 못하고 0:0으로 비겼다. 조 2위로 2라운드(8강)에 올랐다. 그러나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이은 막장 쓰레기 대회라는 오명에 맞게 아르헨티나의 손쉬운 우승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인지 강팀들이 모조리 A조에 묶였다. A조에 전대회 우승 및 준우승국인 서독, 네덜란드를 비롯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가 함께 묶였다. 서독은 1, 2차전에서 이탈리아, 네덜란드에 각각 0:0, 2:2 무승부를 거두었다. 3차전에서 오스트리아를 꺾고 4강에 오를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이미 네덜란드가 2승을 선취하면서 결승 진출이 확정되었고, 오스트리아에 승리를 거두더라도 결승 진출이 좌절된 서독은 오스트리아전에서 [[포크츠]]의 자책골 등으로 2:3로 패하면서 6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대규모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후 치뤄진 1978년 월드컵에서 서독은 기대에 비해 다소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이때 세대 교체로 새로 대표팀에 들어온 멤버들은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면서 1980년 유로 우승, 1982년 월드컵 준우승 등을 일궈낸다. ==== [[유프 데어발]] 감독 ==== 헬무트 쇤이 월드컵 종료 이후 은퇴를 선언하며, 독일 축구협회는 국가대표팀 수석코치와 아마추어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유프 데어발을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 1980년대 === [[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06eaf156d09c.jpg|width=650]] ▲[[유로 1980]] 결승전 벨기에전 선발 라인업([[하랄트 슈마허|슈마허]], [[만프레트 칼츠|칼츠]], [[슈틸리케]], K. 푀르스터, 디츠, [[슈스터]], 브리겔, 뮐러, [[루메니게]], [[호르스트 흐루베슈|흐루베슈]], [[클라우스 알로프스|알로프스]]) 1980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유로 1980]]을 앞두고 당시 대표팀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던 스트라이커 [[클라우스 피셔]][* 독일 대표팀에서 통산 45경기 32골이라는 기록을 남겼다.]가 부상으로 빠지고, 대체선수로 대표팀 경험이 없던 [[호르스트 흐루베슈]]가 승선하게 되면서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으나, 본선 조별리그 첫경기에서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만나 [[루메니게]]의 골로 승리하면서 4년전 결승전 승부차기 패배를 설욕했고, 두번째 경기인 네덜란드전에서는 78-79시즌 분데스리가 득점왕 [[클라우스 알로프스]]의 해트트릭으로 네덜란드를 꺾었다. 조 1위로 결승에 올라 결승전에서 호르스트 흐루베슈의 골로 벨기에에 2:1 승리를 거두고 우승했다. 네덜란드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알로프스는 대회 득점왕을 차지했고, 이 대회에서 활약한 루메니게는 80년, 81년 연속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을 거두었다. 아래에 서술될 [[히혼의 수치]]로 빛이 바랜 비운의 대표팀이지만 80년 유로 우승 멤버가 주축이 되어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실력이 뛰어났던 만큼 너무 자만했다는 점인데 그것이 결국 [[히혼의 수치]]라는 비극을 초래한 단초가 되었다. 이 대회 조별리그 3차전에서 '''[[히혼의 수치]]''', 또는 [[알제리]]에서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라 불린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 축구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라 불리는[* 차라리 1998년 월드컵 크로아티아전에 0:3으로 패한 것이 훨씬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 될 정도.] 이 사건은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르헨티나-페루전 등과 더불어 월드컵의 위상에 먹칠을 가한 흑역사로 남아있다. 독일은 전세계의 지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독일이라는 나라의 신뢰도에 먹칠을 가한 사건이기 때문에 독일 국내의 비판 여론도 거셌다. 내막은 이렇다. 우승후보였던 서독은 조별리그 첫 상대인 알제리를 아주 우습게 봤는데, [[유프 데어발]] 감독은 "알제리를 이기지 못하면 바로 기차타고 집으로 가겠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독은 만만하게 봤던 알제리에게 1-2로 패하는 이변의 희생양이 되면서 개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조별리그 2차전에서 [[루메니게]]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4-1 대승을 거두었지만, 알제리전의 패배가 문제가 되어 오스트리아와의 마지막 3차전을 앞둔 상황에서 아래과 같은 전적으로 2라운드 진출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 순위 || 팀 || 전 || 승 || 무 || 패 || 득 || 실 || 차 || 승점 || || 1 || 오스트리아 || 2 || 2 || 0 || 0 || 3 || 0 || +3 || 4[* 이 당시에는 이기면 승점 2점이었다.] || || 2 || 알제리 || 3 || 2 || 0 || 1 || 5 || 5 || 0 || 4 || || 3 || 서독 || 2 || 1 || 0 || 1 || 5 || 3 || +2 || 2 || || 4 || 칠레 || 3 || 0 || 0 || 3 || 3 || 8 || -5 || 0 || 서독은 3차전에서 오스트리아를 무조건 이겨야 했고, 먼저 2승을 거둔 오스트리아는 2점 차 이내로 패하면 2라운드 진출에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다. 토너먼트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1~2위 따른 유불리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게르만]] 형제 나라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서독은 파상공세를 펼쳤고 마침내 전반 11분 독일의 [[호르스트 흐루베슈]]가 득점하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양팀은 경기를 할 생각은 안하고 볼만 이리저리 돌리며 시간을 때웠다. 결국 그대로 경기가 끝나면서 서독과 오스트리아는 2라운드에 동반 진출했고 알제리는 2승을 거두고도 탈락했다. || 순위 || 팀 || 전 || 승 || 무 || 패 || 득 || 실 || 차 || 승점 || || 1 || 서독 || 3 || 2 || 0 || 1 || 6 || 3 || +3 || 4 || || 2 || 오스트리아 || 3 || 2 || 0 || 1 || 3 || 1 || +2 || 4 || || 3 || 알제리 || 3 || 2 || 0 || 1 || 5 || 5 || 0 || 4 || || 4 || 칠레 || 3 || 0 || 0 || 3 || 3 || 8 || -5 || 0 || 이 사건으로 독일은 알제리 뿐만아니라 전세계로부터 지탄을 받았다.[[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99&contents_id=2639|네이버 캐스트 특약]]. 독일 자국 내부 비판이 더 컸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무엇보다도 주변국들과의 관계와 신뢰 회복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알제리에서 공개적으로 이 사건을 [[안슐루스]](Anschluss)라고 부르며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운운했던 만큼 독일 스스로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범게르만주의]]의 부활로 보여질 수 있는 이 사건을 조기진화하기 위해 독일 언론 스스로 이 사건에 많은 비판을 가했다. 이 경기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부터는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같은 시간대에 진행하는 것으로 규정이 변경되었다.[* 훗날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16강에서 독일과 알제리가 만났을 때는 독일이 알제리를 이겼다.] [[파일:external/lh6.googleusercontent.com/2.jpg|width=650]] ▲[[1982 스페인 월드컵]] 결승전 이탈리아전 선발 라인업([[브라이트너]], [[슈틸리케]], [[하랄트 슈마허|슈마허]], 브리겔, [[루메니게]](주장), [[클라우스 피셔|피셔]], [[리트바르스키]], B. 푀르스터, [[만프레트 칼츠|칼츠]], 드레믈러, K. 푀르스터[* 결승에서 파올로 로시를 전담 마크했다.]) 82년 월드컵 당시 서독은 80년 유로에서 맹활약했던 클라우스 알로프스가 갑작스런 부진으로 대표팀에서 탈락하고, 득점기계 [[클라우스 피셔]]가 노쇠한 상황이었지만 월드 클래스로 성장한 [[칼-하인츠 루메니게]] 덕분에 여전히 우승 후보로 꼽혔다. 그러나 대회 도중 [[루메니게]]가 부상을 입는 악재를 겪게 된다. 다행히 루메니게의 대체 자원으로 투입된 신예 [[리트바르스키]]가 기대 이상으로 맹활약하여 루메니게의 공백을 메웠고 서독은 2라운드를 통과하고 준결승에서 [[플라티니]]가 이끄는 프랑스와 격돌했다. 루메니게가 부상으로 선발출장하지 못했지만 리트바르스키가 초반에 득점에 성공하여 손쉽게 풀어나가나 했더니 페널티킥을 헌납하여 동점이 되어 결국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전 전반에 연속으로 두 골을 먹고 3:1로 패색이 짙었으나 연장전에 교체 투입된 루메니게가 만회골을 넣었고, 이어 [[클라우스 피셔]]가 전매특허인 오버헤드킥을 작렬하며 극적으로 동점을 만들어 승부차기에 돌입했고 결국 결승에 진출했다.[* 신예 리트바르스키는 이날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고, 만회골과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1골 2어시스트로 맹활약했다.][* 승부차기에서 한때 한국 국대 감독을 맡았던 [[울리 슈틸리케|그 분]]이 키커로 나서서 실축했다. 실축하고는 그대로 푹 쓰러져 땅을 손바닥으로 치는 모습이 몹시 애잔하다...] 이 경기는 오늘날에도 독일에서는 '''[[세비야]]에서의 스릴러(Thriller von Sevilla)'''라고 부르는 명경기. 그러나 4강전에서의 체력 소모가 결승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결승에서는 [[파올로 로시]]가 이끄는 이탈리아와 맞붙게 되었다. 결승전에서 서독은 루메니게가 선발로 정상 출장하면서 루메니게, 피셔, 리트바르스키로 이어지는 3각 편대를 오랜만에 정상적으로 가동하였고 이 3인방은 연달아 이탈리아의 골문을 두드리며 가공할 만한 공격력을 선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리트바르스키, 루메니게, 피셔 모두 차례로 문전 앞에서의 찬스를 살리지 못하며 기회를 날렸고, 간간히 튀어나오는 이탈리아의 빠른 역습에 노쇠한 서독 수비진은 다소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전반 24분 브리겔의 무리한 수비로 페널티킥을 헌납했다. 이후 서독은 실점을 만회하기 위해 총공세에 나섰고 수비진까지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해 브리겔, B. 푀르스터가 차례로 슈팅을 날렸으나 역시 골문을 빗나갔다. 이후에도 루메니게의 슛이 빗나가는 등 서독은 결승전 내내 결정 짓지 못하는 장면을 반복했다. 후반 내내 브리겔, 슈틸리케, 푀르스터 등 서독 수비진은 이탈리아 진영까지 넘어와 공격에 가담하다가 이탈리아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면 수비 전형으로 전환하면서 극심한 체력 소모를 겪은 반면 이탈리아는 예의 수비 위주의 전술로 서독에 비해 체력을 아끼는 효율적인 운용을 펼치다가 빠른 역습으로 기회를 노렸고 이런 전술은 공격에 가담하고 있는 서독 수비진에게 매우 효과적이이서 적은 공격 기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연이어 득점에 성공하면서 3:0으로 앞서나가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막판 브라이트너의 만회골로 3:1으로 종료되었다. [[유로 1984]]에서는 조별리그에서 포르투갈과 무승부, 스페인과 경기에서 패배를 하며 1승 1무 1패로 4강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하고 5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4강 진출 실패의 책임을 지고 [[유프 데어발]] 감독이 자진사퇴하고 [[프란츠 베켄바워]]가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이 대회가 독일 대표팀에게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데어발 감독이 1980년 유로 우승과 1982년 월드컵 준우승을 거둔 검증된 대표팀 멤버에 수술을 가하며, [[루디 푈러]], [[안드레아스 브레메]], [[로타어 마테우스]] 등 신예들을 과감히 주전으로 기용하는 세대교체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 84년 대표팀은 유로 4강 진출에 실패하면서 당시에는 실패로 비춰졌으나 이때 세대교체로 등장한 인물들은 이후 1986 월드컵 준우승에 이어 1990 월드컵 우승을 이뤄내는 주역이 되었다. ====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 ==== 유로 1984 종료 이후, 수석코치 내부 승격의 전통을 깨고 베켄바워가 감독에 선임된다. [[파일:external/impromptuinc.files.wordpress.com/86-16.jpg|width=650]]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1986 멕시코 월드컵]] 준결승 프랑스전 선발 라인업([[하랄트 슈마허|슈마허]], 야콥스, [[브레메]], 에르더, 푀르스터, 브리겔, [[로타어 마테우스|마테우스]], 롤프, [[마가트]], [[루메니게]] (57. [[푈러]] 교체), [[클라우스 알로프스|알로프스]])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1986년 월드컵]]은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의 첫 메이저 대회였다. 여전히 서독은 강팀 중 하나이긴 했지만 이전만큼 주목을 받는 우승후보는 아니었다. 서독 대표팀은 세대교체 와중이었고 이로 인해 유로 1984에서 4강에 오르지 못하는 부진을 겪기도 했다. 과거 서독 대표팀의 스타플레이어들이 대거 은퇴했고, [[로타어 마테우스]], [[루디 푈러]], [[안드레아스 브레메]], [[피에르 리트바르스키]], 볼프강 롤프 등 20대 중반의 다소 생소한 신예들이 대표팀의 추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베켄바워 감독 역시 현역 은퇴 직후 아무런 지도자 경력 없이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기 때문에 경험 부족 문제가 지적되기도 했다. 86 월드컵은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플라티니]]의 프랑스,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 전통의 강호 브라질 등이 독일보다 더 주목받는 팀이었다. 그밖에 [[게리 리네커]]의 잉글랜드, 개최국 멕시코 등도 주목받는 팀이었다. 실제로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1986년 월드컵]]에서 서독은 조별리그에서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덴마크에 2:0으로 패하는 등 1승 1무 1패의 성적으로 조 2위를 기록했다. 사실 조별리그에서 득점보다 실점이 많았다. 16강에서는 모로코를 맞아 박빙의 경기를 펼치다가 종료 직전 [[로타어 마테우스|마테우스]]의 골로 가까스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개최국 멕시코를 맞아 박빙의 승부를 펼치며 승부차기 끝에 간신히 4강에 올랐다. 서독은 8강까지 강호들을 피해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접전을 펼치며 어렵게 4강에 올랐다. 그러나 서독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3-5-2를 바탕으로 한 톱니바퀴 같은 조직력으로 토너먼트에서 무실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대회가 진행되면서 독일의 조직력과 경기력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독일의 강점 중 하나인 강인한 체력도 대회 후반으로 갈수록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준결승에서 서독은 [[UEFA 유로 1984|유로 1984]] 우승국인 [[미셸 플라티니]]의 프랑스와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명승부를 펼칠 것이라는 세간의 기대와 달리 4강전은 서독의 일방적인 경기였고 2:0의 완승을 거두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기는 흡사 유로2012 4강전인 독일(1986년 프랑스)과 이탈리아(1986년 독일)와의 경기의 서막을 보는 듯 했다. 이탈리아는 조별리그에 스페인을 상대로 명승부를 펼치며 무승부를 기록했으나 이 후 크로아티아에 고전해 무승부를 거두며 1승 2무 조 2위로 8강에 진출했고 8강에서도 잉글랜드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간신히 4강에 진출한 반면 독일은 당시 포르투갈 - 네덜란드 - 덴마크로 이루어진 죽음의 조에서 3전 전승을 찍고 8강 체코를 상대로도 정규시간 내에 승리를 거두면서 이번에야말로 [[아주리 징크스]]를 깰 수 있다란 예상이 지배적이였으나 결과는 이탈리아의 2 : 1 승리, 그 것도 독일은 후반 막한 PK를 얻어 간신히 영패를 모면했을 뿐이다. ] 플라티니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축구 변방이었던 프랑스는 월드컵과 같은 큰 대회 경험이 부족했다. 프랑스는 8강에서 브라질과의 혈투를 치른 후 4강에서 급격하게 체력이 저하된 모습을 보였다. 서독 역시 8강에서 연장전과 승부차기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4강전에서 프랑스를 압도하는 경기력을 보였다. 또 서독이 특유의 조직력으로 플라티니를 철저히 봉쇄하자 플라티니에 크게 의존하던 프랑스는 결국 별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결승전에서는 대회에서 최고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디에고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와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서독은 2골을 연속으로 실점하며 패색이 짙었으나 후반에 교체투입된 [[루디 푈러]]가 맹활약하여 29분과 35분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루디 푈러]]가 연속골을 넣으며 극적인 동점에 성공했다. 그러나 후반 39분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부루차가]]가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3:2로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 후 베켄바워 감독은 마라도나를 지나치게 의식하여 수비 전술로 나간 것이 패인이었다며 자신의 전술적 선택을 후회했다고 한다.[* 마테우스의 인터뷰] 베켄바워 감독은 두 골을 먹힌 후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맞불 작전으로 전환하였고 루디 푈러를 투입하고 마라도나를 전담마크하라고 지시했던 마테우스에게 마라도나 마크를 하지 말고 공격에 가담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서독의 경기력이 확 살아나면서 순식간에 두 골을 만회했다. 물론 마테우스의 전담 마크에서 해방된 마라도나 역시 살아났지만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와 부르차가 등을 제외하면 클래스가 떨어지는 선수들이 많았고 처음부터 이런 방식으로 했다면 서독이 우승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많다. [[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2df01c1152c004b5aa4e4853e2248b0c.jpg|width=650]] ▲[[UEFA 유로 1988]] 준결승 네덜란드전 선발 라인업(헤르게트, 보로프카, [[위르겐 콜러|콜러]], [[푈러]], 임멜, [[클린스만]], 톤, [[브레메]], 밀, 롤프, [[로타어 마테우스|마테우스]]) 1988년 유로에서는 조 1위로 4강에 올랐다. 4강 상대는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오렌지 삼총사]]를 비롯한 호화 멤버로 구성된 네덜란드였다. 서독은 페널티킥으로 선취 득점을 했으나 이후 똑같이 페널티킥을 내줬고 결국 2:1 역전패를 당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서독을 이기고 결승에 진출한 네덜란드는 소련을 2:0으로 꺾고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 1990년대 === [[파일:external/impromptuinc.files.wordpress.com/1990-08-07-90.jpg|width=650]]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90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전 아르헨티나전 선발 라인업(베어톨트, [[보도 일그너|일그너]], [[위르겐 콜러|콜러]], [[기도 부흐발트|부흐발트]], [[푈러]], [[클라우스 아우겐탈러|아우겐탈러]], [[피에르 리트바르스키|리트바르스키]], [[안드레아스 브레메|브레메]], [[토마스 헤슬러|헤슬러]], [[클린스만]], [[로타어 마테우스|마테우스]]) [[파일:external/a.espncdn.com/Hu_131107_Deportes_Historia_Mundiales_Italia_1990_Alemania_campeon.jpg|width=760]] 1982, 1986 월드컵에서 연속 준우승에 머물렀던 서독은 삼수 끝에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마침내 세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86 월드컵에서 8강까지 천신만고 끝에 올라오며 그야말로 살아남은 팀이 강팀이라는 사실을 보였던 서독 대표팀은 90년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첫 경기부터 결승전까지 4강을 제외한다면 시종일관 상대를 압도하며 그야말로 강팀, 무적의 팀이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줬다. '압박축구' 전술의 유행으로 역대 최소득점으로 유명한 90년 월드컵에서 서독은 조별리그 1, 2차전에서 유고슬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를 각각 4:1, 5:1로 대파하는 가공할 만한 공격력을 보이며 우승후보답게 조 1위로 손쉽게 16강에 올랐다. 16강에서는 또다른 우승후보 네덜란드와 리턴매치를 갖게 되었다. 1990년 월드컵의 명경기로 꼽힌 이 경기에서 양팀은 독일 국가가 연주될 때 네덜란드 관중들이 야유를 퍼부으면서 휘슬이 울리기도 전부터 과열되기 시작했다.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며 초반 팽팽한 경기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돌파하던 [[루디 푈러]]를 발로 차 넘어뜨리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고 결국 둘은 동반 퇴장을 당했다. 레이카르트의 선제 도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스트라이커가 퇴장당하게 된 서독은 이후 투지가 불붙었다. 특히 네덜란드 선수들의 도발로 흥분했던 푈러를 격하게 뜯어 말렸으나 결국 푈러가 퇴장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클린스만은 이후 격한 감정 표출을 하며 네덜란드 수비진을 농락하며 골문을 연이어 강타했다. 동반 퇴장 이후 서독 선수들이 전의를 불태운 반면 네덜란드는 급격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서독이 네덜란드 진영에서 일방적인 경기를 펼친 끝에 [[위르겐 클린스만]]과 [[안드레아스 브레메]]의 연속골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8강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1:0으로 꺾은 서독은 4강에서 [[게리 리네커]]의 잉글랜드를 맞아 쉽게 이길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방심했는지 다소 지쳤는지 이전과 다르게 잦은 실수를 하며 베컨바워 감독의 얼굴이 차갑게 굳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의 강한 압박 전술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며 승부차기 끝에 결승에 올랐다. 결승전은 [[디에고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와의 리턴매치. 브라질, 이탈리아 등 우승후보들을 연이어 꺾으며 결승까지 올라온 아르헨티나는 토너먼트에서 수비 위주의 역습을 노리는 전략으로 승리해 결승까지 올라왔다. 결승전에서도 아르헨티나는 서독을 상대로 10백을 시전했다. 하지만 경기는 전반전 후반 한때 아르헨티나가 기회를 잡은 것을 제외하면 내내 서독이 몰아붙이는 일방적인 경기였다. 아르헨티나는 수비적인 전술로 임했지만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고 서독 선수들에게 숱한 돌파와 슈팅을 허용했으나 운좋게 실점하지 않으면서 아슬아슬한 경기를 이어갔다. 서독은 숱한 찬스를 만들며 슈팅을 날렸지만 문전 골결정력 부족으로 득점 기회를 번번히 날려버렸다. 후반이 되자 아르헨티나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결국 서독 선수들의 계속된 돌파를 거친 수비로 끊으며 연이은 퇴장을 당했다, 서독은 계속된 파상 공세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아르헨티나의 골문을 열지 못했으나 결국 [[안드레아스 브레메]]가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세번째 월드컵 우승을 이루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은 특히 독일이 징크스를 안고 있던 적지에서의 우승이었던데다[* 완전 반대상황이 2006년에 펼쳐지긴 했다.] 동독과의 통일 분위기가 한껏 조성된 상황에서 국민들의 기쁨을 배가시킨 우승이었다.[* 이 시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 [[굿바이 레닌]]에서 이 시기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있다.] 주장인 중앙 미드필더 [[로타어 마테우스]]는 공수를 오가는 전천후 활약을 펼치며 4골을 넣어 득점 2위를 차지했고, 그해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90 월드컵은 DFB가 '서독 대표팀'으로 출전한 마지막 대회이기도 하다. 대회가 끝난 후 베켄바워가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수석코치였던 [[베르티 포크츠]]가 후임 감독이 되었다. ==== [[베르티 포크츠]] 감독 ==== [[파일:external/lh4.googleusercontent.com/Fussball-Europameisterschaft-1992.jpg|width=650]] ▲[[유로 1992]] 결승 덴마크전 선발 라인업([[위르겐 콜러|콜러]], [[보도 일그너|일그너]], [[슈테판 에펜베르크|에펜베르크]], [[기도 부흐발트|부흐발트]], [[토마스 헬머|헬머]], [[슈테판 로이터|로이터]], [[카를하인츠 리들레|리들레]], [[위르겐 클린스만|클린스만]], [[토마스 헤슬러|헤슬러]], [[안드레아스 브레메|브레메]], [[마티아스 자머|자머]]) 통일 이후 첫 국제 메이저 대회였던 [[유로 1992]]에서는 주장 [[로타어 마테우스|마테우스]]가 부상으로 빠졌고, 대표팀의 3-5-2 전술에서 [[클린스만]]과 투톱을 이루었던 [[루디 푈러]]가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부상을 당해 대회를 접는 등 전력 누수가 있었다. 본선 조별리그에서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스코틀랜드]]에게 2:0 승리, [[CIS]]에게 1:1 무승부, 네덜란드에게 1:3 패배로 불안하게 4강에 진출했으나,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을 3:2로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변의 팀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덴마크]]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당초 [[루디 푈러|푈러]]와 [[위르겐 클린스만|클린스만]]의 백업 공격수로 대표팀에 승선했던 [[카를하인츠 리들레]]는 조별리그 첫경기에서 푈러가 불의의 부상을 당하며 대회에서 아웃되자 이후 결승까지 주전으로 활약하며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파일:external/lh6.googleusercontent.com/94%2520%25281%2529.jpg|width=650]] ▲1994 월드컵 조별리그 한국전 선발 라인업([[보도 일그너|일그너]], [[위르겐 콜러|콜러]], [[토마스 베르톨트|베어톨트]], [[마티아스 자머|자머]], [[슈테판 에펜베르크|에펜베르크]], [[기도 부흐발트|부흐발트]], [[토마스 헤슬러|헤슬러]], [[안드레아스 브레메|브레메]], [[위르겐 클린스만|클린스만]], [[칼 하인츠 리들레|리들레]], [[로타어 마테우스|마테우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부터 독일의 쇠락이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일은 전대회 우승국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조별리그에서 시원찮은 경기력을 보였다. 약체 볼리비아에 1:0의 진땀승을 거두었고, 스페인전에서는 1:1 무승부, 그리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과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3:2로 한국에게 자칫하면 역전패할 뻔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16강에 간신히 올랐다. 16강전에서는 벨기에를 만나 3:2로 꺾었지만, 8강전에서 불가리아에 1:2의 역전패를 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8강에서 탈락한다.[* 8강에서 '''이 대회 시작전까지 무승이었던 불가리아'''를 만나 후반전에 마테우스의 페널티킥으로 앞서나갔으나,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스토이치코프]]에게 프리킥으로 얻어맞고, [[이오르단 레치코프|레치코프]]에게 역전골을 내주어 1:2로 역전패를 당해 탈락하였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4강 진출 실패의 충격 이후 16년 만의 일이었다. 94 월드컵에서의 부진은 세대교체 실패가 주원인으로 꼽힌다. 유로 92부터 [[칼-하인츠 리들레]][* 리들레는 90 월드컵 엔트리에 들었고 우승 멤버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완전한 백업 멤버로서 주전으로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다. 리들레가 본격적으로 주전이 된 것은 92 유로부터였다.], [[마티아스 자머]],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새로 대표팀에 승선했으나, 나머지 멤버는 모두 90년 월드컵 우승 멤버였다. 새로 합류한 리들레나 자머도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게다가 대표팀에서 가장 어린 에펜베르크[* 대표팀에서 가장 어렸으나 대회 당시 만 25세였다.]는 조별예선 한국전에서 불미스런 일을 일으키고 대표팀에서 퇴출되었다.[* 한국전 도중 야유를 보내는 관중들을 향해 [[Fuck You|꼴뚜기질]]을 하다가 즉시 교체 및 귀국 조치를 당하고 더 이상 국제 무대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때문에 한국전 이후엔 백업 멤버 바그너[* 대표팀 통산 출전 6회.]가 출전했지만 에펜베르크의 공백을 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당시 독일 대표팀은 평균 31세가 넘는 94 월드컵 최고령팀이었다. 고령의 멤버들로 구성된 94 독일 대표팀은 엘니뇨로 인해 섭씨 36~39도에 달하는 기록적인 폭염으로 유명했던 94년 월드컵에서 체력적인 문제를 노출하면서 똥줄 경기력으로 일관했다. [[파일:external/lh6.googleusercontent.com/Eilts_96_Finale_DW__705749g.jpg|width=650]] ▲유로 1996 결승전 체코전 선발 라인업([[토마스 슈트룬츠|슈트룬츠]], [[마티아스 자머|자머]], [[마르쿠스 바벨|바벨]], [[디터 아일츠|아일츠]](46분 [[마르코 보데|보데]]), [[토마스 헤슬러|헤슬러]], [[토마스 헬머|헬머]], [[크리스티안 치게|치게]], [[슈테판 쿤츠|쿤츠]], [[메멧 숄|숄]](69분 [[올리버 비어호프|비어호프]]), [[위르겐 클린스만|클린스만]], [[안드레아스 쾨프케|쾨프케]])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2068993-002992D900000258-238_634x337.jpg|width=650]] [[유로 1996]]에서는 [[로타어 마테우스]]가 빠지고 그를 대신한 새로운 리베로 [[마티아스 자머]]를 중심으로 공격진에는 백전노장 [[위르겐 클린스만]]과 중고신인 [[올리버 비어호프]]가 활약했다. 특히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선수였던 비어호프는 이 대회에서 맹활약하며 깜짝 스타로 떠올랐다. 결승전에서 체코의 [[파트리크 베르게르|베르게르]]가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앞서나갔으나 교체 투입된 비어호프가 만회골을 넣어 동점을 만들었고, 연장전 전반 5분 비어호프가 극적인 역전 골든골을 넣으면서 2:1로 독일이 우승컵을 차지했다. 이로써 독일은 유로 대회 최다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파일:external/lh6.googleusercontent.com/bc9d3a746f1a.jpg|width=650]] ▲1998 월드컵 8강 크로아티아전 선발 라인업([[위르겐 콜러|콜러]], [[디트마어 하만|하만]], [[미카엘 타르나트|타르나트]], [[외르크 하인리히|하인리히]], [[올리버 비어호프|비어호프]], [[크리스티안 뵈른스|뵈른스]], [[로타어 마테우스|마테우스]], [[토마스 헤슬러|헤슬러]], [[옌스 예레미스|예레미스]], [[위르겐 클린스만|클린스만]](주장), [[안드레아스 쾨프케|쾨프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당시 대표팀의 핵인 [[리베로]] [[마티아스 자머|자머]]가 부상으로 대회에 출전할 수 없게 되자 대신 만37세의 노장 [[로타어 마테우스|마테우스]]의 대표팀 승선이 결정되었다. 16강에서 멕시코에 2:1 승리를 거두는 등 그럭저럭 8강에 올라왔으나, 8강에서 독일은 [[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크로아티아]]에 0:3으로 완패당했다. [youtube(TRaOd4pfKcw)] 이 경기에서 전반 막판에 뵈른스가 백태클로 퇴장당하는 역적질을 저지르며 독일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며 무너지기 시작한게 컸지만, 이 경기에서 크로아티아는 딱딱하고 투박한 독일식 축구를 어떻게 해체하는지 잘 알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하여 독일은 [[크로아티아]] 특유의 독일 약점 공략전술과 [[다보르 슈케르]], [[크로아티아]]의 [[LTE]]급 역습에 그대로 털려 결국 [[KO]]되고 말았다. 이때 당시 크로아티아는 조별리그에서 최고 허접 자메이카에게도 패한 일본을 상대로 하마터면 비길 뻔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고는 해도 '''처녀 출전국치고는 19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최대 돌풍팀이었다'''. 이 경기 이후 당시의 크로아티아에게 당한 충격은 [[독일인]]들에게 거의 종말, 나라 잃은 슬픔에 가까운 충격을 줬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독일은 [[크로아티아]]전 패배로 8강에서 탈락한 이후 독일축구는 약 6년간 최악의 암흑기를 겪게 된다. 또 94년 월드컵 8강전에서 불가리아에 패한 데 이어 [[1998년]] 월드컵 8강 크로아티아전 패배한 이후 독일은 한동안 [[동유럽]] 징크스, 동유럽 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 여전히 고전적인 3백을 고집해 현대 전술사의 흐름에 뒤쳐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 [[에리히 리베크]] 감독 ==== 동유럽 징크스로 인해 연속된 월드컵 4강 진출에 실패하고 이후 몰타와의 평가전에서도 졸전을 벌이자 결국 포크츠 감독이 사임하고, 독일 축구 연맹은 [[에리히 리베크]]를 감독으로 선임한다. [youtube(RPMMMSUaq20)] 이후 [[1999년]] 2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은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과의 평가전에서 처음으로 0:3의 완패를 당했고 [[1999년]] 7월,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또 다시 미국에게 0:2의 패배를 당해 토너먼트에 진출하지 못하는 최악의 수모를 당한다. 미국과의 경기에서 2번 맞붙어서 0:3, 0:2로 패배한 것이다. 당시 [[올리버 칸]]에 [[옌스 레만]], [[로타어 마테우스]]까지 출전한 독일을 미국이 2번이나 맞붙어서 3:0, 2:0으로 밟아버림으로써 전차군단이라는 독일 축구의 명성에 최악의 수모를 안겨주었다. 경기 내용 상으로도 미국에 아무런 힘도 못쓰고 슛팅 한번 제대로 못하고 완패를 당하는 독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비견될 최악의 패배는 2004년 4월 열린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 당한 1:5 대패를 들 수 있다. 그나마도 후반 막판까지 0:5로 지고 있다가 [[필립 람]]의 만회골로 간신히 영패를 면한 것.] ==== 암흑기? ====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후 그해 말에 독일은 드디어 염원이었던 통일을 이루었다. 통일 독일이 들어서면서 축구계에서는 월드 챔피언인 독일 대표팀이 기존의 서독 선수들은 물론 동독의 선수들까지 융합되면서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통일로 인한 경제적 침체와 지지부진한 [[세대교체#s-1|세대교체]]로 이전만큼의 위용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에리히 리베크]]의 암흑기로 대표되는 이 [[90년대]] 후반 ~ [[2000년대]] 전반은 독일 대표팀에게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할 수 있는 암흑기로, 당시 메이저 대회에서 기록한 성적들을 보면 이러하다.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 우승 * [[유로 1992]] - 준우승 * [[1994 FIFA 월드컵 미국]] - 8강전에서 탈락 그 유명한 [[슈테판 에펜베르크]]의 [[뻐큐|법규]]가 시전된 대회였다. 그것도 무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국대]] 앞에서... 이후 독일은 그 법규를 시전한 에펜베르크를 추방시킨 상태로 토너먼트전을 치렀고, 16강에서 벨기에를 꺾었지만, 8강에서 불가리아한테 역전패를 당해 탈락하고 말았다. * [[유로 1996]] - 우승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 8강전에서 탈락 * [[유로 2000]] - 조별리그 탈락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 준우승 * [[유로 2004]] - 조별리그 탈락 * [[2006년]] 월드컵 이후 암흑기 종료. [[FIFA 월드컵]],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6대회 연속 4강 이상 진출 [[1990년대]]에는 계속 하락세를 걸었기 때문에 녹슨 전차군단이라는 오명을 썼다. 마테우스가 부상으로 빠지고 [[마티아스 자머]]의 하드캐리해서 [[유로 1996]]을 우승해 통일 독일 최초로 메이저 대회를 우승하긴 했지만 1994, 1998 월드컵과 유로 2000, 2004에서 계속된 부진으로 이런 비아냥을 계속해서 들어야 했다. 가장 큰 이유는 통일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 부담으로 인한 재정 상황의 악화로 분데스리가 내 대형선수들이 유출되고, [[분데스리가]]가 상업적으로 저평가되어있어 해외 중계가 덜 되기 때문에 자국민들 빼고는 메이저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사람들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암흑기 시절 동안 '''메이저 대회 직전마다 뛰어난 자원들이 자꾸 부상에 시달리는 고질적인 비극이 매 대회 계속됐는데''', [[바이에른 뮌헨]]의 전설적인 테크니션이자 전차군단 공격의 선봉격인 [[메멧 숄]]은 잦은 부상으로 [[유로 2000]]을 제외하면 메이저 대회에 제대로 출전한 적이 없다. [[유로 2000]]에서 20세의 나이로 대표팀에 발탁된 [[제바스티안 다이슬러]]는 천재적인 플레이로 세계를 놀라게 하며 독일 최고의 재능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이 대회 이후 선수 커리어 내내 너무나 잦은 부상으로 우울증에 걸려 정신병 치료까지 받았으며, 결국 27세라는 한창 나이에 은퇴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유로 2000은 다이슬러가 참여한 처음이자 마지막 메이저 대회가 되고 말았다. [[올리버 칸]], 메멧 숄과 더불어 90년대 말 ~ 2000년대 초 바이에른 뮌헨의 전성기를 이끈 굴지의 중원사령관 [[슈테판 에펜베르크]]는 그 특유의 성깔머리로 대표팀 막내 시절인 1994년 월드컵 한국전에서 F*ck 사건으로 대표팀에서 영구 퇴출되어 이후 단 한 차례도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는 도르트문트의 전설적인 리베로이자 당시 독일 대표팀 전술의 핵인 [[마티아스 자머]]가 부상당하여 40세를 눈앞에 둔 노장 [[로타어 마테우스]]를 써야만 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이처럼 주전급 선수들의 줄부상에 [[독일인]]들은 눈물을 흘렸는데, 당시의 독일에 노장 선수들의 뒤를 이을 후배들이 없다시피 했던 역사들도 큰 몫을(?) 했다. 잘 거론되지 않지만, 독일 대표팀의 암흑기는 능력 있는 지도자의 부재도 한 몫 했다. 암흑기의 [[시발점]]이 된 시점의 감독인 [[베르티 포크츠]]는 유로 96 우승으로 명장 소리도 듣기도 했지만, 3백을 고수하는 등 전반적으로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뛰어나지는 않았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게다가 마테우스, 클린스만, 에펜베르크 등 자존심 강한 선수들이 즐비한 독일 대표팀에서 전임 감독 [[프란츠 베켄바워|베켄바워]]보다 선수 장악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도 받았다. 실제로 90년대 당시 독일 대표팀 선수들이 감독인 포크츠의 지도력에 불만을 갖고 마테우스를 더 따른다는 사실이 기사화되기도 하는 등 포크츠의 지도력과 선수 장악력은 줄기차게 구설수에 올랐다. 이는 조직력을 장점으로 하던 독일 대표팀에게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포크츠 정도의 능력과 커리어를 지닌 감독조차 당시 독일에는 없었다는 것. 포크츠가 저조한 성적 때문에 번번히 경질설에 시달리면서도 98년까지 장기집권한 것도 사실 포크츠를 대체할 만한 마땅한 감독 후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크츠의 후임 독일 대표팀 감독을 선출할 때도 심각한 인물난을 겪어서 감독으로서 실패에 가까운 커리어를 갖고 있던 [[울리 슈틸리케]]가 유력하게 거론될 정도였다. 그나마 막판에 뒤집혀서 [[에리히 리베크]]가 감독으로, 슈틸리케가 수석 코치로 부임하게 되었지만, 리베크 역시 전형적인 [[분데스리가]] 중하위권팀 감독이었다. 리베크의 후임인 [[루디 푈러]] 역시 지도자 경력이 없는 상태에서 독일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푈러의 후임인 클린스만도 마찬가지. 어쨌거나 [[요아힘 뢰프]]라는 걸출한 수석코치가 있었던 클린스만 시대에야 비로소 암흑기가 끝났고, 클린스만의 뒤를 이은 뢰프는 2021년까지 장기집권하였다. 부수적으로, 암흑기 시절에는 팀웍도 좋지 않았다. 사실 독일 대표팀은 과거에도 기술적으로는 세계 최고라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강호로 군림해온 것은 특유의 팀웍과 조직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암흑기에는 독일 대표팀의 가장 큰 장점인 팀웍에서도 문제를 노출했다. 무엇보다도 이전과 달리 감독 및 코칭스태프를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가 선수단에 팽배했다. 과거의 명감독들에 비해 카리스마가 부족한 포크츠가 대표팀 감독이 되면서 선수들이 감독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는 기사가 주기적으로 올라왔다. 후임 리베크 감독 시절에는 더욱 심해져서 훈련시간에 선수들이 수석코치 울리 슈틸리케를 비웃는 기사가 국내에까지 소개될 정도로 막장 분위기를 보였다. 80년대 이전에는 지도자들이 뛰어난 커리어를 가진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였던 탓도 있으나 이 시절에는 분데스리가에 워낙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뛰어난 선수들이 대표팀 승선을 위해 엄청나게 경쟁했으며 대표팀 훈련장에 와서는 감독과 코칭스태프들에게 인정받고 눈도장 찍기 위해 헌신적인 자세로 훈련에 임했다. 하지만 분데스리가의 암흑기인 90년대에는 세대 교체를 하고 싶어도 그럴만한 젊은 인재들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노장들만 계속 반복해서 대표팀에 승선하게 되었는데, 나이도 많고 대표팀 경력도 많고 대체 자원도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노장들이 코칭스태프에게 고분고분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세대교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노장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니 대표팀 경력이 짧은 젊은 선수들도 곧 마찬가지 태도를 보였다. == 21세기 == === 2000년대 === [youtube(DNR5toJQnV0)] (유로 2000에서 포르투갈에게 0:3으로 패배를 당했던 경기 장면) [[유로 2000]]은 독일 대표팀 역대 최악의 대회라 부를만 하다. 독일은 조별리그에서 꼴지인 4위를 차지하며 탈락하고 말았다. 독일은 톱시드로 A조에 배정됐다. 그러나 조별리그 첫경기인 루마니아전에서 1-1로 비기며 불안하게 시작하더니, 두번째 경기인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전에서 [[앨런 시어러]]의 골로 0-1로 패하고 말았다. 이날 패배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결승에서 석연찮은 판정으로 잉글랜드가 우승한 이후 처음으로 독일이 A매치에서 잉글랜드에 패한 경기였다. 그리고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포르투갈의 [[세르지우 콘세이상]]에게 해트트릭을 얻어 맞으면서 '''0:3'''으로 참패하여 1무 2패로 A조 최하위로 탈락했다.[* 잉글랜드는 조3위로 동반 예선탈락했다.] ==== [[루디 푈러]] 감독 ==== 위의 유로 2000 성적을 이유로 대표팀 감독이 교체된다. [youtube(dUHTT2VnKao)] 2002년 월드컵 유럽지역예선에서는 [[뮌헨]] 홈구장에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에게 '''1:5'''로 대역전패하는 망신을 당해 월드컵 본선진출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1930년대 오스트리아전 이래 독일 국가대표 홈경기에서 70년 동안 최고실점 경기였다.[* 70년전에 오스트리아에 0:6으로 진 적이 있다. 1930년대 오스트리아는 섀도우 스트라이커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티아스 신델라]]라는 엄청난 슈퍼스타를 앞세워 월드컵 4위를 기록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던 강팀이었다.][* 이 경기 주심은 그 유명한 [[피에를루이지 콜리나]] 심판이었다. 이후 이상하게도 콜리나 심판과 독일과의 악연이 [[2002 한일 월드컵]] 결승전까지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이 경기가 있기 전에 독일 축구 협회에서 콜리나에게 선물이라고 준 게 하필이면 '''[[헤어드라이기|이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스페인도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이와 비슷하게 네덜란드한테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스페인 vs 네덜란드|'''1:5'''로 대역전패]]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날 대패하기 전까지 26년 동안 잉글랜드를 비롯한 영연방국가의 대표팀이 독일 대표팀을 이긴 적은 단 두번밖에 없을 정도로 독일은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잉글랜드에게 1:5로 역전당한 것도 충격이지만 '''마이클 오언''' 단 한사람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것은 더더욱 충격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2002 한일 월드컵|본선]]에서 독일은 준우승을 차지했고, 잉글랜드는 8강에서 브라질에게 발목이 잡혀 탈락했다.) 물론 이때 독일은 승점 3점 차로 조1위였고 잉글랜드는 월드컵에 나가기 위해 반드시 독일을 꺾어야 한다는 동기부여가 있기는 했다. 아무튼 이 경기 이후 상황은 뒤바뀌어 독일이 월드컵 진출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후 독일은 플레이오프에서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우크라이나]]와의 1차전에서도 0:1로 끌려간 상황에서 [[미하엘 발락]]이라는 구세주가 나타나 동점골을 터뜨려 간신히 무승부로 이끌고 2차전에서도 홀로 두 골이나 뽑아내는 원맨쇼로 이겨서 [[2002 한일 월드컵]] 본선에 겨우 진출한다. [youtube(1aESAe_SQcw)] 독일 축구 역사상 최악의 경기로 폭력사태까지 터진 독일과 카메룬의 경기장면이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메멧 숄]]이 부상으로 쓰러지고 독일의 기대주였던 차세대 테크니션 [[제바스티안 다이슬러]]도 부상, 거기에 레버쿠젠 3연준의 주역인 수비의 핵 [[옌스 노보트니]]마저 쓰러지는 악조건에서도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대진운에서 행운이 따라준데다가 [[올리버 칸]]이라는 전설적인 골키퍼와 위기때마다 터져준 [[미하엘 발락]]의 한방 그리고 쓰리백의 안정적인 수비 활약으로 가능했다. 조별예선 첫번째 경기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사우디아라비아]] 전에서는 8:0의 기록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카메룬 축구 국가대표팀|카메룬]]의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독일이 2:0의 승리를 거두었는데 양팀 퇴장 1명씩, 경고 6명을 받은 최악의 혈전이었다.[* 그 퇴장도 모두 경고 누적으로 인한 퇴장이기에 팀 당 8개의 옐로 카드가 제시된 것이다.] 독일은 카메룬에 승리를 거두고 16강에 진출했으나 주심의 카드남발이 심했다 쳐도 너무 거친 경기였다.[* 이후 [[2006 FIFA 월드컵 독일|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심한 난투극으로 얼룩진 즉, [[2006 FIFA 월드컵 독일/16강/포르투갈 vs 네덜란드|뉘른베르크의 전투]]라고 불리는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포르투갈]] 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네덜란드]]의 16강전 경기가 열렸다.] [* 그런데 사람들은 당시 독일의 성과를 대부분 발락과 칸의 투맨쇼로 그나마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둘이 워낙 압도적인 퍼포먼스였으니...당연하다. 그리고 막말로 우크라이나와의 플레이오프에서 발락이 없었으면 독일은 진작에 예선에서 탈락했을 수도 있다. 2002 월드컵에서 독일은 주전들의 줄줄이 부상을 메첼더, 프링스 등 젊은 선수들의 기대 이상의 활약과 [[디트마르 하만]]의 중원 조율, [[미하엘 발락]], 마르코 보데의 위기상황에서의 한방, 거기에 [[올리버 뇌빌]]의 기동성과 [[베른트 슈나이더]]의 창의성,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고공폭격이 더해져 의외로 밸런스 자체는 잘 잡힌 팀이었다. 워낙 구식전술을 들고나온 [[루디 푈러]] 감독 체제하의 답답한 공격전개로 자국 팬들조차 야유했지만 2002년 월드컵만 하더라도 쓰리백이 의외로 먹히면서 수비라인이 어느정도 제 몫을 해주었고 4강전부터는 포백으로 과감하게 전환하는 등 2002 월드컵은 '''그래도 그 최악의 부상악령의 상황에서 기대이상의 성과를 얻은 것이다.'''] 이후 독일은 토너먼트에서 다시는 못 올 꿀대진을 받았다. 16강 상대는 당시 남미 예선을 4등으로 겨우 통과했던 파라과이였다. 그런데 독일은 파라과이를 상대로 졸전 끝에 경기 막판에 터진 [[올리버 뇌빌]]의 결승골로 1 : 0 승리를 거두며 8강에 올랐다. 8강 상대는 미국이었는데 독일은 미국을 상대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미하엘 발락]]의 결승골로 간신히 1 : 0 승리를 거두었다. 4강 상대는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그 대회 우승후보들로 거론된 팀들과 연달아 씨름을 하느라 지쳐서 기진맥진한 개최국 대한민국이었다. 독일은 이 지칠대로 지친 대한민국을 상대로도 역시 고전하다가 [[미하엘 발락]]의 결승골로 간신히 1 : 0 승리를 거두었다. 결승전 상대는 역시 지역예선에서 6번이나 패배할 정도로 비실거렸던 브라질이었다. 독일은 브라질에 0 : 2로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물론 [[2002년]]의 준우승은 16강전 및 토너먼트에서 축구계에서 강호로 인정받는 팀을 만나지 않은 최상의 대진운 탓이 크다고 말하지만 독일에게는 기대 이상의 실적을 올린 것이다. [youtube(VTxoKxyuMcU)]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결승|2002 한일 월드컵 결승전]] 독일과 브라질의 결승전에서 베를린에서 독일인들의 독일 대표팀 응원 모습이다. 결승전에서 0:2로 브라질에 패배했으나 독일인들은 독일의 예상밖의 월드컵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얻으며 독일인들로 하여금 4년간 최악의 암흑기를 겪은 자국 축구에 대한 희망을 얻게 해준 대회였다. 그러나 이 후 프랑스와의 친선경기에서 0-3 완패, 헝가리와의 경기에서도 0-2로 패하더니, 4월달에 열린 루마니아와의 [[UEFA 유로 2004]]를 앞둔 마지막 평가전에서 무려 1-5 대패를 당하면서 2002년 이전으로 리셋이 되어버렸고, 자국에서는 아예 유로대회에 불참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맹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99년 미국전보다도 훨씬 더 심한 졸전이였다. 여기서 독일은 경기내내 패스자체가 루마니아 선수들에게 죄다 컷팅당했고, 당시 루디 퓔러 감독은 발락에 대한 의존증을 줄이기 위해 프랑코 바우만, 파비안 에른스트 카드를 과감히 꺼내들었으나 전반에만 4골이나 먹히면서 자멸했다. 독일의 만회골도 후반 89분, 루마니아 선수들이 봐줘서 노마크 상태인 필립 람이 냅다 꽃을 중거리 골이였으니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그 자체였다.] 결국 [[UEFA 유로 2004]]에서 독일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조별리그 첫 경기인 네덜란드전에서 1:1로 비길 때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약체 라트비아전에서 9백 수비를 뚫지 못하고 0:0으로 비기고 말았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가 필요했던 체코와의 3차전에서 독일은 90년대 바이에른 뮌헨이 재현한 5-4-1 포지션까지 꺼내들면서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결국 체코에 1:2로 패하면서 조3위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사실 이 시기 [[루디 푈러]]감독이 무작정 쓰리백만 고집했던건 아니였다. 당시 독일도 4-4-2나 4-2-3-1[* 4-2-3-1은 의외로 역사가 깊은 포메이션이다. 데포르티보가 이 포메이션으로 2000년대 초 전성기를 구가했고, 90년대만 하더라도, 거스 히딩크 감독의 네덜란드와 레알 마드리드가 틈틈히 사용했던 포메이션이다.] 포메이션을 정착하기 위해 애를 썼다. 플레이메이커에 [[메멧 숄]], 혹은 [[세바스티안 다이슬러]]로 두고 좌우에 올리버 노이빌레, 베른트 슈나이더, 혹은 토르스텐 프링스를 두며, 더블 볼란치에 [[미하엘 발락]]과 [[프랑크 바우만]] 혹은 [[파비안 에른스트]]와 [[세바스티안 켈]], 시몬 치우머를 배치시키고, 풀백에 [[마르코 레머]], [[옌스 노보트니]], [[크리스토프 메첼더]], [[외르크 뵈메]] 혹은 토르스텐 프링스를 배치시키면 됐었다. 하지만 숄과 다이슬러, 노보트니는 유리몸이였고 레흐머와 뵈메는 [[미카엘 타르나트]]과 [[마르코 보데]]만큼의 클래스를 보여주질 못했다. 즉 플레이메이커는 없고, 풀백들은 엉망이니, 그렇다고 4-4-2를 쓰자니, 발락의 파트너로 굳게 믿었던 바우만과 치우머, 에른스트는 국대에만 오면 호러쇼를 보여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적어도 2006년 슈바인슈타이거, 메르테자커등 영건들이 성장하기 전까지 모든 팀의 코어를 발락 1명에게 몰빵할 수 밖에 없었다. 토르스텐 프링스의 경우 알다시피 풀백자원의 고갈로 불가피하게 풀백에 배치되면서 발락과의 중원호흡을 2006년 월드컵 이전까지 맞추질 못했다. 독일 국가 대표팀이 암흑기를 겪는 동안 [[분데스리가]] 클럽들은 적어도 2002년도까지 어느정도 경쟁력을 보여주었다. 통일로 인한 경제난으로 분데스리가의 위상이 과거보다는 떨어졌지만 1995-96 [[UEFA 유로파 리그|UEFA컵]]을 우승한 [[FC 바이에른 뮌헨]], 1996-97 시즌에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무려 [[UEFA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고 [[FC 샬케 04]]가 UEFA 컵을 들어올리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바이에른 뮌헨은 1998-99 시즌 챔스 준우승[* [[캄 노우의 기적(1999년)|캄 노우의 기적]]으로 유명한 그 경기다.], 2000-01 시즌 챔스 우승을 달성했고 [[바이어 04 레버쿠젠]]도 2001-02 챔스 준우승의 쾌거를 올리는 등 독일 클럽들도 결코 몰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2-03 챔피언스리그에서 바이에른 뮌헨의 광탈에, 16강에 간 레버쿠젠도 8강 진출에 실패하면서 불안감을 보이더니 2003-04 시즌 도르트문트의 챔스 탈락, 그리고 UEFA컵에서도 샬케와 동반 조기탈락에, 바이에른 뮌헨과 슈투트가르트도 16강에 그치면서 이 시기 UEFA 랭킹 포인트를 달랑 2점밖에 받지 못했다. 2004-2005 시즌엔 레버쿠젠, 브레멘, 뮌헨이 모두 16강을 돌파했지만 레버쿠젠은 첼시에게 완패당하고 브레멘은 리옹에게 2-10으로 학살당하면서 결국 바이에른 뮌헨만 아스날을 잡고 8강에 진출하지만 뮌헨마져 첼시에 4-5로 패배하면서 또 다시 4강진출에 실패, UEFA컵에서는 도무지 힘을 쓰지 못했고, 05-06시즌에 UCL에선 아예 세리에A클럽에게 학살당하면서 또 16강에서 탈락. 그나마 샬케가 UEFA컵에서 4강까지 갔지만 세비아에게 0-1로 패하면서 2006년 말까지 분데스리가는 프랑스 리그앙에게도 포인트가 밀리며 5위까지 추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암흑시대는 2000년대 독일의 유망주 정책이 08-09시즌 서서히 빛을 보면서 다시 경쟁력을 갖추게 되고 09-10시즌 리그 랭킹 포인트 점수 1위를 기록하면서 동시에 다시 부활한 국대와 같이 암흑기를 끝내게 된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암흑기 시기 동안 독일 축구협회는 독일 축구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필요성을 느끼고 유소년 축구에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그 결과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유소년 축구 시스템을 갖췄다는 평을 받는다. 유소년 정책이 결실을 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부터다. ====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 ==== [[UEFA 유로 2004]]에서 형편없는 경기력으로 조별예선에서 탈락하자 독일 축구협회는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전술면에서 비판을 받아왔던 [[루디 푈러]] 감독을 경질하고 후임 감독으로 [[위르겐 클린스만]]을 내정했다. 클린스만 감독은 당시 부진했던 대표팀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했는데, 당시에는 다소 생뚱맞게 비춰졌던 부분도 있어서 언론이나 축구협회와 다소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의 필요성에는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라 결국 일단 클린스만이 하는대로 내버려 둬 보자 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클린스만은 [[필립 람]],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루카스 포돌스키]], [[페어 메르테자커]] 등 젊은 피를 대거 주전으로 발탁하여 적극적으로 세대교체에 나섰다.[* 다만 이들은 전임 푈러 감독 시절 대표팀에서 처음 승선했다. 하지만 주전으로 도약한 것은 클린스만 감독 시절이다.] 2004년에는 [[2004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아시아 원정|아시아 원정]]을 통해 신예들을 시험하기도 했다. 클린스만호가 본격적으로 선보인 것은 2005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였다. 독일은 4강에서 [[호나우지뉴]], [[호비뉴]], [[아드리아누]] 등이 활약한 브라질에 2:3으로 석패하면서 3위에 그쳤지만, 신예 멤버들과 기존 멤버들이 조화를 이루며 골고루 활약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결국 [[2006 독일 월드컵]]에서 3위에 오르면서 부활에 성공했다. 이로써 녹슨 전차는 [[신태용호/2018 FIFA 월드컵 러시아/독일전|12년 후의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옛말이 되었다.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독일은 조별 리그에서 3승 무패를 거두고 조 1위로 16강에 올랐다. 16강전에서는 스웨덴을 2:0으로 가볍게 꺾고 8강에 올랐다. 8강에서는 우승후보 아르헨티나와 격돌했는데, 양팀은 승부차기까지 가는 팽팽한 경기를 벌였고, 독일이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는 숙적 이탈리아와 대결을 벌였다. 2006 이탈리아 대표팀은 역대 이탈리아 대표팀 중 거의 최약체로 꼽히는 팀이었다. 월드컵 직전 평가전에서도 졸전을 펼치며 연패하는 등 심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월드컵 개막 직전 세리아A 승부조작 스캔들이 터지며 이탈리아 대표팀은 최악의 상황에서 월드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승부조작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이탈리아 대표팀은 코너에 몰린 쥐처럼 초인적인 힘을 내며 예상외의 선전을 펼치고 있었다. 4강전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팽팽한 접전이었다. 이탈리아는 이번 월드컵에서 죽기살기로 경기에 임하고 있었다. 승부는 연장전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 가려지지 않았고, 승부차기에 엄청나게 강했던 독일은 연장전 막판에 내심 승부차기를 반기는 분위기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이 승부차기에 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탈리아는 오히려 막판에 매섭게 몰아쳤고, 연장전 종료가 다가오면서 집중력이 흐트러진 독일 대표팀의 수비를 뚫고 [[파비오 그로소]]가 선제골을 넣었다. 이후 추가시간을 포함해 남은 약 2분의 시간동안 독일은 동점을 위한 총력전에 나섰지만 오히려 이탈리아의 역습을 허용하여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추가골을 넣으며 2:0으로 패하고 말았다. 3·4위전에서는 신예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맹활약으로 포르투갈을 3:1로 이기고 최종순위 3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젊은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2006 독일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였고, 특히 [[루카스 포돌스키]],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등 신예들이 기대 이상의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대표팀의 앞날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 [[요아힘 뢰프]] 감독 ==== 독일 월드컵을 마무리 하고, 클린스만이 자의로 사임. 후임으로 수석코치였던 요아힘 뢰프가 감독으로 승격된다. 클린스만 체제에서도 전술 부분은 뢰프가 맡아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16년이라는 기나긴 뢰프 감독의 시기가 진행된다. [[UEFA 유로 2008]]에서는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 대회에서는 그동안 대표팀의 주축이었던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가 다소 노쇠한 모습을 보이면서 2006 월드컵 때보다 저조한 활약을 보였으나, 미하엘 발락과 필립 람이 건재하고, 2006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며 앞으로 독일 대표팀을 이끌어갈 차세대 스타로 주목받은 [[루카스 포돌스키]]와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날라다니며 독일을 토너먼트에서 캐리하였다. 독일 대표팀은 조별리그에서 폴란드와 개최국 오스트리아를 제압했으나 크로아티아에 발목을 잡히며 조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8강과 4강에서 각각 초절정의 흐름을 타고 있던 호날두의 포르투갈과 터키를 3대2로 제압하며 저력을 보여주었고,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스페인의 티키타카를 만나 너무 무기력한 모습으로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특히 절정의 세트플레이 감각을 보이던 클로제와 슈바인슈타이거가 결승에서 몇차례 세트플레이찬스를 어처구니없이 날려버렸고 교체멤버 케빈 쿠라니는 삽질의 끝판을 보여주며 모처럼의 메이저대회 우승 기회를 날리고 말았다. 2006년 월드컵에서 세대교체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독일이지만, 이후에도 세대교체는 계속되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에서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등장했다. 특히 2009년 U-21 우승멤버들이 대거 투입되었는데, [[토마스 뮐러]], [[메수트 외질]], [[사미 케디라]], [[제롬 보아텡]], [[마누엘 노이어]]가 그들이다.[* [[마츠 후멜스]]와 [[회베데스]]도 2009 U-21 대표팀 출신이다. 이들은 2010 남아공 월드컵 스쿼드에는 포함되지 못했지만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다.] 특히 [[메수트 외질]]과 [[토마스 뮐러]]는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남아공 월드컵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사실 이들 젊은피들은 대표팀에서 검증된 자원이 아니었고 독일 국내에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신예들이었다. 독일 국내에서도 이들 신예들에 대한 기대가 크지는 않았고, 그보다 월드컵 개막 직전에 대표팀의 정신적 지주 [[미하엘 발락]]이 부상으로 제외되면서 대표팀 경기력에 우려의 목소리가 컸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회가 시작되자 이들 영건들의 활약으로 독일은 놀라운 경기력을 보였고 이에 대표팀에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여겨졌던 발락은 조용히 대표팀 은퇴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 2010년대 === 전반적으로 [[필립 람]]이 팀에 차지하는 지분이 절반 이상인, 이른바 몰빵된 팀이었다. 때문에 필리프 람이 뛰면 일부(천적인 이탈리아나 급부상한 스페인)를 제외하고는 승승장구하는 팀이었으나 필리프 람이 빠지자 이런저런 비주류 팀들에게 쳐발렸다. 필리프 람 대신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주장 완장을 차고 뛴 [[유로 2016]] 지역예선에서는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0 : 2로 패배하던데 이어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를 0 : 1, 1 : 1 로 끝내 아일랜드를 이겨보지 못하고 예선을 마무리했으며 이후 [[2018년 FIFA 월드컵 러시아|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F조#s-4|0 : 1]]로 패배한 게 문제가 아니라 경기력이 너무 엉망이라서 보다못한 [[박지성]]조차 "저런 놈들은 대한민국과 비벼볼만하다"고 평가할 정도였었으며 실제로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결국 [[신태용호/2018 FIFA 월드컵 러시아/독일전|0 : 2]]로 패배하면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본선 조별라운드 1차전에서 독일은 호주를 4 : 0으로 이기면서 우승후보의 위력을 보이나 했더니 세르비아전에서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경고누적으로 퇴장당하고 경기가 급격히 기울면서 세르비아에 0 : 1로 패배하는 이변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3차전에서 가나를 상대로 고전 끝에 [[메수트 외질]]의 결승골로 1 : 0 신승을 거두고 2승 1패의 전적으로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16강에서는 [[잉글랜드]]를 4 : 1로 대파하며 뮌헨에서 당했던 1 : 5 굴욕을 9년만에 철저하게 갚아주었다.[* 다만 2 : 1로 앞선 상황에서 [[프랭크 램파드]]의 골 라인을 넘은 슈팅이 골로 인정되지 않은 오심이 있었다.] 8강전에서는 [[메시]], [[이과인]], [[테베즈]], [[디 마리아]] 등 호화진용을 구축한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의 아르헨티나와 격돌했다. 박빙의 승부가 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뚜껑을 열어보자 독일이 충격적일 정도의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4 : 0'''의 압승을 거두면서 독일은 대회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랐다.[* 물론 당시 아르헨티나 감독인 [[디에고 마라도나]]의 최악의 지도력도 한몫하기는 했다.] 그러나 4강 스페인전에서는 [[토마스 뮐러]]가 경고누적으로 출전하지 못했는데 4강전에서 뮐러의 공백은 컸다. 또 16강전과 8강전에서 독일이 보여준 가공할만한 역습 패턴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고 나온 [[스페인]]이 강한 전방압박과 특유의 점유율 축구로 독일의 역습을 사전에 차단하는데 성공했고, 결국 독일은 스페인에 0 : 1로 졌다. 즉, 독일은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의 [[카를레스 푸욜]]에게 결승골을 내주고 결승 진출에 실패한 것이다. 독일을 이긴 스페인은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공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독일은 3위 결정전에서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를 맞아 3 : 2 승리를 거두고 3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토마스 뮐러]]는 남아공 월드컵 영플레이어상과 골든슈를 차지했다.]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2014 브라질 월드컵]] 지역예선에선 오스트리아, 스웨덴, 카자흐스탄, 아일랜드, 페로 제도랑 같은 조를 이뤄서 쉽게 본선진출을 이룰 것으로 예측되었고, 안방에서 4 : 0으로 앞서다가 연달아 4골을 먹히며 비긴 스웨덴 경기를 빼고 전승하면서 결국 최종예선 결과 9승 1무로 압도적인 1위로 본선 진출 확정했다.[* 한편 2위인 스웨덴은 플레이오프에서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게 털리며 탈락했다.] [youtube(a7IMPsyQg6k)]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2014 브라질 월드컵]]에선 포르투갈, 가나, 미국과 함께 [[죽음의 조/축구|죽음의 조]]인 G조에 속했다. 독일의 조별리그 1차전 상대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버티던 포르투갈이었다. 상당히 어려운 경기가 될 것이란 예측과 달리 결과는 매우 싱거웠다. [[토마스 뮐러]]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독일이 '''4 : 0''' 대승을 거두었다.[* 물론 [[페페(축구선수)|페페]]가 [[토마스 뮐러]] 머리에 헤더를 가해서 퇴장당하며 포르투갈이 자멸한 게 컸다.] 그러나 2차전 가나와의 경기에선 매우 고전했으며 하마터면 질 뻔했다가 간신히 2 : 2 무승부를 거두었다. 3차전 미국과의 경기에서도 독일은 우세한 볼 점유율을 바탕으로 시종일관 공격적으로 밀어붙였으나 의외로 골을 넣지 못했고 후반전에 터진 [[토마스 뮐러]]의 결승골로 1 : 0 신승을 거두며 2승 1무의 전적으로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16강 상대는 바로 32년 전 [[히혼의 수치]]라는 악연으로 얽힌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였다. 수비의 핵인 [[마츠 후멜스]]의 결장과 [[요아힘 뢰프]]의 괴상하기 짝이 없는 '포터백'[* 포백 라인을 전부 [[센터백]]으로 구성하는 전술을 말한다.] 전술 그리고 [[슈코드란 무스타피]]의 희대의 민폐 플레이 때문에 알제리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렇게 90분을 하염없이 0 : 0으로 보냈다가 연장전에 간신히 [[안드레 쉬얼레]]와 [[메수트 외질]]의 골을 앞세워 2 : 1 신승을 거두고 8강에 올랐다. 그리고 8강 상대는 라이벌인 프랑스였다. 독일은 프랑스를 맞아 전반 13분에 터진 [[마츠 후멜스]]의 헤더골을 끝까지 잘 지켜 1 : 0 승리를 거두고 4회 연속 4강 진출에 성공했다. 4강 상대는 바로 개최국인 브라질이었다. 2002년 대회 결승전에서 맞붙은 후 12년 만에 재회한 두 팀. 누가 이길지 예측불허인 경기로 예상되었고 [[승부차기]]까지 갈 수도 있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으나 브라질을 상대로 무려 '''7 : 1'''이라는 믿을 수 없는 스코어로 '''[[미네이랑의 비극|대승리]]'''를 했다. 독일이 득점을 너무 많이 하자, [[차범근]]조차 "독일이 골을 그만 넣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말할 정도였다. 12년 만에 결승진출에 성공한 독일은 [[리오넬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에 1 : 0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통일 이후 처음으로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우승의 주역은 [[토마스 뮐러]], [[마누엘 노이어]], [[안드레 쉬를레]], [[필립 람]], [[마리오 괴체]]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