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1970> '''{{{#white {{{+1 동수}}}[br]冬壽}}}'''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안악3호분.png|width=100%]]}}} || ||<:><#191970><-2> {{{-2 [[안악 3호분|{{{#white 안악 3호분}}}]]}}}{{{-2 {{{#white 에 그려진 묘주의 초상화.}}}[* 안악 3호분이 동수의 묘가 아니라 왕릉이라는 소수설도 있는데, 이 주장에 따르면 묵서명 아래 그려진 장하독이 곧 동수의 초상화에 해당할 것이다.] }}} || ||<:><#191970> '''{{{#white 국적}}}''' ||<(>[[서진]] → [[전연]] → [[고구려]] || ||<:><#191970> '''{{{#white 작위}}}''' ||<(>도향후(都鄕侯)[* 고구려식 관등을 받은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데, 같은 중국계 고구려인인 [[진(고구려)|유주자사 진]]이 고구려에서 국소대형(國小大兄)이라는 토착 관등을 수여받은 것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 ||<:><#191970> '''{{{#white 직위}}}''' ||<(>[[사마(관직)|사마]](司馬)[br]평동장군(平東將軍)[br]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br][[낙랑군|낙랑]]상(樂浪相)[br]창려·[[현도군|현도]]·[[대방군|대방]][[태수]](昌黎玄菟帶方太守) || ||<:><#191970><|2> '''{{{#white 출생}}}''' ||<(>[[289년]] || ||<(>[[서진]] 평주[* [[안악 3호분]] 묵서명에는 유주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동수가 태어난 당시 요동군은 평주 소속이었다.] [[요동군]] 평곽현 도향[* 도향(都鄕)은 군이나 현의 치소가 있는 향(鄕)을 일컫는 말인데, 여기서는 평곽현의 치소를 가리킨다.] 경상리[br](現 [[랴오닝성]] [[잉커우시]] 가이저우시) || ||<:><#191970><|2> '''{{{#white 사망}}}''' ||<(>[[357년]] [[11월 25일]][* 음력 [[10월 26일]]] (향년 68세) || ||<(>[[고구려]] 양악성[* 동수의 정확한 사망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안악 3호분이 동수의 무덤이라면 동수가 생전 거주했던 지역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악군의 고구려 시절 지명은 [[삼국사기]]에 양악(楊岳), [[고려사]]에 양악군(楊岳郡)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의 행정구역 체계는 [[광개토대왕릉비]], [[모두루|모두루 묘지명]] 등의 금석문 자료에서 알 수 있듯 중국식 [[군현제]]와 달리 성(城)·곡(谷)·촌(村)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특히 성(城) 단위의 지명이 가장 많이 문증되므로 양악군의 당대 명칭은 양악성에 가까웠을 것이다.][br](現 [[황해남도]] [[안악군]]) || ||<:><#191970> '''{{{#white 성}}}''' ||<(>동(佟) / 동(冬)[* 전자는 [[진서]]와 [[자치통감]]의 표기, 후자는 [[안악 3호분]] 묵서명의 표기이다. 한자 동(佟)은 현대 한국 한자음 기준 '퉁' 또는 '통'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자치통감 주석에 "동(佟)은 도(徒)와 동(冬)의 반절이며 성이다.(佟, 徒冬翻, 姓也.)"라고 적혀 있으므로 '동'으로 읽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https://ctext.org/wiki.pl?if=gb&res=638056&searchu=%E4%BD%9F%E5%A3%BD|#]]] || ||<:><#191970> '''{{{#white 이름}}}''' ||<(>수(壽) || ||<:><#191970> '''[[자(이름)|{{{#white 자}}}]]''' ||<(>▨안(▨安)[* 현존하는 안악 3호분의 묵서명에는 첫째 글자가 박락되어 판독할 수 없다.] || ||<:><#191970> '''{{{#white 묘소}}}''' ||<(>[[안악 3호분]]?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구려]]의 인물. 본래 중국 사람이었으나 정쟁에 휘말려 고구려로 망명했다. == 생애 == 평주 요동군 평곽현[* 훗날 요동을 장악한 고구려가 [[건안성]]을 축조한 곳이며, 문서 상단의 표에도 나와있듯 현재의 랴오닝성 잉커우시 가이저우시 일대로 비정된다.] 도향 경상리(敬上里) 출신으로, 333년 [[모용황]]이 건국한 [[전연]]에서 [[사마(관직)|사마]]의 벼슬을 지냈다. 그 해 모용황의 동생 [[모용인]]이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어 일으킨 쿠데타를 진압하러 파견됐으나, 오히려 반란군에게 격파당하는 바람에 모용인의 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336년 모용황이 모용인의 반란 세력을 기습하여 궤멸시키자, 위협을 느낀 동수는 곽충(郭充)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고구려]]에 망명하였다. [[고국원왕]]은 그를 중용해 [[낙랑군|낙랑]]·[[대방군|대방]] 지역의 태수로 임명했다. 아무래도 동수가 중국 출신이다 보니 중국식 문화의 영향이 짙게 남아있던 옛 [[한군현]] 지역을 다스리기 적합한 인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후 68세라는 고령의 나이까지 고구려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357년 11월 25일 사망했고, 안악 3호분에 그의 생애를 담은 묵서명이 적히게 되었다. == 여담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27.egloos.com/a0053134_56bca6033be9d.jpg|width=100%]] }}} || || {{{#000000 안악 3호분에 그려진 행렬도의 일부.}}} || 대표적인 고구려의 대형 고분인 [[안악 3호분]]의 주인으로 추정하는 설이 지배적이다.[* 안악 3호분이 [[미천왕]] 또는 고국원왕의 왕릉이며, 동수는 무덤 축조에 참여한 공로로 기록되었을 뿐이라는 소수설도 북한 학계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으나 고고학적 증거는 부족한 편이다.] 안악 3호분에 그려진 거대한 규모의 행렬도를 통해 동수가 생전 누렸던 부귀영화를 짐작해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고구려는 동수가 귀화해온 지 6년 만인 342년 11월부터 전연의 지속된 침공에 시달리게 되었다. 동수가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에 임명되었다는 묵서명의 기록을 고려하면 이때 고구려군의 지휘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동수, version=159, paragraph=2.1.1)] [[분류:중국계 한국인]][[분류:고구려의 인물]][[분류:289년 출생]][[분류:35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