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양(남조)/인물]][[분류:505년 출생]][[분류:554년 사망]] [include(틀:진서(남조역사책))] [include(틀:남사)] ||<-2> '''임강위후(臨江威侯)[br]{{{+1 杜僧明 | 두승명}}}''' || || '''시호''' ||위(威) || || '''작위''' ||임강현후(臨江縣侯) || || '''성''' ||두(杜) || || '''이름''' ||승명(僧明) || || '''자''' ||홍조(弘照) || || '''생몰''' ||505년 ~ 554년 || || '''출신''' ||광릉군(廣陵郡) 임택현(臨澤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양(남조)|양나라]]의 장수로 자는 홍조(弘照). 광릉군(廣陵郡) 임택현(臨澤縣) 출신. == 생애 == 두승명은 체격이 왜소했지만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고 용력이 있었으며, 기마술과 궁술에도 능했다. 대동(大同) 연간[* 535년 ~ 546년], 노안흥(盧安興)이 광주(廣州) 남강독호(南江督護)로 부임하자, 두승명은 형인 두천합(杜天合), [[주문육]]과 함께 노안흥을 섬겨서 이료(俚獠)를 정벌할 때 공을 세워 신주(新州) 방조(助防)가 되었다. 노안흥이 죽은 뒤 두승명은 다시 노안흥의 아들 노자웅(盧子雄)을 섬겼다. 541년, 교주자사(交州刺史) 무림후(武林侯) 소자가 폭정으로 민심을 상실하자, 교주의 호족인 [[리비|이분]]이 반란을 일으켜 자사 소자를 축출하고 소자는 광주(廣州)로 달아났다. 이듬해인 542년, 당시 신주자사(新州刺史)였던 노자웅은 고주자사(高州刺史) 손경(孫冏)과 함께 이분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노자웅은 현지의 열대한 기후와 장려(瘴癘)가 한창이라는 점을 염려해서 가을까지 출병을 유예하라고 진언했다. 그러나 노자웅의 진언은 광주자사(廣州刺史) 신유후(新渝侯) 소영(蕭映)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자도 출병을 재촉했기 때문에 노자웅은 마지못해 출병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합포(合浦)에서 60~70%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하고 병사들의 이탈을 막지 못해서 노자웅은 결국 남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소자는 노자웅과 손경의 진군이 지지부진했던 것은 이분과 내통했기 때문이라며 조정에 이들을 참소했고, 결국 조정에서는 노자웅과 손경을 광주에서 사사시켰다. 노자웅의 죽음은 노자웅의 아우인 노자략(盧子略), 노자열(盧子烈), 두승명과 주문육을 자극했다. 두천합은 이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공께서는 누대에 걸쳐 우리를 매우 후하게 대우했는데, 지금 그가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그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어찌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소! 내 아우 두승명은 [[만인지적]]이니 만약 주성을 포위하고 백성들을 불러들이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소? 성을 무너뜨리고 소영과 소자를 죽여서 손공과 노공에게 제사를 올린 뒤 조정의 사자가 오면 손을 묶고 정위(廷尉)로 향하면 되니 죽는 것이 차라리 사는 것보다 낫소. 설사 우리가 이기지 못하더라도 여한이 없소. 두천합의 말을 들은 모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또한 우리의 소원이니 족히 분부해주십시오! 두승명, 두천합 형제와 주문육은 노자열 형제와 동맹을 맺고 노자략을 맹주로 추대한 뒤 남강독호(南江督護) 심의(沈顗)를 몰아내고 소영을 공격했다. 노자략은 성의 남쪽, 두천합은 성의 북쪽, 두승명과 주문육은 성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포진하며 광주성을 포위했고 관리들이 여기에 호응하면서 수만 명의 군대가 모여들었다. 하지만 고요태수(高要太守)였던 진패선은 반란에 대한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토벌하면서 두천합은 전사했고 두승명과 주문육은 진패선에게 사로잡혔다. 진패선은 두승명과 주문육을 풀어주고 자신의 장수로 삼았다. 두승명은 뒤에 이분의 반란을 진압할 때 공을 세웠다. 548년부터 [[후경]]의 반란으로 양나라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진패선은 근왕병으로 출정하려고 했는데, 당시 광주자사였던 원경중이 진패선을 몰래 도모하려고 했다. 진패선이 원경중을 토벌할 때 두승명은 여기에 종군하여 원경중을 물리쳤으며, 난유(蘭裕)를 물리칠 때도 두승명은 선봉이 되어 난유를 격파하였다. 진패선은 다시 근왕병을 일으키고자 두승명과 호영을 영상(嶺上)에 주둔시키고 시흥군의 호걸들에게 후한 선물을 주어 그들과 결탁했다. [[소발(양나라)|소발]]은 진패선이 출정하려는 것을 알고 종휴열(鍾休悅)을 진패선에게 보내서 그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진패선은 소발의 설득을 뿌리쳤다. 이로 인해 소발은 채노양(蔡路養)과 결탁하여 진패선을 막으려고 했다. 550년, 남야(南野)에서 채노양과 전투를 벌일 때 두승명은 자신이 탔던 말이 부상을 입자 진패선이 직접 두승명을 구원하고 자신이 탔던 말을 두승명에게 주었다. 두승명은 진패선의 말에 올라 수십 명과 함께 다시 진군하여 채노양을 격파하였다. 고주자사 이천사(李遷仕)가 후경에게 호응하여 장석(灨石)에 성을 세우고 진패선을 공격하자, 진패선은 주문육을 선봉으로 삼고 두승명을 원군으로 파견하여 이천사를 물리쳤다. 이천사가 유효상(劉孝尙)과 합류하여 남강(南康)을 공격하자, 두승명과 주문육은 이천사와 100여 일 동안 대치하다가 551년에 이천사를 물리쳤다. 고조가 남강에 진수할 때 두승명은 서창(西昌)의 수비를 맡으며 독안성여릉2군제군사(督安成廬陵二郡諸軍事)로 임명되었으며, 상동왕 소역에 의해 가절(假節), 청야장군(淸野將軍), 신주자사로 임명되고 임강현자(臨江縣子)에 봉해져서 식읍 300호를 받았다. 진패선이 예장(豫章)에 진수했을 때 두승명은 선봉이 되어 연전연승했으며, 장사(長史)로 임명되어 진패선의 정벌에 종군하였다. 진패선의 군대가 채주(蔡洲)로 당도할 때 두승명은 휘하의 장병들을 이끌고 후경의 함선들을 불태웠다.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 두승명은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常侍), 명위장군(明威將軍), 남연주자사(南兖州刺史)로 제수되고 작위가 후로 올라갔으며, 진릉태수(晉陵太守)를 겸임하였다. 554년, 진패선이 [[북제]]에게 함락당한 광릉(廣陵)을 공격할 때 종군하여 사지절(使持節)이 더해졌고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 평북장군(平北將軍)으로 전임되었다. 한편 [[서위]]의 침공으로 형주가 함락되자, 진패선은 두승명에게 [[오명철]] 등을 이끌고 후진을 따라 형주를 구원하도록 명했으나 두승명은 형주로 향하던 도중 병으로 죽었다. 사후 두승명은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추증되고 위(威)라는 시호를 받았다. 두승명은 [[진(남조)|남진]]이 건국되기 전에 죽었지만 남진에서 공신으로 대우받았다. 559년, 진패선이 죽고 그의 조카인 임천왕(臨川王) [[문제(남진)|진천]]이 즉위한 뒤 두승명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추증되고 561년 진패선의 사당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