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fff '''{{{+1 당나라의 대신[br]{{{+1 杜正倫 | 두정륜}}}}}}'''}}} || || '''[[작위|{{{#fff 작호}}}]]''' ||<(> 풍성현남^^(豐城康男)^^ → 양양현공^^(襄陽縣公)^^ || || '''{{{#fff 성}}}''' ||<(> 두(杜) || || '''{{{#fff 이름}}}''' ||<(> 정륜(正倫) || || '''{{{#fff 부친}}}''' ||<(> 두자유(杜子裕) || || '''{{{#fff 출생}}}''' ||<(> ? ~ 658년 || || '''{{{#fff 출신}}}''' ||<(> 상주(相州) 원수현(洹水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당나라]]의 대신. == 생애 == 두정륜은 상주(相州) 원수현(洹水縣) (現 [[허베이성]] [[한단시]]의 일부) 출신으로, 두자유(杜子裕)의 아들로 태어났다. 두정륜의 위로는 두정현(杜正玄), 두정장(杜正藏)이 있었는데, 3형제가 모두 수재였다. 두정륜은 3형제들 중에서 불경에 밝은 이였다. 두정륜은 [[수나라]]에서 우기위(羽騎尉)를 지냈다. 618년 당나라가 건국된 뒤, 두정륜은 제주(齊州) 총관부 녹사참군(錄事參軍)을 지내다가, 진왕 이세민이 두정륜을 벽소하여 진왕부 문학관을 지냈다. 이후 이세민은 626년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고, [[태종(당)|당태종]]으로 즉위하였다. 태종이 즉위한 뒤, [[위징]]은 표문을 올려 두정륜의 재능이 고금에 필적할 바가 없다면서 그를 천거하였고, 병부원외랑으로 발탁된다. 다음은 태종이 두정륜을 천거하면서 남긴 말이다. >태종: 짐이 지금 대신들에게 품행과 재능이 있는 자를 천거하도록 한 것은, 짐이 오직 품행과 재능이 있는 이를 총애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백성을 유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짐은 종친이나 훈구들 중 품행과 재능이 없는 자는 마지막까지 임용하지 않는다. 경은 충직하여, 짐이 지금 경을 천거한 것이니, 경은 의당 천거된 바에 힘을 쓰도록 하여라. 628년, 두정륜은 급사중으로 임명되고 지기거주(知起居注)를 겸임하였다. 630년에는 여러 차례 중서시랑으로 승진하였고, 산기상시, 태자좌서자, 숭현관 학사를 역임하였다. 태자좌서자가 된 두정륜은 태종의 태자인 [[이승건]]을 보좌하였다. 이때 이승건은 다리에 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를 핑계로 조현을 하지 않았다. 이승건에게 여러 차례 간언을 한 신하들이 있었지만 이승건은 신하들의 간언을 무시하였는데, 두정륜은 이승건에게 간언을 하면서 태종과 자신이 비밀리에 나눈 이야기를 누설한다. 이 사실이 태종에게 전해지자, 태종은 두정륜을 곡주(谷州) 자사로 좌천시켰다가, 다시 교주(交州) 도독으로 좌천시켰다. 다음은 당시 태종과 두정륜이 나눈 대화이다. >태종: 경은 어찌하여 짐과 나눈 이야기를 누설하였소? >두정륜: 제가 아무리 태자를 일깨워도 태자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폐하의 말씀으로 태자를 위협하여, 태자께서 두려움을 느끼시길 바랐습니다. 어쩌면 태자께서는 개과천선하실 것입니다. 643년 이승건이 태자 자리에서 쫓겨난 뒤, 능연각훈신 중 한 명인 [[후군집]]은 이승건과 얽혀 참수되었고, 후군집이 이승건에게 받은 금대가 두정륜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두정륜은 다시 환주(驩州)로 유배되었다. 이후 영주(郢州) 자사와 석주(石州) 자사를 역임하였다. 649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태종의 태자인 이치가 [[고종(당)|당고종]]으로 즉위하였다. 두정륜은 656년에 여러 차례 황문시랑으로 제수되었고, 숭현관 학사를 겸임하며, 이윽고 동중서문하삼품이 되었다. 657년에는 탁지상서, 태자빈객, 홍문관 학사 등을 지냈다. 그러다가 658년 두정륜은 중서령 [[이의부]]와 불화하여 이로 인하여 참소를 당했고, 횡주(橫州) 자사로 좌천되었으며, 횡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include(틀:당시기사)]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한단시 출신 인물]][[분류:65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