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미국 대통령)]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1635 0%, #0d164a 20%, #0d164a 80%, #0D1635)" '''{{{#ffc224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미군/원수)] ---- [include(틀:역대 미국 육군참모총장)] ---- [include(틀: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장성급 지휘관)] ---- [include(틀:타임지 올해의 인물/1940년대)] ---- [include(틀:타임지 올해의 인물/1950년대)] ---- [include(틀: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1635 0%, #0d164a 20%, #0d164a 80%, #0D1635)" '''[[미국 대통령|{{{#ffc224 미합중국 제34대 대통령}}}]][br]{{{#ffc224 {{{+1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br]Dwight David Eisenhower}}}'''[* [[스위스]]계 [[미국인]]으로 원래 성씨의 철자가 Eisenhauer였으나 바꿨다. 참고로 그 전의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 또한 성씨를 Huber에서 Hoover로 바꿨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기간 동안 많은 [[독일계 미국인]]들은 성씨를 [[영어]]식으로 바꿨다.]}}}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드와이트 아이젠하워.jpg|width=100%]]}}} || ||<|2> '''출생''' ||[[1890년]] [[10월 14일]] ([age(1890-10-14)]세)|| ||[[미국]] [[텍사스 주]] 대니슨|| ||<|2> '''사망''' ||[[1969년]] [[3월 28일]] (향년 79세)|| ||[[미국]] [[워싱턴 D.C.]]|| ||<|2> '''재임기간''' ||제34대 [[미국 대통령|대통령]]|| ||[[1953년]] [[1월 20일]] ~ [[1961년]] [[1월 20일]]|| || '''서명'''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서명.svg|width=160]]}}}||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부모''' ||아버지 데이비드 제이콥 아이젠하워[br]어머니 [[https://en.wikipedia.org/wiki/Ida_Stover_Eisenhower|이다 엘리자베스 스토버]] {{{-2 (1862 ~ 1946)}}} || || '''형제자매''' ||첫째 형 아서 아이젠하워 {{{-2 (1886 ~ 1958)}}}[br]둘째 형 [[https://en.wikipedia.org/wiki/Edgar_N._Eisenhower|에드가 뉴턴 아이젠하워]][br]남동생 로이 아이젠하워 {{{-2 (1892 ~ 1942.6.7)}}}[br]남동생 [[https://en.m.wikipedia.org/wiki/Earl_D._Eisenhower|얼 듀이 아이젠하워]][br]남동생 [[https://en.m.wikipedia.org/wiki/Milton_S._Eisenhower|밀튼 스토버 아이젠하워]][br]남동생 폴 D. 아이젠하워 {{{-2 (1894 ~ 1895)}}} || || '''배우자''' ||[[https://en.wikipedia.org/wiki/Mamie_Eisenhower|매미 아이젠하워]] {{{-2 (1896 ~ 1979)}}} || || '''자녀''' ||다우드 아이젠하워[* 1917 ~ 1921. [[성홍열]]로 요절했다.], 존 아이젠하워[* 1922 ~ 2013. [[6.25 전쟁]] 참전 용사로, 전쟁 당시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 || '''학력''' ||에빌린 고등학교 {{{-2 (졸업)}}} || || '''종교''' ||[[개신교]] {{{-2 ([[장로회]])}}} || || '''신체''' ||179cm, 78kg, [[O형]] || || '''소속 정당''' ||[include(틀:공화당(미국))] || ||<-2> '''군사 경력''' || || '''임관''' ||[[미국육군사관학교]] {{{-2 (1915년 임관)}}} || ||<|2> '''복무''' ||[[미합중국 육군]] || ||[[1915년]] ~ [[1953년]][br][[1961년]] ~ [[1969년]] || || '''최종 계급''' ||[[원수(계급)|원수]] {{{-2 ([[미합중국 육군]])}}} || || '''주요 보직''' ||[[제2차 세계 대전]] 유럽연합군 총사령관[* 1944년 ~ 1945년에는 서부 전선에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비롯한 프랑스와 독일 지역 공격에 대한 책임을 맡아 공격을 계획하고 감독했다.][* 아시아연합군 총사령관은 자신의 옛 상관이자 10년 선배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였다.][br]초대 [[NATO군]] 사령관 || || '''서훈 내역'''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Navy_Distinguished_Service_Medal_ribbon.svg.png|width=25%]]해군수훈근무훈장[br][[파일:800px-Legion_of_Merit_ribbon.svg.png|width=25%]]공로훈장[br][[파일:멕시코국경근무메달 약장.svg|width=25%]]멕시코국경근무메달[br][[파일:제1차세계대전승전메달 약장.svg|width=25%]]제1차세계대전승전메달[br][[파일:미국국방근무메달 약장.svg|width=25%]]미국국방근무메달[br][[파일:유럽-아프리카-중동전역메달 약장.svg|width=25%]]유럽-아프리카-중동전역메달[br][[파일:제2차세계대전승전메달 약장.svg|width=25%]]제2차세계대전승전메달[br][[파일:점령군메달 약장.svg|width=25%]]점령군메달[br][[파일:국방근무메달 약장.svg|width=25%]]국방근무메달[br][[파일:해방자 산 마르틴 훈장 약장.png|width=25%]]해방자 산 마르틴 훈장[br][[파일:오스트리아 공화국 공로멍예장 2급 약장.png|width=25%]]오스트리아 공화국 공로명예장 2급[br][[파일:레오폴트훈장(벨기에) 약장.svg|width=25%]]레오폴트 훈장[br][[파일:전쟁십자가(벨기에)(1944) 약장.svg|width=25%]]전쟁십자가[br][[파일:남십자가국가훈장 약장.svg|width=25%]]남십자국가훈장[br][[파일:군사공로훈장(브라질) 약장.png|width=25%]]군사공로훈장[br][[파일:항공공로훈장(대십자) 약장.png|width=25%]]항공공로훈장[br][[파일:전쟁메달(브라질) 약장.png|width=25%]]전쟁메달[br][[파일:종군메달(브라질) 약장.png|width=25%]]종군메달[br][[파일:공로훈장(칠레)(대십자) 약장.svg|width=25%]]공로훈장[br][[파일:운희휘장 1급.gif|width=25%]]운희휘장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wight_D._Eisenhower,_official_Presidential_portrait.jpg|width=100%]]}}} || || {{{#ffc224 '''백악관 공식 초상화'''}}} || [목차] [clearfix]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youtube(yCWsLq3_aYk, start=45)]}}} || || {{{#ffc224 '''제34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 자세히 들어보면 취임 선서를 할 때는 정석적인 군인 발성을 쓰는 반면 연설을 할 때는 평범한 발성을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 == 개요 == [[미국]]의 제34대 [[미국 대통령|대통령]]. 애칭은 아이크(Ike).[* 애칭이 아이크가 된 이유는 원래 태어났을 때 이름은 데이비드 드와이트였지만 데이비드가 아버지와 같은 이름이라서 혼동이 생겼다. 때문에 집안의 아들들은 전부 아이크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형인 에드거는 '큰 아이크', 드와이트는 '작은 아이크' 이런 식으로. 아이크는 성인 아이젠하워를 축약해서 부르는 명칭이 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드와이트만이 아이크라고 불리게 되었다. 대선 후보 당시 선거구호도 'I like Ike'였다. 꽤 적절한 언어유희를 사용한 셈.]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합군의 가장 중요한 사령관 중 한명이었으며, 이후 대통령에 올라 [[한국 전쟁]]을 마무리하고 냉전체제를 굳혔다. 초대 [[NATO]]군 최고사령관과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도 역임하였다. == 약력 == * 1915. [[미국육군사관학교]] 졸업 및 임관 * 1945.5. 초대 [[연합군 점령하 독일]] 미국 사령관 (1945.5.8. ~ 1945.11.10.) * 1945.6. 소련 [[전승훈장]] 수훈 * 1945.11. 제16대 [[미합중국 육군]] 참모총장 (1945.11.19. ~ 1948.2.6.) * 1948.6. 제13대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 (1948.6.7. ~ 1953.1.19.) * 1951.4. 초대 [[북대서양 조약 기구|유럽 연합군]] 사령관 (1951.4.2. ~ 1952.5 30.) * 1953.1. 제34대 [[미합중국 대통령]] (1953.1.20. ~ 1961.1.20.)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생애)] == 평가 == === 군인으로서의 평가 === 2차 세계대전 당시 최고의 사령관 중 한 명으로, 육사 당시 상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역시 아이젠하워를 자기가 만난 사무원 중 최고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말만 보면 호평했다고 보는게 맞지만, 군인으로써가 아닌 사무원 중 최고라고 칭했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돌려까기 혹평을 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맥아더가 다른 아이젠하워 칭찬을 한 적도 있긴 해서 좀 애매하긴 하다. 다만 최소한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를 그리 좋아하진 않았던 모양으로, 그는 일기장에 상관인 맥아더 욕을 써놓기도 했다.] 하여튼 능력이 있던 인물이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횃불 작전]], 시칠리아 상륙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보여준 모습을 보면 리더십 역시 괜찮은 인물이었다. 사람들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타협하는데 능했고, 이 점은 여러 국가들의 군이 동참하는 연합군의 지도자로서 매우 적합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훗날 군인을 넘어 국가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고서도 이를 수월하게 수행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 대통령으로서의 평가 === 집권기였던 1950년대 미국을 상당히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기적으로도 전쟁이 끝나고 전후 복구기를 맞아 호황기를 누렸으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0여년만에 [[세계 대공황]]이 터진 것처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2차 세계 대공황을 기대한(?) [[스탈린]]의 바램과는 반대였다. 다만 집권 말기에는 일시적 불황에 시달리기도 했으며, 이는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케네디가 당선된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일자리도 완전 고용에 가깝게 실현되었다. 덕분에 지금도 아이젠하워는 역대 미국 대통령 평가하면 보통 10위 안에는 포함되며, 공화당에서 얼굴 마담격으로 내세우는 대통령 중 한명이기도 하다. 다만 오늘날의 공화당은 [[신보수주의]] 운동을 거치면서 1950년대보다 보수화되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와 안 맞는 점도 있긴 하다. 당에선 나름대로 역사가 길어서 그렇다는 식으로 때우는 중이다. 실제로 아이젠하워는 직전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들도 일부 계승했고, 흑인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그만큼 아이젠하워가 중도적인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라, 오늘날엔 공화당 지지층뿐만 아니라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호감도가 괜찮은 축에 든다. 아이젠하워는 재임 기간 동안 행운도 따랐으며 특히 외교 분야가 그런 편이었다. 예를 들어서 임기 말년에 [[쿠바 혁명]]이 터졌는데, 그 대책 마련을 주문해놓고 퇴임해버려서 후임인 케네디에게 도착한 것이 [[피그만 침공]] 계획서와 [[노스우즈 작전]] 계획서였다. 피그만 침공이 케네디 집권 3개월차에 있었던 것이 이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의 경우도 [[도미노 이론]]에 따라서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1차 [[인도차이나 전쟁]] 휴전안의 조건이었던 남북베트남의 통합선거를 거부하게 하고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을 지원한 것이 아이젠하워 정부의 정책이었다. 케네디는 베트남에서 발을 빼야 하고 군대 파견은 절대로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남베트남의 상황은 미국이 발을 빼면 그대로 망할 판이라서 발을 뺄 수가 없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뒤를 이어서 공화당 대표로 출마한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 시절 [[미국 부통령|부통령]]으로서 자신을 충실하게 보좌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닉슨에 대하여 명확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고, 이것이 닉슨에게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되기도 했다.[* "일주일 정도 시간을 주면 아마 한 가지 쯤 기억이 나겠지요." 이 말은 아이젠하워가 "부통령 닉슨이 8년 동안 어떤 주요한 정책 결정에 참여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한 답변이었다. 나중에 농담이라고 하긴 했지만, 질문에 대한 진짜 대답은 끝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선 가도를 달리던 닉슨에게 이것은 타격이 되고 말았다.] [[존 F. 케네디]]와의 대선에서의 득표 편차는 표 수로는 약 20만 표였으나 비율로는 고작 0.1%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가 명확한 지지를 표명했으면 닉슨이 이겼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후 다음 68년 대선에서 승리했지만 여기서도 0.1%차로 신승한다. 결국 닉슨은 재선을 위해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무리수를 두게 되었다.] 원인은 아이젠하워가 개인적으로 닉슨을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강하며, 실제로도 닉슨이 항상 아이젠하워의 명령에 충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직접 닉슨을 부통령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불화는 어쨌거나 아이젠하워의 태도 때문에 공화당이 대통령의 자리를 케네디의 민주당에게 빼앗기게 되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도 비판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케네디는 아이젠하워와는 다르게 젊고 활동적인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써먹었기 때문에 그와 대비되어 아이젠하워는 매일 [[골프장]]이나 전전하는 퇴물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의 둘째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와 리처드 닉슨은 서로 사돈 사이였는데 아이젠하워의 손자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와 닉슨의 딸인 줄리에 닉슨이 결혼한 것. 즉, 아이젠하워는 닉슨의 사돈의 아버지였던 것이었다. ==== 군산복합체 견제와 대소련 군사 전략 ==== 아이젠하워는 퇴임사에서 군부와 산업계가 상호 의존하는 이른바, [[군산복합체]]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다만, 군산복합체라는 개념을 처음 꺼내든 것은 아이젠하워가 아닌, 찰스 트레벌 영이었고 군산복합체란 단어를 연설문에 집어넣은 것도 대통령 연설문 작성가였던 랠프 윌리엄스와 맬컴 무스였다. 다만, 그의 군산복합체론은 군부와 산업계가 결합한 거대한 이익 집단의 도래를 예견하고 이를 막기 위해 군수 산업계에 대해서 강력한 규제와 통제를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최초로 군산 복합체란 개념을 말한 영의 주장은 군수 산업을 국영화하고 그것을 통제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었고 아이젠하워의 주장도 일부에서 제기하는 수상쩍은 악의 단체가 미국을 배후 조종한다는 식의 [[음모론]]적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군사예산을 삭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세한 것은 [[군산복합체]] 항목 참조. 그의 발언은 시대상을 읽을 필요가 있다. 아이젠하워 정권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전세계의 군수공장"'''[* 총력전 중이어서 자동차 부품 회사, 가전 제품 회사, 타이어 회사까지 전차와 포탄, 전투기와 폭격기를 생산했다. 그런 회사들이 생산 시설을 전용해 만든 물량이 전쟁 전부터 전투기, 전차를 생산한 군수 산업체들이 생산한 것보다 더 많을 정도였다. 이 군수 기업들은 50년대 중반 이후, 점점 군수 사업을 접거나 다른 기업에 합병당하는 방식으로 소멸했다. 전쟁 때야 "우리 회사에 좋은 무기 있어요"하고 시연하면 채택해주었지만, 전시에 설립된 여러 군수 기업들이 입찰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벌여야 했고, 두세 번 떨어지면 회사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역할을 한 미국이 전후에 대대적인 군축을 시행했고 한국 전쟁을 시작으로 50년대에 다시 군비를 키울 때였다.[* 2차 세계 대전과 그에 뒤이은 한국 전쟁을 겪으며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군사 기술이 대폭 발전해서 기존의 군수 물자와 장비들이 모두 구식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재임 후반기에 오면서 다시 군축을 해야할 시기가 다가왔고 이 때 나온 것이 퇴임사의 군산복합체론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무기는 어떠한 가치 재생산도 하지 못한다. 단기간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자국에 유리한 협정을 맺는다면 상당한 경제적 가치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쓰이지 않는다면 고철로 폐기되기 마련이다. 제국주의 시대까지는 아편 전쟁을 비롯하여 단기간의 전쟁으로 이익을 챙길 수 있었지만, 양차 대전 이후로 세계 주요 국가들은 전쟁이 갖고 오는 엄청난 사회, 경제적 문제를 인식했고 국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전쟁을 원치 않는 여론과 자칫 잘못하면 정권은 물론, 국가 위기 상황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정치인들을 사로잡았고 결과적으로 냉전 기간 동안 열강들 간의 전면전은 없었다. 그래서 팔리지 않는 구형 [[잠수함]]을 [[면도기]] 회사에 고철용으로 팔아 치운 사례도 있을 정도로 군수 물자와 무기에 대한 수요가 떨어져 버렸다. 따라서 평시에 과도한 군사비 투입은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다만 "어차피 전쟁 안 할 거면 국방비에 투자할 돈을 모두 그냥 민간 기업에 투자하면 기술 개발도 더 효과적인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보통 민간 기업은 회장 개인의 개인적인 관심사가 아닌 이상 단기간에 경제적인 성과가 확실하지 않은 기술에는 잘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정부가 지원하지만 한계가 있다. 한국에서는 연구 개발 분야 정부 투자가 상대적으로 적어 아직 군수 산업이 민간 산업에 기대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첨단 과학 기술의 최초 수요자가 군수 산업이고, 그렇게 연구 인력을 유지하고 기술을 더 발전시키고 경제성을 키워 민간에 상용화된 경우가 흔하다. 그런 식으로 군수 산업이 의도치 않게[* 국방비에 예산을 많이 쓰고 싶어하는 정부는 없다. 이익이 아닌 리스크와 생산 단가가 늘어나는 걸 좋아하는 군수 회사도 없다.] 군수 산업이 과학 기술 발전의 마중물로써 작용한다거나, 전자파나 인터넷처럼 군수 산업에서 출발해서 민간 부문으로 확장된 사례도 많다. 그 예시로, 스페이스X같은 민간 로켓 개발 회사들이 그나마 NASA의 지원을 받아 위성 발사체 사업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반 세기 동안의 국가 주도의 연구 개발 "낭비", 엄청난 숫자의 대륙간 탄도탄과 그것을 관리, 발사, 유도하는 시스템을 생산하며 발전한 결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수십 년 간 NASA의 천문학자와 다른 과학기술자가 한 일 대부분은 그 자체로서 바로 미국 서민의 "빵"이나 "달러"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달 탐사와 외행성 탐사를 위해 NASA가 얻은 예산 역시 냉전 시기 미소 경쟁과 군사 기술 개발 요구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만약 미소간 경쟁이 없었다면 GPS 위성 발사는 훨씬 늦었을 것이고 우리는 지상 기지국 기반의 위치 추적 시스템을 친숙하게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 정부의 예산 수준으로 위성 기반 위치 추적 시스템은 지금도 힘들다. 한반도 인근에서 사용할 용도로 겨우 시동을 걸고 있는 정도고 그나마 이것이 더 미래가 아니라 요즘 예산을 얻은 것도 국군의 필요가 반영된 것이 크다. 이렇듯, 군산 복합체에 대해 견제하긴 했지만, 아이젠하워 정부는 군비를 대폭 증강해 소련을 견제했었다. 이 시기 미국의 대소련 군사 전략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 국경을 맞댄 우방국에 미군 군사 기지와 공군 기지를 건설하고 핵폭탄과 폭격기를 배치해 둔 다음, 소련이 서유럽 침공을 시작하면 핵으로 먼저 대응한다는 식의 대량 보복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아이젠하워는 서유럽 우방과 전세계 진보 세력들의 격렬한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스페인 프랑코 정권과 수교를 맺고 그들을 지원하는 대가로 사라고사를 위시한 스페인의 주요 도시에 군사 기지와 공군 기지를 건설했다. 이러한 노선은 [[핵 만능주의]]라고 불리는 극단적인 핵무기 의존으로 이어졌다. 이는 수백 만에 달하는 소련군을 상대로 양적 열세를 갖고 있으니 핵으로 메우는 편이 경제적이라는 판단과 소련에게 핵 투발 수단이 없다는 자신감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푸트니크 쇼크]]로 소련이 미국 본토를 직접 핵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케네디 정권 시기부터 시작하는 핵 위기 상황은 소련의 ICBM로 촉발되었고, 미국은 이를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젠하워 정권 동안 미국은 절대적인 세계 초강대국이었고, 소련의 우주 항공 과학과 미사일 부문 발전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어 미국인들은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 정권은 U-2로 소련 전역을 훤히 보고 있었음에도 대비하지 못하고 스푸트니크 쇼크를 맞이했으나, 핵 위기에 대한 불안은 후임인 케네디 정권이 떠안아야 했다. 아이젠하워 정권 막바지에 있었던 대선 기간 동안, 민주당 대선 후보 케네디는 선거 운동 도중 소련의 핵 미사일 전력이 미국의 핵 미사일 전력보다 앞서 있다는 내용의 미사일 격차(Missile Gap) 이슈를 내세워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미국의 안보 태세가 약화되었다고 선전했는데,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소련의 거대한 핵 미사일 전력이라고 알려진 수치는 흐루쇼프가 공갈을 치기 위해 과장한 블러핑이었다. 실제 핵 미사일 전력은 미국이 크게 우세한 상황이었던 것. 그러나 대통령인 아이젠하워가 국가 기밀들인 소련의 군사력이나 미국의 군사력을 밝힐 수도 없었던 관계로 난감한 입장에 처했다. 도리어 아이젠하워 정권은 터키를 비롯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에 공군 기지와 핵 전력을 배치하여 소련을 핵무기로 포위하는 상황이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U2로 소련 전역을 훤히 내다 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는 국가 기밀이었기 때문에 밝힐 수가 없었고 아이젠하워와 백악관 수뇌부들은 선거 기간 동안, 매우 난처한 처지에 몰렸다. == 선거 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미합중국 연방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 {{{#FFF 연도}}} || {{{#FFF 선거 종류}}} || {{{#FFF 선거구}}} || {{{#FFF 소속 정당}}} || {{{#FFF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FFF 당선 여부}}} || {{{#FFF 비고}}} || || 1952 ||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미국 대통령 선거]] ||<|2> [[미합중국]] ||<|2> [include(틀:공화당(미국))] || '''34,075,529 (55.18%, 442명)''' ||<|2> '''당선 (1위)''' || '''초선''' || || 1956 ||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미국 대통령 선거]] || '''35,579,180 (57.37%, 457명)''' || '''재선''' || == 개인사 == * 그의 성씨인 아이젠하워(Eisenhauer)는 본래 [[독일어]]로 "철(Eisen) 때리는 사람(Hauer)"이라는 뜻이다. 조상이 광부이거나 대장장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젠하워의 조상들이 종교 박해를 피하여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독일어식 철자인 Eisenhauer를 발음하기 편하도록 영어식으로 Eisenhower로 고친 것이다. 참고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조지아식 본명 주가시빌리도 '철사람', 즉 대장장이란 뜻이었으나 러시아식으로 바꾸면서 '강철인간' 스탈린이 된다.] * 계급은 원수이지만 생도 시절의 성적은 중간 정도로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의 동문이자 상관이었던 맥아더가 웨스트포인트에서 손꼽힐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이름 높았던 것과 대조적. 남북전쟁의 명장 그랜트와 리 장군과 비슷하게 보일 수 있다. * 아들 존 아이젠하워도 [[미합중국 육군]] [[장교]]였는데, [[소령]] 때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는 바람에 야전생활을 못하고 [[백악관]]에서 보좌관으로 일했다. 육군 [[준장]]으로 전역했는데 훗날 2005년에 회고하기를 아버지의 계급이 너무 높아져 자신이 군 경력에서 손해를 봤다는[* 미국 대통령 아들이 백악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군생활하면 적성국의 납치나 암살 표적이 되기 딱 좋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2차세계 대전때도 연합군 사령관 아들이라고 본국에서 일부러 후방으로 뺐다. 대조적으로, [[필리프 드골]] [[제독]]은 [[샤를 드골|아버지]]가 자유 프랑스 수반 시절일 때 그 위험한 [[해군 코만도]] [[소대장]]으로 근무했고, 대통령 재직 시절에도 [[해군 항공대]]의 [[조종사]], [[호위함]] [[함장]] 등을 지내며 최일선에서 근무한 덕에 [[프랑스 해군]] 대장까지 이르렀다.] 원망섞인 푸념을 하기도 했다. 2013년에 별세했다. * 아내를 사랑한 애처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내가 유별난 사람이었다. 신혼 초에 공무 때문에 아이젠하워가 자주 귀가를 못하자, 결국 부인 매미 아이젠하워(Mamie Geneva Doud Eisenhower, 1896.11.14 ~ 1979.11.01) 여사가 어느날 남편을 본다고 차를 끌고 부대로 들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합군 사령관으로 영국 주재 당시 그의 운전병이자 비서였던 영국인 케이 서머스비와 내연관계였다고 한다. 아이크가 워낙 케이에게 다정하게 굴어서 두 사람이 내연관계라는 건 당시 아이크 사령부에서 근무하던 간부들이나 아이크와 자주 접하는 가까운 지인들은 거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당시 아이크의 나이가 많아서 성생활은 어려웠다. 케이는 회고록에 아이크와 성관계를 가진 사실이 있기는 한데 고령이라 아이크와 활발한 성관계는 갖지 못하였다고 밝혔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이크의 2차대전 시절을 다룬 1979년작 TV 미니시리즈 '아이크(Ike)'에서도 묘사되고 있는데 두 사람의 내연관계가 표현되는 건 아니지만 케이 서머스비가 또 한 명의 주인공 정도로 비중이 높은데다가[* 두 사람의 출연 빈도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기쁜 일이 있으면 서로 포옹하는 장면이 나오는 등 장군과 비서치고는 사이가 좋다. * 그의 인간성과 관련된 일화는 매우 많은데, 특히 유명한 일화 중 맥아더와 아이젠하워 두 사람을 만나고 온 여성의 인물평이 있다. 그녀가 맥아더에 대해 "맥아더를 만났을 때 나는 그가 정말 위대한 장군이라고 생각했다."라고 했고, 아이젠하워에 대해 "그를 만나자 내가 얼마나 매력있는 여자인지 알게 되었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 유머감각과 넉살이 좋아서 한번은 행사를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오던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자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민망하고 화가 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이젠하워는 그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이렇게 말했다.“제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여러분들이 웃고 즐거울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한 번 더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 유럽전 승리 이후 아이젠하워는 아내 매미와 이혼하고 케이와 재혼할 생각까지 가졌지만 [[조지 C. 마셜]][* [[제2차 세계 대전]]동안 아이젠하워의 상관이자 전우였고, 아이젠하워가 평생 존경했던 인물이다.]을 비롯한 여러 지인들이 그동안 쌓아올린 경력을 망칠 것이라 충고했고, 이 충고를 받아들여 관계를 정리했다고 한다. 이후 케이 서머스비는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에 정착했고 아이젠하워 사후인 1975년 아이젠하워와의 관계에 대한 회고록을 출판하였다. * 그의 미소는 백만 달러짜리, 20개 사단의 가치가 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때문에 대중적인 이미지가 굉장히 좋았고 이후 대통령에 출마하고 당선하는데 이 미소가 중요한 자산이 된다. *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법원장 중 한 명인 [[얼 워런]] 대법원장을 임명한 사람이다. 다만 내막을 보면 좀 웃픈데, 첨에는 "오늘날 연방 대법원에 필요한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 라고 말하며 그를 임명했지만, 정작 임명 이후 워렌이 원체 급진적인 판결들을 많이 내리자 후회가 됐는지, 후일 얼 워렌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내 인생 가장 큰 실수'라고 말했다고 한다. * 하루 60개비 이상의 [[담배]]를 피우는 대단한 [[애연가]]이기도 했는데, 1948년 컬럼비아 대학의 총장을 지낼 때 맥박이 지나치게 빨라져서 의사의 권고로 [[금연]]을 시작했다. 1주일이 지나지 않아 [[맥박]]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그는 그 후 평생에 걸쳐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 소탈한 성격이라 역대 [[미국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 출신들의 사열을 받을 때 동기 한 명이 "아이크, 내려와 같이 걷자." 라고 외치자 단상에서 내려와 동기들과 같이 행진하기도 했다. * [[U-2]]기가 [[U-2 격추 사건|소련 영공에 들어갔다가 작살나고 나서]], 기껏 [[니키타 흐루쇼프]]와 조성해놓은 화해 분위기가 망가지고 여론은 여론대로 들끓고 다른 정치인들은 자기더러 무능하다며 비판하는 등 어지러운 상황만 계속되자 백악관 집무실에 출근하면서 "대통령 못해먹겠다." 라는 말을 남겼다. 이전에는 [[맥아더]], [[조지 S. 패튼]], [[버나드 로 몽고메리]]라는 짜증나는 선배들의 갈굼을 견뎌내고 뒤치다꺼리까지 해준 아이젠하워 입에서 이 직업 못하겠다는 분노가 나오게 만든 것으로 미국 대통령 자리가 얼마나 신경이 많이 쓰이는 자린지 추정이 가능하다. * [[롤스로이스]]와 관련해 영미권 이외 국가들(특히 한국) 한정으로 퍼져 있는 출처 불명의 [[썰]]이 있다. 아이젠하워가 대장 시절 롤스로이스에다 전화를 걸어 차 구입을 원했지만 정작 콧대 높기로 유명했던 롤스로이스 측에서 "그런 건 전화로 하지 마시고 직접 우리 매장에 와서 판매 심사부터 받으시지요. 4성 장군씩이나 되는 사람이 애도 아니고 전화질까지 해서 귀찮게 합니까?"라고 냉정히 거절했다. 당시 롤스로이스는 자신들의 자격 요건에 맞지 않으면 판매하지 않는 까다롭고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서 돈이 많아도 자격이 안 되면 퇴짜를 놨었기 때문이었다. [* 일단 그 당시에 롤스로이스 차량을 구매하려면, 보유한 총 자산도 아닌 '유동 자산'이 최소 3,000만 달러(한화 약 330억 원)가 넘어가야 했다. 쉽게 말해 롤스로이스를 소유하려면 그에 걸맞는 사회적 지위와 자산이 필요했다는 소리다. 게다가 자격 요건에 부합하더라도 시원찮은 지도자나 고위층들, 물의를 일으킨 유명인들, 철권 통치를 한 독재자들에게는 판매를 불허했다.] [* 이렇게 까다롭게 판매를 거부하다 보니 이런 썰들까지 생겨 회사에 역으로 먹칠을 하기도 했다. 일례로 [[이승만]] 대통령이 롤스로이스를 대한민국 국가원수 의전차로 도입하려고 문의하였으나 거절당해서 캐딜락을 의전차로 썼는데 그 후 [[이기붕]]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위촉되자마자 롤스로이스에서 의전차를 제공하겠다고 바로 연락이 와서 이기붕이 아주 난감해했다는 설도 있으며(자칫 잘못했으면 하급자가 상급자보다 더 좋은 차를 탈 뻔한 셈),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려고 했을 때 우리 차는 딴따라들 타라고 있는 차가 아니라고 하며 거절했다가 정작 똑같이 딴따라짓 하면서 돈 벌던 [[비틀즈]]의 [[존 레논]]에게는 가장 먼저 차를 제공했다는 설도 있다. 물론 이 설들은 모두 부풀려진 것으로 엘비스와 존 레논 모두 롤스로이스를 소유하여 인증샷을 남겼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애초에 아이젠하워에게 한미 수교 기념으로 캐딜락 플리트우드 방탄의전차를 제공받았기에 롤스로이스에 대해 관심도 주지 않았다.] 훗날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이 되자 롤스로이스측에서 한 대를 의전 차량으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는데, 아이젠하워는 "장군 시절에는 무시하더니 대통령이 되니까 아부떠는 거요?"라고 말하고는 롤스로이스와 상종하지 않았다...라는 이야기. 하지만 사실 '2차 대전 말'의 아이젠하워는 단순한 4성 장군이 아니라 '''유럽 연합군 사령관'''에 5성 장군, 즉 원수로 진급한 상태였다. '일개' 군수품 납품 업체에 불과했던 롤스로이스 따위가 유럽의 해방자 아이젠하워를 저딴 식으로 건방지게 대했다가는 아마도 회사의 존망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실제로 영문 구글에서 아이젠하워와 롤스로이스를 연관시켜 검색해보면 저 일화가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롤스로이스 측에서 "우리 차로 천조국의 황상님을 모셨다!" 식으로 자랑하는 기사만 나온다. 실제로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된 후 영국을 방문하였을 때 롤스로이스로 의전 퍼레이드를 한 적이 있다.[[https://www.press.rolls-roycemotorcars.com/rolls-royce-motor-cars-pressclub/photo/detail/P90166836/general-eisenhower-and-the-prime-minister-harold-mcmillan-london-1951|#]] 그리고 아이젠하워의 의전에 쓰인 롤스로이스는 기록사진으로 남겨서 롤스로이스 측에서도 열심히 홍보하고 있다.[[https://www.prints-online.com/rolls-royce-coupe-used-president-eisenhower-1959-4383579.html|#]] 하다못해 아이젠하워보다 사실상 계급이 아래였던 [[버나드 로 몽고메리|몽고메리]] 장군도 롤스로이스에서 제공해 준 1936년형 팬텀 모델을 사용했으며 이 차로 아이젠하워와 같이 타고 댕기던 일도 간간히 있었는데, 이 차의 경매 기록에는 "이 차량은 몽고메리 장군과 아이젠하워 각하를 모신 그 차량이다"라는 얘기가 빠짐없이 소개되고 있다.[[https://www.motortrend.com/news/1936-rolls-royce-phantom-iii-montgomery/|#]] *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 1965년 [[윈스턴 처칠]]이 별세하자 그 장례식에 개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당시 다른 국가에서 대부분 국가 원수 수준의 인사들을 조문 사절로 보냈고, 아이젠하워도 2차 세계대전 연합군 총사령관인 전쟁 영웅+전직 미국 대통령, 그리고 무엇보다 2차 대전기 처칠과는 연합군 수뇌부로 동고동락했던 사이라 충분히 미국의 공식 조문사절로 파견될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존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아이젠하워가 아닌 당시의 주영 미국 대사에게 조문 사절을 맡겼고, 그로 인해서 미국은 처칠의 장례식 당시 별다른 주목을 못 받았다. 이 때문에 존슨은 미국 국민들에게 상당한 눈치를 받아야 했다. * 워싱턴 D.C.의 [[백악관]] 바로 뒤에 있는 아이젠하워 행정청사(Eisenhower Executive Office Building)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99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명명했다. 건물 자체는 1888년에 설립한 건물로, 처음엔 국무부와 전쟁부(국방부), 해군부 등이 위치해 있었으나 이후 부서들이 대부분 다른 청사로 이전하고 현대에는 주로 부통령 및 백악관 직원의 사무실들이 위치해 있다. 모두 합치면 수천명에 달하는 백악관 직원들이 모두 백악관 건물 내에서 일할 수는 없으므로 이 아이젠하워 빌딩 및 신행정청사(New Executive Office Building) 건물에 분산해 있다. == 대중 매체에서 == * 2008년에 개봉한 미국 할리우드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인디아나 존스 4: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에서는 [[인디아나 존스|인디아나 박사]]가 조국을 배신하라는 [[소련군]] 여장교의 말에 "I like Ike(난 아이크가 좋아)." 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Ike(아이크)는 아이젠하워의 별명이며, 저 문구는 아이젠하워의 선거 로고이다. 한국에서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당시의 영화관 자막에서는 이 대사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로 번역되어 나왔다. 아이젠하워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쪽이 더 친숙할 듯하다. *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 [[하프]]를 들고있는 [[야스]]([[나나]]의 등장인물)의 모습을 하고 나왔다. 패튼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 * [[콜 오브 후아레즈 : 건슬링어]]에 등장한다. 주인공 사일러스 그리브즈의 무용담을 듣는 젊은이인 드와이트가 이 사람이다. 막 20살 되던 시점인 듯. 세간에 알려진 온화하고 상냥한 성격과 달리 어릴 적부터 무용담이나 전설, 괴기 민담 등을 무척이나 즐겼던 모양이다. 야사에 따르면 아이젠하워는 동네에서 만난 한 늙은 카우보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것이 그의 영웅적 기개에 불을 질러 훗날 군인의 길을 걷도록 이끈 것 같다. * 아이젠하워부터 레이건까지 대통령의 집사로 지내온 세실 게인즈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버틀러#s-3|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에서는 [[로빈 윌리엄스]]가 아이젠하워를 맡았다.[* 비록 한 명(테디 루스벨트)은 밀랍인형으로서였지만, 로빈 윌리엄스는 미국 대통령 두 명을 맡게 되었다.][* 보통 코믹한 연기자로만 기억할 로빈 윌리엄스의 드문 정극 연기 캐릭터이기도 하다. 한국 토요명화에서는 로빈 윌리엄스의 전담 성우 [[배한성]]이 더빙을 했다.] 게인즈가 섬긴 첫 번째 대통령으로 게인즈가 대통령의 집사가 된 계기가 그 전까지 일하던 호텔에서 위의 브라운 판결에 대해 토론하던 백인 고객이 세실에게 그의 생각을 묻자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이 백악관 행정관의 눈에 들어서였다. 아이젠하워가 리틀 록에 연방군을 파견한 것에 감명을 받은 듯. * 중국의 전차 모에화게임인 [[강철의 왈츠]]에서 2017년 10월 24일 업데이트때 나온 22장-1에서 강철연맹의 높으신 분으로 등장했는데 돌아가던 도중 여행자들의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리는등 영 취급이 좋지 않다. * [[도미네이션즈]]에서 전술성 병력으로 등장한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아이젠하워(도미네이션즈))]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아이젠하워 사령관(도미네이션즈))] * 대체역사소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 주인공의 동기로 등장한다. [[별들의 기수]]에 대해 몰랐기에 이름을 대자마자 주인공을 식겁하게 만든건 덤. 유럽 서부전선의 총사령관직을 주인공이 맡는 대신 태평양 육군 전선을 총괄하게 된다. 원역사와 같이 원수까지 진급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탈모의 저주는 피하지 못한다... * [[세계 정복자 3]]에서 [[게오르기 주코프|주코프]], [[에리히 폰 만슈타인|만슈타인]]과 함께 3대 현질장으로 나온다. * [[세계 정복자 4]]에서도 역시나 [[게오르기 주코프|주코프]], [[에리히 폰 만슈타인|만슈타인]]과 함께 3대 현질장으로 등장한다...만은 스킬을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 세계 정복자 4 특성상 루머가 없어서 장기적으로 봤을 때 니미츠에게 밀린다. 모든 년도 정복에서 등장하며 사실상 미국을 먹여 살리는 존재.[* 다만 1943 정복에서는 기본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 [[장군의 영광 3]]에서도 [[게오르기 주코프|주코프]], [[에리히 폰 만슈타인|만슈타인과]] 함께 현질 3대장으로 등장. 여기서는 보병 병과에서 성능이 뛰어나다. *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도 미군 측 장성으로 등장. 더글라스 맥아더와 같이 원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작할 때부터 레벨이 5인데, 이 게임에서 레벨 2짜리 원수들이 많은 것을 보면[* 예를 들어서 프랑스는 원수가 4명이나 있는데도 죄다 쓰레기이다.] 굉장히 좋은 원수라고 할 수 있다. 공세에 유용한 각종 특성들을 가지고 있거나 시작부터 찍을 수 있는 것은 덤. 대신 특성을 제외한 공격력, 방어력 등의 스탯 자체는 평범한 편이다. 연합군 연설 DLC를 설치하면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의 일일명령 연설을 들어볼 수 있다. '앵앵이'라며 비웃음 당하는 스탈린의 '역사적으로 무적의 군대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연설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명확하게 귀에 꽂혀서 듣기도 편하다. * [[심슨 가족]]의 한 할로윈 에피소드 오프닝에서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이뤄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에이브 심슨]]은 유일하게 아이젠하워(IKE)를 지지했다(...). == 기타 == 미국 역대 대통령 중 19세기에 출생한 마지막 대통령이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시기(1953~1961년)는 한국 현대사에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1]],[[대한민국 제2공화국|2공]]과 겹친다([[북한]]은 [[김두봉]] → [[최용건]]). 또한 미국 역사에서 취임하자마자 [[6.25 전쟁|전쟁기]]를 마무리 지은 대통령 2호이기도 하다. 대통령 시절 [[조지프 매카시]] 견책결의안에 서명하면서 "McCarthyism is now McCarthywasm"([[매카시즘|매카시이즘]]은 이제 매카[[언어유희|시였]]즘이다)라는 유머를 남기기도 했다.[* 보면 알겠지만 영어 be 동사의 현재형과 과거형을 가지고 한 [[언어유희]]이다.] 미국 대통령들의 공식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는 아이젠하워의 손자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파일:external/www.coinfacts.com/1978s_ike_dollar_obv.jpg]] [[70년대]]에는 1달러 주화에 얼굴이 새겨져 있기도 했으나 [[80년대]]에 들어서기 전에 생산이 중지되었다. 해당 주화는 Ike Dollar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유통용 주화는 니켈을 도금한 구리이고, 기념 주화는 구리에 은도금을 하여 은의 비율이 40%이다. 위 사진의 Ike Dollar는 은도금 버전이다. [[니미츠급 항공모함]] 2번함에 이름이 쓰였다.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콜라]]를 권한 사람이다. 이후 콜라 맛을 본 주코프는 콜라 중독자가 되다시피 해서, 스탈린이 콜라 금수조치를 때린 이후에 들키지 않기 위해 미국 정부에 색깔없는 콜라를 부탁해서 몰래몰래 받아마시기까지 했다고 한다. 또 게오르기는 낚시광이어서 아이젠하워는 고급 낚시대를 선물했고 게오르기는 그걸 또 애지중지하며 썼다고 한다. 유명한 노래인 [[Fortunate Son]]이 아이젠하워의 손자를 까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누구는 할아버지 빽으로 꿀을 빨면서 전쟁에 반대한 청년들을 끌고가 사지로 내모는 모순을 비판한 것.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 시절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컬럼비아 대학은 잔디밭을 돌아서 들어가야 했는데 그것이 귀찮은 학생들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면서 잔디가 훼손되자, 학교측에서는 잔디밭 출입금지 문구를 박아놓고 심지어 철조망까지 둘러쳤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잔디밭 가로지르기는 계속되었는데, 이를 본 아이젠하워 총장이 "이 철조망은 뭡니까?"하고 묻자, 관리인은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학생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아이젠하워 총장은 "그곳에 길을 내도록 하세요. 모두가 다니면 그곳이 길입니다." 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도널드 트럼프]]가 [[멕시코 장벽|벽]]을 세우면서 다시 회자되곤 했다.] 어렸을 적 [[캔자스 주]]에서 자라서 캔자스에 그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그의 동생인 밀튼 아이젠하워가 [[캔자스 주립대학교]] 총장까지 역임을 하였으니 그리고 위치타에는 아이젠하워의 이름을 딴 공항이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하루 전에 아내 메이미 여사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0872047|#]] 미국 대통령들중 임기 도중 [[고희]]를 맞은 첫 대통령이다. 이전에 나온 대통령들중 [[앤드루 잭슨]]과 [[제임스 뷰캐넌]]은 69세에 퇴임했고, [[윌리엄 해리슨]]은 당시 최고령인 68세에 취임했으나 취임 한달만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분류:드와이트 아이젠하워]] [include(틀:포크됨2, title=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d=2023-01-02 08:1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