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68a46 0%, #968a46 20%, #968a46 80%, #968a46);" '''[[성인(기독교)|{{{#fff 성인}}}]][br]{{{#fff {{{+1 라도네즈의 세르기우스}}}[br]Се́ргий Ра́донежский | Sergius of Radonezh}}}'''}}}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세르기우스.jpg|width=100%]]}}} || || '''{{{#white 본명}}}''' ||바르폴로메이 키릴로비치 (Варфоломе́й Кириллович) || || '''{{{#white 이명}}}''' ||세르기 라도네즈스키 (Се́ргий Ра́донежский) || ||<|2> '''{{{#white 출생}}}''' ||[[1314년]] [[5월 14일]] || ||[[블라디미르-수즈달]] [[로스토프 벨리키]] 바르니차 || ||<|2> '''{{{#white 사망}}}''' ||[[1392년]] [[1월 2일]] (향년 78세) || ||[[모스크바 대공국]] [[세르기예프 파사드]] || || '''{{{#white 직업}}}''' ||[[성직자]]([[수도자]]) || || '''{{{#white 가족}}}''' ||^^'''부'''^^ 키릴 ^^'''모'''^^ 마리아 || || '''{{{#white 종교}}}''' ||[[정교회]] || || '''{{{#white 성인명}}}''' ||세르지오[*가톨릭] 세르기오스[*정교회] {{{#!folding [언어별 명칭] [[라틴어]]: 세르기우스 {{{-2 (Sergius)}}} [[영어]]: 서지어스 {{{-2 (Sergius)}}} [[프랑스어]]: 세르주 {{{-2 (Serge)}}} [[독일어]]: 세르기우스 {{{-2 (Sergius)}}} [[스페인어]]: 세르히오 {{{-2 (Sergio)}}} [[이탈리아어]]: 세르지오 {{{-2 (Sergio)}}}}}} || || '''{{{#white 축일}}}''' ||[[9월 25일]][*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축일.] [[7월 18일]][* [[정교회]]의 성해 발견 축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러시아]]의 [[수도자]]. 중세 러시아의 대표적인 수도사제이자 영적 지도자, 그리고 러시아 최초의 신비가로 [[사로프의 세라핌]]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기독교)|성인]]으로 공경받는다. == 생애 == 1314년[* 일부 기록에서는 1319년 혹은 1322년에 출생했다고 쓰여 있다.] [[로스토프 벨리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 키릴과 마리아는 [[보야르]] 혈통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본명은 바르폴로메이(Варфоломе́й)인데, 이는 [[사도 바르톨로메오]]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바르폴로메이는 15세 때에 로스토프 벨리키가 [[모스크바 대공국]]로부터 침략을 당하자 그의 가족은 결국 정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피난을 하면서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모스크바]] 교외인 라도네즈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1335년 부모와 사별한 바르폴로메이는 당시 그의 형 스테판이 [[수도자]]로 지내고 있는 호트코보 지역으로 가 조금 더 외진 장소를 찾아달라고 설득했다. 이로써 형제는 마코프카 언덕의 울창한 숲을 발견해 그곳에서 조그만 은수 생활용 공간과 [[삼위일체]]를 위한 성당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훗날 [[세르기예프 파사드]]에 위치한 삼위일체 수도원으로 발전했다. 한편 바르폴로메이는 은수 생활을 하던 중 모스크바의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수행을 거친 뒤 그곳에서 세르기우스[* [[러시아어]]식 이름은 세르기(Се́ргий).]란 수도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의 살벌한 추위를 견디며 은수 생활을 계속하였으므로 그의 성덕이 널리 알려졌다. 그의 명성을 듣고 제자들이 몰려들자 세르기우스는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삼위일체 수도원을 세워 원장이 됨과 동시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타타르족]]의 침략 이후 사라졌던 러시아의 수도 공동체를 재건한 것이었다. 비록 그는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러시아 국민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분열되어 있던 조국 러시아의 일치를 위해 제후들의 통합과 일치를 요청했다. 이에 그는 1380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작위)#루스 차르국 성립 이전|벨리키 크냐즈]]였던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돈강]] 상류의 쿨리코보 지역에서 타타르족과 전투를 벌인 뒤 러시아를 해방시켰을 때 그를 축복해 주어 러시아에 퍼진 갈등을 평화로 봉합하기를 빌었다. 이 승리 이후 세르기우스의 명성은 더욱 퍼져나갔고, 여러 러시아 귀족들이 협조해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짓게 되었다. 그리고 1392년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 세르기우스는 자신이 세운 수도원의 원장직을 사임한 후 6개월 뒤에 세상을 떠났다. == 관련 문서 == * [[세르기예프 파사드]] [[분류:1314년 출생]][[분류:1392년 사망]][[분류:야로슬라블 주 출신 인물]][[분류:정교회 수도자]][[분류:가톨릭 성인]][[분류:정교회 성인]][[분류:성공회 성인]][[분류:루터교회 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