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명''' ||<(> 라울 드 카우르[br]Raoul de Caours || ||<-2> '''생몰년도''' ||<(> 미상 ~ [[1354년]] [[7월]] || ||<-2> '''출생지''' ||<(>[[브르타뉴 공국]] 게랑드 || ||<-2>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 ||<-2> '''직위''' ||<(> [[기사(역사)|기사]] || [목차] [clearfix] == 개요 == [[브르타뉴 공국]]의 [[기사(역사)|기사]]. [[백년 전쟁]] 시기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을 오가며 여러 전투를 수행했다. == 생애 == 브르타뉴 공국의 게랑드 출신 기사로, 본래 [[장 드 몽포르]]의 편에 서서 [[잔 드 팡티에브르]], [[샤를 드 블루아]] 부부에 맞섰다. 그 과정에서 장 드 몽포르를 지원하던 잉글랜드군과 함께 했다. 1344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로부터 장 드 몽포르의 편에 서서 프랑스 왕국에 대적한 죄를 사면하겠다는 편지를 받고 샤를 드 블루아 휘하에 들어가 잉글랜드군과 대적했다. 하지만 1347년 다시 잉글랜드군에 귀순했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 의해 푸아투의 보안관에 선임되었으며, 프랑스군 사령관 투아르 자작 루이 1세를 생포하는 전공을 거뒀다. 1348년 11월 13일 브르타뉴 순화 판사 및 브르타뉴 주군군 지휘관을 맡았다. 1349년, 잉글랜드군 기사 [[월터 벤틀리]]가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처형된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의 미망인인 잔 드 벨빌과 결혼한 뒤, 라울 드 카우르가 프랑스로부터 탈취한 잔 드 벨빌의 성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이에 분노한 라울이 벤틀리와 전쟁을 벌이려 하자, 에드워드 3세가 중재에 나섰다. 그해 10월, 에드워드 3세는 벤틀리가 이 성을 갖고 라울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게 했다. 그러나 라울은 이 판결에 불만을 품고 1350년 새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위원들과 협상해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스 국왕을 충실히 섬기는 대가로 보부아르쉬르메르, 일쇼베, 부앵, 및 람팡의 성과 땅을 다스릴 권리를 인정받았다. 1350년 8월 오레에서 매복 공격을 가해 브르타뉴 주둔 잉글랜드군 사령관 [[토머스 다그워스]]를 살해했다. 1351년 1월 4일, 장 2세와 반, 캥페르, 게랑드 마을 및 요새를 탈환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이때 장 2세는 서신에서 그를 "dilectus and fidelis consiliarius noster"(우리의 사랑스럽고 신실한 조언자)라고 지칭했다. 라울은 1351년 말 잉글랜드군으로부터 누아르무티에를 공략했다. 그러나 얼마 후 낭트 출신의 장교 마시오 드 마회이가 이끄는 용병대에 사로잡힌 뒤 잉글랜드로 끌려갔다. 프랑스 측은 1352년 2월 25일 200파운드의 연금을 줄 테니 그를 석방시켜 안전하게 귀환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354년 7월 포로 생활 중에 사망했다. [각주] [[분류:1354년 사망]][[분류:백년전쟁/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