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프랑스 대통령)]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FFF 80%, #ECECEC); color: #23235A" '''{{{#23235A 레몽 푸앵카레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프랑스 총리)] ---- [include(틀:역대 프랑스 제3공화국 총리)] ---- [include(틀:1차 세계대전 주요 참전국 국가원수)]}}}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FFF 80%, #ECECEC); color: #23235A" '''[[프랑스 대통령|{{{#23235A 프랑스 공화국 제10대 대통령}}}]][br]{{{#23235A {{{+1 레몽 니콜라 랑드리 푸앵카레}}}[br]Raymond Nicolas Landry Poincaré}}}'''}}}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incare_larger.jpg|width=100%]]}}}|| ||<|2> '''출생''' ||[[1860년]] [[8월 20일]] ||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 뫼즈 || ||<|2> '''사망''' ||[[1934년]] [[10월 15일]] (향년 74세) ||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랑스 || ||<|6> '''재임기간''' ||<(>제39대 총리|| ||<(>[[1912년]] [[1월 21일]] ~ [[1913년]] [[1월 21일]] ^^1기^^|| ||<(>[[1922년]] [[1월 15일]] ~ [[1924년]] [[6월 8일]] ^^2기^^|| ||<(>[[1926년]] [[7월 23일]] ~ [[1929년]] [[7월 29일]] ^^3기^^|| ||제10대 대통령[* [[안도라]] 공동 영주 겸임.]|| ||[[1913년]] [[2월 18일]] ~ [[1920년]] [[2월 18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373a3c,#dd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직업''' ||[[정치인]] || || '''정당''' ||민주 공화국 동맹 || || '''약력''' ||프랑스 공화국 총리[br]프랑스 공화국 제10대 대통령 ||}}}}}}}}}}}}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 [[프랑스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 동시대의 유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앙리 푸앵카레]]와는 사촌지간이다. == 생애 == 1860년 뫼즈 지역에서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리 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한 뒤, 27세였던 1887년에 국민회의[*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하원 역할을 하던 의회이다. 상원의 기능을 하던 의회는 [[원로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에 당선되면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소장파 보수주의자들을 지칭하는 '푸앵카레주의'라는 신조어[* 다만 이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조르주 클레망소]]를 위시로 한 푸앵카레의 정적들이 그를 비난하기 위해서 만든 신조어이다. ~~[[수구꼴통]] 정도의 [[뉘앙스]]인건가~~]를 만들 정도로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내다가 [[1912년]]에 수상으로 취임하며 [[1913년]]에는 대통령이 되었다. 유럽의 열강 사이에서 충돌이 격화되던 이 시기에 그는 반독사상을 바탕으로 외교정책을 펼친다. 총리로서는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하여 [[삼국 협상]]을 더욱 굳건히 만들었고, [[프랑스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마른 전투]]에서 보이듯이 강한 항전의지를 가지고 [[독일 제국]]과 맞서 싸웠다. 1917년 무렵부터 기나긴 [[참호전]]에 지쳐 프랑스 내부에서 염전사상이 짙어져 가자[* 최전선 군부대에서부터 폭동이 일어나는 지경이었고, 프랑스 정부는 장병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서 무의미한 공세를 중단할 것을 약속해야 할 상황이었다.] 단호한 항전의지를 보여주던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이 시기 클레망소가 한 유명한 말이 바로 '나는 싸운다.']를 총리로 임명하여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총리였던 클레망소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모든 실권을 사실상 잃어버린데 이어 [[베르사유 조약]] 등의 조건을 놓고 강화에 반대[* 당연히 너무 가혹해서가 아니라 너무 유약한(...) 조건이라고 생각해서 강화를 반대한 것이었다. 후일 회고록에서 푸앵카레는 자기가 실권을 쥐고 있었으면 [[라인란트-팔츠|라인란트]] 일대를 점령하는 것은 기본이고 독일 제국 영내로 계속 진격할 것을 명령했을 거라고 밝혔다.]하다가 [[1920년]] 대통령에서 물러나게 된다. 2년 뒤 다시 수상으로 취임한다. 그의 반독일 경향은 여전해서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바이마르 공화국]]이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한 배상금을 지불하지 못하자 [[벨기에]]와 함께 무력을 동원하여 [[루르]] 일대를 [[루르 점령|점령하는 외교적 초강수]]를 둔다. 그렇지만 이는 독일 내에서 극심한 반발과 더불어 [[사보타주]]만을 일으켰을 뿐이고[*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에서부터 이를 갈면서 루르 일대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명령했다. 물론 프랑스는 자국 노동자들을 데려와서 노동력을 메꾸긴 했지만..] 독일에게 동정적이었던 영국과 미국과도 엄청난 외교적 마찰을 초래하면서[* 어찌나 영불이 이 때 서로 싸웠던지 하마터면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동맹이 파기될 뻔 했다.] 결과적으로는 프랑스에게 마이너스로 작용했을 뿐이다. 여기에 전쟁으로 인한 불황까지 더해지면서 [[1924년]] 푸앵카레는 총리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이후 1926년 다시 한 번 총리직에 오르지만 고령으로 인해 [[1929년]] 정계를 은퇴하고 1934년 [[파리(프랑스)|파리]]에서 사망한다. == 기타 == 예전에는 '포항가리'라는 쌈박한 표기로 불렸다. 스승에 대한 공손으로 유명한 포항가리 대통령이 바로 이분. [[분류:프랑스 대통령]][[분류:프랑스 총리]][[분류:프랑스의 남성 정치인]][[분류:1860년 출생]][[분류:1934년 사망]][[분류:뫼즈 출신 인물]][[분류:파리 대학교 출신]]